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69

2016.12.28

사회

법망 미꾸라지 ‘먹튀 병원’ 주의보

폐업신고 당일 문 닫고 진료비 반환 안 해도 처벌 無…‘사무장 병원’ 피해 더 심각

  • 김지현 객원기자 bombom@donga.com

    입력2016-12-23 17:4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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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0만 원짜리 치아교정을 280만 원에 해준다고 해서 솔깃했죠. 병원이 멀었지만 진료비가 싸니까 열심히 다녔어요. 그런데 진료받으러 갈 시간에 경찰서에서 진술서를 쓸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경기도에 사는 대학생 A(23)씨는 2016년 1월부터 서울 강남구 신사동 G치과에서 교정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11월 중순까지 월별 진료도 꼬박꼬박 받았다. 하지만 이 치과는 12월 12일 돌연 폐업했다. 환자 수천 명이 선결제한 진료비를 떼였다. 언론보도로 자신이 다니던 치과의 폐업 사실을 안 A씨는 허겁지겁 강남구보건소로 가 진료기록 사본을 받았지만, 진료기록엔 담당의사가 아닌 ‘상담실장’ 이름이 쓰여 있었다.  

    8월부터 220만 원을 내고 치아교정을 시작한 회사원 B(30)씨에게도 치과 폐업은 충격이었다. B씨는 “지금 생각해보니 병원 행태가 수상했다”며 한숨을 쉬었다.

    “12월 3일 치과에서 연락이 와 2017년 1월 진료예약을 잡았기 때문에 곧바로 폐업할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폐업 일주일 전부터 통화가 되지 않았고, 11월 신용카드 청구서에는 치과가 아닌 패션업체 이름이 쓰여 있더라고요. 9월부터는 담당의사와 직원이 자주 바뀌는 등 진료가 불안정했어요.”





    전담 기구 없어, 해결책은 민사소송뿐

    수천 명의 피해자를 낳은 G치과는 1년 전부터 ‘파격 할인’ 등을 내세워 전국에서 환자를 유치했고, 이들 중에는 러시아, 남미 등에서 온 외국인도 다수 있다. 12월 20일 G치과를 찾아가 보니 급하게 정리한 흔적이 역력했다. 건물 6층 접수대 위에는 일회용 종이컵과 쓰레기가 그대로 놓여 있고 복도 한쪽에는 환자 이름이 쓰인 치아 모형 수십 개가 버려져 있었다. 또 다른 진료실이 있는 8층 입구는 쇠사슬로 굳게 잠겨 있었다. 이 치과의 대표원장 S씨, 상담실장  P씨는 폐업 직후 종적을 감췄으며, 인터넷 홈페이지의 의료진 소개에는 의사 이름 없이 성(姓)만 표기돼 있었다.

    병·의원이 환자들로부터 진료비를 받고 돌연 폐업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2014년에는 서울의 한 한의원이 미용성형을 미끼로 폐업 직전까지 진료비를 받았고, 2015년에도 서울의 한 성형외과가 의료사고 후 돌연 폐업한 뒤 원장이 잠적했다. 환자를 울리는 ‘먹튀 병원’은 왜 자꾸 생기는 걸까. 그 원인은 이러한 의료사기를 사전에 방지하지 못하는 법제도에 있다.

    먼저 병·의원 폐업 절차가 매우 간단하다. 관할 보건소와 세무서에 폐업 신고만 하면 된다. 폐업 신고 후 관할 보건소에 환자의 진료기록을 전달하면 별다른 심사 없이 당일 폐업이 가능하다. G치과도 12월 12일 환자에게 ‘진료에 차질을 빚어 죄송하다’는 애매한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낸 후 당일 폐업했다. 정현석 법무법인 다우 변호사는 “의료법은 병·의원이 폐업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돼 있다. 환자에게 폐업을 미리 고지할 의무가 없고 폐업 절차도 간단하다. 따라서 ‘먹튀’ 사기가 발생하는 의료기관은 폐업 직전까지도 멀쩡하게 영업한다”고 지적했다.



    수상하면 ‘사무장 병원’ 의심해야

    또한 G치과처럼 진료비를 선지급받은 후 끝까지 진료하지 않고 폐업해도 의료법상 처벌되지 않는다. 다만 폐업 직전까지도 진료비를 받은 후 의사가 잠적했다면 사기죄로 고소할 수 있다. 환자가 해당 병원장을 형사고소한 후 민사소송으로 손해배상을 받는 식이다. 이 경우에도 의사에게 가장 강한 처벌인 의사면허 정지나 취소까지 이어지긴 어렵다. 정현석 변호사는 “의사가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진료비를 허위청구하면 의사면허가 정지될 수 있다. 하지만 환자를 대상으로 한 진료비 허위청구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법망을 빠져나간 미용성형, 미용교정 병·의원이 고액의 진료비를 선지급받은 후 갑자기 폐업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먹튀 병원’ 피해자를 도와줄 공식기관이 없는 것도 문제다. G치과 같은 사례가 발생하면 피해 환자는 관할 보건소에서 진료기록 사본을 받아 결제 영수증과 함께 관할 경찰서에 개별 고소장을 제출하는 것 외 달리 손쓸 방법이 없다. 한국소비자원은 “‘먹튀 병원’ 관련 민원이 접수되고 있지만, 병원장이 잠적하면 우리 측에선 도울 방법이 없다. 신용카드로 할부 결제했다면 카드사에 연락해 남은 할부금을 취소하라는 조언밖에 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 관계자는 “우리 원은 의료사고로 신체적 피해가 발생한 사건만 접수하기에 ‘먹튀 병원’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이러한 의료사기에 대한 전체 통계나 조사 내용은 보건복지부를 비롯해 어느 기관도 갖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피해자는 개별적으로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한다. 하지만 병원 운영진을 상대로 한 민사소송에서 승리해도 충분한 손해배상이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 병원 운영진이 의료 적자를 메우는 데 진료비를 썼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부 병·의원의 비양심적 행태는 의료계 불황과 맞물려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15년 폐업한 의료기관은 총 3047곳으로 개업 대비 79.3%였다. 종별로는 한의원 800곳(26.2%), 치과의원 586곳(19.2%), 요양병원 132곳(4.3%)이었고 폐업 의료기관의 38%는 폐업 사유가 ‘경영상 이유’였다. 진료비 허위·부당청구 금액은 2014년 238억 원에서 2016년 11월 현재 428억 원으로 1.8배 늘었다.

    의료계에 따르면 ‘먹튀 병원’은 ‘사무장 병원’인 경우가 많다. 사무장 병원이란 비의료인이 의료인을 고용하고 병원 개설 및 운영을 주도하는 탈법적 의료기관이다. 진료기록서에 담당의사가 아닌 상담실장 이름이 기재된 G치과도 사무장 병원일까. ‘주간동아’는 대한치과의사협회(치협)에 해당 치과 대표원장의 이름과 의사면허번호로 조회를 문의했고, 치협 관계자는 “치협에 등록된 의사 이름과 면허번호가 맞다”면서도 “해당 의사의 행적을 살펴본 결과 비의료인에게 의사면허증을 빌려준 사무장 병원인 것으로 추정된다. 치협 윤리위원회에서 논의한 후 보건복지부에 해당 의사에 대한 징계를 요청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민사소송은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사무장 병원임을 파악하고 의료법에 따라 처벌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명확한 처분이다. 박설아 법무법인 태일 변호사는 “사무장 병원에 소속된 의사는 ‘의료기관 개설자가 될 수 없는 자에게 고용돼 의료행위를 한 것’이므로 의료법 제87조에 따라 1년 이하 자격정지 처분을 받거나, 자유형(징역)의 집행유예 이상을 선고받으면 면허가 취소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 변호사는 “다만 사무장 병원은 내부고발이 없으면 적발이 어렵다. 따라서 내부고발 포상제도를 보강하는 등 범죄 예방을 위한 조치가 좀 더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선결제 파격 할인’ 조심해야   

    보건복지부는 ‘먹튀 병원’과 관련해 무슨 대책을 강구하고 있을까. 먼저 환자가 입원했을 경우 폐업 전 환자의 전원을 조치하는 법이 2016년 12월 20일 신설돼 2017년 6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의료법 제40조 ‘폐업·휴업 등의 신고와 진료기록부의 이관’ 4항에 따르면 ‘의료기관 개설자는 의료업을 폐업, 휴업하는 경우 해당 의료기관에 입원 중인 환자를 다른 의료기관으로 옮길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한다’고 돼 있다. 5항은 ‘시장·군수·구청장은 의료기관 개설자가 4항에 따른 조치를 취했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폐업하기 전 일정 기간 환자에게 폐업을 고지하는 하위법령 신설도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환자에게 폐업 사실을 미리 알려 진료 피해를 막자는 것이다. 하지만 “‘진료비를 선지급받고 폐업하는 병원’에 대한 처벌은 의료법에 포함하기 애매하다”고 말했다. 다음은 보건복지부 관계자의 말이다.

    “진료비 결제는 환자와 의사 간 진료계약을 체결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결제대금을 분할 납부하거나 현금으로 결제하는 것을 포함해서다. 이것은 의료법보다는 민사적인 사안으로 봐야 한다. 따라서 의료법 하위법령으로 추가할 수 있을지는 금방 결정하기 어렵고, 논의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듯하다.”

    의료계 안팎에서는 보건복지부 조치가 ‘먹튀 병원’을 사전 예방하기에 불충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치협 관계자는 “치협에 의사면허 정지 등 징계권이 있으면 치과 의료사기 범죄를 좀 더 예방할 수 있을 텐데, 현재는 보건복지부에 의사 징계를 요청할 수 있는 권한만 갖고 있다”고 말했다. 정현석 변호사는 “의료사기 대응책이 체계적으로 마련돼 있지 않다. 개별적으로 대처하다 지쳐 포기하는 피해자가 대부분”이라고 지적했다. 박설아 변호사는 “사무장 병원이 ‘먹튀’를 한 경우 국민건강보험공단은 해당 병원이 허위 또는 부당하게 지급받은 보험급여에 대해 환수 처분을 내린다. 이는 보험적용을 많이 받는 병·의원에겐 치명적이지만, 보험 적용이 많지 않은 치과는 그 영향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아직까지는 ‘먹튀 사기’를 예방하려면 소비자가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박 변호사는 “미용 등 목적으로 장기간 진료받을 때 과도한 할인 이벤트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선결제나 현금결제를 조건으로 파격 할인가를 제시한다면 의심할 필요가 있다”며 소비자의 주의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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