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71

2007.01.30

침략자와 전쟁, 적극적 평화전략

  • 이명재 자유기고가

    입력2007-01-29 10:5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침략자와 전쟁, 적극적 평화전략
    ‘뜨거운 얼음’ ‘평화를 위한 전쟁’.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이 어느 책에선가 한 이야기다. 1960년대 미국의 대학가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학생이 많았다고 한다. 부도덕하게 베트남전쟁을 벌이는 미국 정부를 모순적인 글귀로 비꼬았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평화를 위한 전쟁’은 성립할 수 있는 것일까. 최근 개봉된 영화 ‘묵공’은 이런 질문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조나라 대군이 작은 나라 양성을 침공할 때 양성을 도우러 온 혁리는 뛰어난 지략과 전술로 조나라 공격을 물리친다. 그런데 영화의 제목이 왜 묵공인가. 묵공(墨攻)은 묵가(墨家)에서 나온 것이다. 혁리는 겸애와 평화주의 사상을 제창하는 제자백가인 묵가의 제자였다. 묵자의 겸애는 인간이 자신을 사랑하듯 다른 사람을 ‘평등애’로 사랑할 때 사회에 평화가 온다는 사상이다. 그렇다면 평화주의자들이 일종의 용병사업을 한 것이라는 얘기가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자기모순 아닌가?

    그러나 묵공은 묵가의 적극적인 평화론이 녹아 있는 방어법이었다. 남을 먼저 공격하는 일은 없지만 침략전쟁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처한다는 점에서 소극적이 아닌 적극적 평화전략이었다. 이런 신념이 있었기에 묵가는 군을 양성해 안전과 평화를 위협받는 약소국들에 군사를 빌려줬다. 진짜 ‘평화를 위한 전쟁’의 모범을 보여줬던 셈이다.

    묵가의 ‘방어전쟁론’은 그의 철저한 겸애사상의 바탕이 있었기에 당대에 나름대로 명분과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다. 만약 박애주의라는 뿌리가 없었다면 그건 공허한 정치공학적 수사나 선전에 불과했을 것이다. 누구든 상대방은 침략군으로, 자신이 벌이는 전쟁은 평화를 위한 방어전으로 내세우려 하지 않았겠는가.



    이라크전쟁 이후 이라크의 민간인 사망자가 연간 3만5000명에 육박한다는 조사결과가 보도됐다. 이 전쟁을 시작한 미국이 내건 명분도 테러리스트에게서 자국을 지키려는 방어전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 몇 년간 전 세계인들이 혼란에 빠진 건 과연 누가 진짜 테러리스트이고, 누가 희생자인지 알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광기어린 미군 지휘관인 킬 고어 중령은 “나는 아침의 네이팜탄 냄새가 좋아”라고 내뱉는다. 평화를 위한 것도 아니고 방어를 위한 것도 아닌, 그저 전쟁의 냄새가 좋은 이들이 혹시 있는 건 아닐까. 서두에 말한 스티븐 킹은 마침 새해를 맞아 자기의 소원 중 하나는 그런 이들 가운데 한 명이 법정에 서는 것을 볼 때까지 살고 싶은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영화의 창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