주간동아 579

2007.04.03

정치에 허기져 승자 찜하기?

한국노총, 대선후보 지지 방침 안팎 큰 관심 … ‘정책연대’로 勞風 불어 좋은 날 오나

  • 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

    입력2007-03-30 12: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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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에 허기져 승자 찜하기?

    3월9일 한국노총 창립 61주년 기념식 행사에 참석한 대선주자들.

    ‘정책연합’의 업그레이드판인가,‘승자편승 전략’의 부활인가.

    2월28일 열린 정기대의원대회에서 제17대 대통령선거에서의 특정 후보 지지를 공식 선언한 한국노동조합총연맹(위원장 이용득·이하 노총)의 최근 행보에 대한 노동계 안팎의 엇갈린 분석이다.

    노총은 현재 노총 차원에서의 대선후보 지지 여부를 묻는 1차 조합원 총투표를 산별, 연맹별로 진행 중이다. 3월14일부터 28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투표의 개표 결과는 3월31일까지 노총 정치기획단에 취합되고, 찬성 의견이 다수를 이뤄 지지방침이 확정되면 10~11월에 2차 조합원 총투표를 실시해 지지할 특정 후보를 선택하게 된다.

    노총의 대선후보 지지 선언이 세간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7년 전 민주노동당을 창당해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성공한 데 이어 2002년 대선에 독자 후보까지 낸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과 달리, 올해로 창립 61주년을 맞고도 여태껏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이뤄내지 못한 비운(?)의 전력 탓이다. 또한 87만여 조합원, 3257개 단위노조(2007년 3월 현재)를 거느린 매머드 조직이 천명한 초유의 대선후보 지지라는 점에서도 관심을 끈다.

    노총이 이번 대선을 위해 내세운 전략은 이른바 ‘정책연대’. 노총에 따르면, 정책연대는 주장을 달리하는 2개 이상의 세력이나 집단이 특정 정책의 실현을 도모하기 위해 상호간 협의하에 제휴나 행동 통일을 결정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각 정당별 대선후보들에 대한 검증용 평가지표를 만들어 2차 조합원 총투표 전까지 그들의 자질과 성향, 공약 실현 가능성 등을 분석한 뒤 노총이 제시하는 대선공약을 최대한 수렴하는 특정 후보를 전폭적으로 밀겠다는 의미다.



    정치에 허기져 승자 찜하기?

    대선후보 지지 방침을 공언한 2월28일 한국노총 정기대의원대회.

    향후 노총 운명의 중요한 시험대

    그동안 노총에 정치활동 마스터플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노총 내부적으로는 이미 10년 전에 만든 ‘한국노총 21세기 정치활동 플랜’을 통해 ‘1997년 대선에서 정책연합을 실현할 수 있는 친(親)노동자적 후보 지지→2000년 총선에서 노동계 및 친노동계 후보로 20개 의석 확보→2002년 대선에서 정당 제휴를 통한 정권 참여→2004년 총선에서 노총의 독자 정당 건설→2007년 대선에서 독자 후보 추대를 통한 수권 기능세력으로 부상→2008년 총선에서 독자 정당으로 제1야당 지위 확보→2012년 대선에서 노동자와 국민 대중의 독자 정당 집권’이라는 장기계획을 수립했던 터다.

    하지만 이 같은 원대한 구상은 일찌감치 깨졌다. 전통적으로 노총의 대선전략을 규정한 것은 이른바 ‘승자편승 전략(bandwagon strategy)’. 집권 가능성이 있는 후보와 정당을 지지하는 대가로 노총의 정치적 발판을 마련하고, 노동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보장받는 긴밀한 협조관계(국가조합주의적 노조-정당 관계)가 그것이다. 그러나 1996년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이 정리해고제와 변형근로제 등을 핵심으로 한 노동법을 통과시키자, 여당에 대한 불신이 싹트기 시작한 노총은 이듬해 대선에서 승자편승 전략에서 탈피해 당시 야권의 김대중 후보와 정책공조를 하는 이른바 ‘정책연합’을 모색했다.

    그런데 이 또한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노선 때문에 미완으로 끝났고, 이후 민주노동당의 약진에 자극받은 노총은 2003년 민주사회당을 출범시켰다. 2004년 총선에선 ‘노총 역사상 최대 사건’으로 일컬어지는 녹색사민당(대표 장기표) 창당을 통해 정치세력화를 시도했다.

    그럼에도 총선 참패로 정당의 존속조차 어렵게 되자 이남순 당시 위원장 등 노총 지도부가 총사퇴함으로써 노총은 되레 위상마저 추락하는 최대 위기를 맞았고, 이후 정치세력화는 한낱 바람이 됐을 뿐이다. 이 때문에 이번 대선후보 지지 방침은 향후 노총의 운명을 가늠할 또 하나의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노총 지도부는 앞으로의 상황 전개를 낙관하는 분위기다. 지도부의 폐쇄적인 의사결정으로 지지 후보를 결정하고 이를 일방적으로 조합원들에게 발표해온 오랜 관행에서 벗어나, 이번에는 조합원의 자발적인 총투표를 통해 정치방침을 결정하는 만큼 투명하고 공정한 정치활동이 이뤄질 수 있다고 보는 것. 아울러 그런 과정을 통해 조직을 재정비하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책 파트너 한나라당 가장 유력

    노총 최대열 정치기획팀장은 “예전의 노총은 정치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하지만 이번 정책연대는 ‘노총 지도부만의 잔치’가 아니므로 최소 50만 표 이상의 노동자 투표 블록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면서 “선거운동이 시작되면 조합원들이 직접 특정 후보를 위한 득표 활동에 나설 계획”이라고 밝혔다.

    노총은 어떤 후보를 낙점할까. 또한 ‘노풍(勞風)’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노총은 민주노동당 대선후보는 지지 대상에서 배제해놓은 상태. 현재 가장 유력한 정책연대 파트너로 점쳐지는 곳은 한나라당이다. 실제로 노총을 향한 한나라당의 손짓은 활기차다.

    한나라당 지도부가 이번 대선에서 노동계 표심을 잡기 위해 3월19일 출범시킨 당 노동위원회(위원장 배일도 의원)의 중앙당 노동위원과 16개 시·도당 노동위원장 중엔 노총 간부 출신이 다수 포진해 있다. 이에 앞서 3월9일 한국노총회관에서 열린 노총 61주년 창립기념식에도 한나라당 대선주자들이 일제히 자리를 같이한 바 있다. 배일도 의원실의 한 관계자는 “당 노동위원회는 노총과의 공약개발 작업 등 ‘교감’을 위한 창구 구실을 하게 된다”면서 “일부 현직 노총 간부들까지 노동위원회 멤버로 참여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말려야 했을 정도”라고 귀띔했다.

    그러나 지역본부 등 산하조직에서 당원 신분으로 기성 정당과 연계를 맺고 있는 조합원들이 적지 않은 점, 조합원들의 정치적 각성이 그리 높지 않은 내재적 한계 등으로 노총의 정책연대가 구태를 벗기 어렵지 않겠느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진보 성향 인터넷신문 ‘레디앙’의 이재영 기획위원은 “이번 정책연대는 정치세력화를 학수고대해온 노총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고육지책일 수 있다”면서도 “설령 정책연대에 성공해 노총 출신 인사들이 차기 총선에서 국회에 진출하더라도 반(反)노동자적 정책을 입안한다면 진정한 노동자 정치세력화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현우 연구위원 역시 “정책연대는 과거의 승자편승 전략을 변형시킨 것에 불과하다”면서 “특정 대선후보 지지의 대가로 향후 총선에서 비례대표의원 등 일정 지분을 보장받게 된다면 그간의 잘못된 관행을 답습하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정책연합과 독자 정당의 실험이 무위로 끝난 지점에서 새롭게 시작된 정책연대. 과연 ‘정치적 미아’라는 빈축을 사온 노총의 처지를 일거에 바꿔놓을 수 있을까. 노총의 진정한 숙원 풀이는 대선 저 너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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