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71

2007.01.30

‘애플 신화’ 스티브 잡스의 무한도전

컴퓨터·MP3 플레이어 대박 이어 ‘아이폰’으로 휴대폰 시장에 출사표

  • 곽동수 한국싸이버대학교 컴퓨터정보통신학부 교수 savin2@gmail.com

    입력2007-01-24 11: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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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플 신화’ 스티브 잡스의 무한도전

    애플의 히트상품 애플 셔플.

    전 세계의 디지털 가전업계는 1월8일부터 나흘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Consumer Electronics Show)에 모여 신제품을 자랑하면서 기술의 향연을 벌였다. 그러나 정작 ‘특종’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맥월드(Macworld) 컨퍼런스에서 나왔다.

    회사명에서 컴퓨터를 떼어버리고 변신한 애플 주식회사(Apple Inc.)의 차세대 휴대폰 아이폰(iPhone). “시장점유율 1%를 차지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 말과 함께 전자회사로 변신한 애플의 최고경영자(CEO) 스티브 잡스는 신년벽두, ‘태풍의 눈’으로 세계무대에 다시 등장했다. 애플이 앞으로도 계속 성공가도를 달릴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스티브 잡스의 인생을 살펴본다면 어느 정도나마 예측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스물다섯 살에 억만장자 올라

    디지털 분야에 종사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카리스마를 계량화해 비교한다면 단연 1위는 스티브 잡스다. 그는 2시간의 기조연설을 어떤 도움을 받지 않고도 지루하지 않게 이끌어가는 능력의 소유자다. ‘말재주’로 폄하하기에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설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최근에는 그의 프레젠테이션 노하우를 분석한 책마저 나왔을 정도다.

    그러나 스티브 잡스는 안정된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학교를 졸업한 모범생 이미지보다는 다소 오만하고 건방져 보이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의 ‘비공식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iCon 스티브 잡스’(민음사, 2005)를 쓴 제프리 영과 윌리엄 사이먼은 드라마 같은 잡스의 인생을 잘 정리하고 있는데, 이 책를 살펴보면 왜 잡스가 만드는 애플의 상품들이 기존의 벽을 깨는 이미지를 갖는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



    195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스티브 잡스는 명성을 얻기 전까지 자신의 부모나 출생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출생 후 불과 몇 주 만에 ‘대학을 보낼 수 있는 형편이 되는 양부모’를 찾는 미혼모의 손을 떠나 입양됐기 때문이다. 보험수금원, 부동산업자를 거쳐 엔지니어가 된 양아버지 밑에서 자란 잡스는 어린 시절부터 끼를 드러냈다. 유난히 호기심이 많고 기계장치 다루기를 좋아했던 것. 학교에 가기 싫다며 부모의 속을 썩이기도 했다.

    그런데 중·고등학교 시절 ‘기술에 관한 한 내가 최고’라고 믿고 있던 잡스 앞에 스티브 워즈니악이라는 진짜 천재가 등장했다. 아마도 이맘때쯤 잡스가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욕구가 강하게 생긴 잡스는 워즈니악의 기술에 자신의 배짱을 보태 첫 작품인 불법 무료전화 통화장치 ‘블루박스’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던 잡스는 대학도 스스로 골랐다. 집에서 가까운 수많은 명문대를 뒤로한 채, 고급 사립대학이면서 두뇌가 우수한 학생들이 많기로 소문난 리드대학을 선택했다. 입학금과 수업료가 엄청난 터라 그의 부모는 주저했지만, 친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고자 진학시켰다.

    그러나 잡스는 겨우 한 학기 만에 졸업장을 포기한 채 자신이 배우고 싶어하는 과목들만 골라 들으며 학교에 머물렀다. 중퇴했음에도 학교 측의 배려로 18개월이나 더 기숙사에 머물렀다는 점은 그가 독특한 매력을 지녔음을 입증하는 또 다른 증거이기도 하다.

    ‘애플 신화’ 스티브 잡스의 무한도전

    애플컴퓨터 창립 당시의 스티브 잡스.

    당시 잡스는 우연히 신문을 뒤적이다 발견한 ‘아타리(Atari)’라는 비디오게임회사에 잠시 취업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깨달음을 찾아 인도로 향했고, 이후 지금까지도 선불교에 빠져 있다. 선불교의 영향은 컴퓨터 개발에도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초기 애플Ⅱ 컴퓨터를 만들 때 컴퓨터 소음을 줄이기 위해 컴퓨터 내부를 식히는 팬을 없앤 것도 선불교의 영향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몇 년 후인 1976년 4월1일, 잡스는 끈질긴 설득 끝에 친구 워즈니악과 계약을 맺고 애플컴퓨터를 설립했다. 워즈니악이 만든 회로기판을 상업용으로 만들어 판매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애플I이다. 당시만 해도 잡스나 워즈니악은 자신들이 세상을 바꿔놓을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이듬해인 1977년, 웨스트코스트 컴퓨터 박람회에서 잡스는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PC) 애플Ⅱ를 선보였다. 당시 사람들은 ‘개인이 사용하는 컴퓨터’라는 낯선 개념을 기쁘게 받아들이면서 고작 스물네 살의 잡스를 백만장자로 만들었다(스물다섯 살에는 역사상 가장 젊은 억만장자가 됐다). 잡스의 자신감은 대단했기에, 81년 컴퓨터의 대명사였던 IBM이 PC를 출시했을 때 두려움은커녕 오히려 호기를 부리며 ‘IBM을 환영합니다’라는 광고를 내놓기도 했다.

    애플서 쫓겨난 뒤에도 재기 성공 ‘더 큰 도약’

    이렇게 잘나가던 잡스의 인생은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하는 ‘올해의 인물’에서 낙마하면서 꼬이기 시작했다. 애플컴퓨터 창립 당시 잠시 사귀다 헤어졌던 여성이 여자아이를 안고 나타나 잡스의 딸이라고 주장했다. 친자 검사를 통해 잡스의 딸이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졌지만, 그는 딸을 외면했다. 1982년 ‘타임’은 올해의 인물로 잡스를 뽑을 예정이었지만, 자신이 입양아 출신임에도 부정(父情)을 외면한 파렴치한으로 보이는 잡스의 행동 탓에 잡스 대신 ‘컴퓨터’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그러곤 줄곧 내리막길이었다. 차기작 애플Ⅲ도 실패했다. “남은 인생을 설탕물이나 팔며 허비하실 생각인가요”라는 멋진 유혹으로 펩시콜라 출신의 존 스컬리를 애플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고집스럽고 자기중심적인 잡스의 태도 때문에 스컬리는 1985년 잡스를 애플에서 내쫓아버렸다.

    그의 나이 서른다섯. 아무도 그가 백수로 지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잡스가 설립한 넥스트(NeXT)컴퓨터는 지나친 고가 전략 탓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즈음 잡스는 애니메이션 회사인 픽사(Pixar)를 ‘스타워즈’의 아버지 조지 루카스에게서 매입했다. 그러나 잡스는 픽사에 적극 개입하기보다는 넥스트에 매달렸다. 사실 픽사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끊임없이 돈을 투자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은 덕에 1995년 ‘토이스토리’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저 영화의 몇 장면을 보태는 역할에 불과하던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성공적으로 키워낸 결과, 역사상 가장 히트한 디지털 애니메이션 7편(‘토이스토리1’ ‘토이스토리2’ ‘벅스 라이프’ ‘몬스터 주식회사’ ‘니모를 찾아서’ ‘인크레더블스’ ‘카’)을 만들 수 있었다.

    ‘토이스토리’의 히트로 잡스가 재기에 성공할 즈음, 애플은 여러 명의 CEO를 갈아치우며 위기를 겪고 있었다. 결국 애플은 새로운 운영체제를 얻기 위해 넥스트 매입을 결심했고, 결국 13년 만인 1997년 잡스는 애플로 돌아왔다. 연봉은 단돈 1달러, 임시 CEO 직위였다. 그러나 그는 회사 재편을 시작했고 ‘다르게 생각하라(ThinkDifferent)’는 슬로건을 내걸어 직원들을 독려했다.

    그 후 잡스는 신제품 컴퓨터 ‘아이맥’을 내놓았다. 모니터와 본체가 합쳐진 일체형이면서 다채로운 컬러를 선보인 아이맥은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디자인은 인간이 만든 창조물의 영혼이다. 제품이나 서비스라는 외양으로 표출되는 영혼이다.” 잡스는 이렇게 말하면서 판매에 열을 올렸고, 그 결과 10억 달러 적자였던 회사는 불과 1년 만에 4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으며 애플은 다시금 성공궤도에 올라섰다. 하지만 진짜 성공은 컴퓨터가 아닌 MP3 플레이어에서 나왔다.

    95년 췌장암 걸려 죽을 고비 넘기기도

    2001년 10월23일, 잡스는 주머니 속에 1000곡의 노래를 담고 다닐 수 있는 아이팟(iPod)을 내놓았다. MP3 플레이어 시장은 형성된 지 오래됐기 때문에 아이팟의 성공을 예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평론가들은 “큰 실패를 맛볼 것”이라며 험악한 논평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잡스는 이번에도 보란 듯이 성공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현재, 전 세계 판매량 1억3000만 대를 자랑하는 MP3 플레이어 시장에서 아이팟이 몇 년째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온라인 음악판매 사이트인 ‘아이튠스 스토어(iTunes Store)’는 진출한 모든 나라에서 디지털 음악판매 1위를 기록 중이다. 또한 미국 내에서 아이튠스 스토어는 디지털 음악과 CD 판매를 포함한 판매순위에서 아마존닷컴(Amazon.com)을 밀어내고 종합 4위를 기록 중이라는 점에서 그의 성공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

    아이팟의 성공 요인은 사용자 처지에서 필요한 제품과 서비스를 적정 가격에 제공한다는 데 있다. 또한 아이팟 사용자들만의 문화를 만들어냈다. 새로운 기능 추가에 연연하기보다 잡스는 사용자가 진정으로 음악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가지고 있는 CD를 디지털로 바꿔서 들을 수 있게 했으며, 단돈 1달러에 노래 한 곡을 살 수 있는 24시간 온라인 상점을 열면서 불법복제와의 싸움을 벌인 결과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잡스의 삶은 이후에도 도전의 연속이었다. 1995년 췌장암 진단과 함께 겨우 몇 달간만 살 수 있다는 시한부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조직검사 후 치료가 가능한 암이라는 게 밝혀져 죽음 앞까지 갔다가 회복할 수 있었다.

    잡스는 지난해 스탠퍼드대학 졸업식에서 축사를 통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가슴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가슴과 직관은 진실로 무엇이 되고 싶은지 이미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대학 졸업장도 없는 그가 세계 최고의 크리에이터로 평가받는 이유는 그 자신이 바로 가슴과 직관을 따르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 그 어느 나라에서도 스티브 잡스처럼 성공과 실패, 그리고 다시 성공하기를 거듭한 경영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이뤄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제는 전 세계 판매량이 한 해 10억 대에 달하는 이동통신산업의 핵심으로 들어섰다. 그가 과연 애플 아이폰을 2008년 목표인 1% 점유율, 즉 1000만 대 판매로 이끌 수 있을지는 중요치 않다. 그의 도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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