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57

2006.10.24

‘부채꼴 논리’로 삶을 관조하라

  • 이도희 경기 송탄여고 국어교사·얼쑤 논술구술연구소장http://cafe.daum.net/hurrah2

    입력2006-10-23 11: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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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채꼴 논리’로 삶을 관조하라
    사람은 살아가면서 많은 선택의 문제에 부딪힌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선택의 폭이 갈수록 좁아짐을 느낀다.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좌절을 체험하며, 그중 일부는 비극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학생들은 인생의 이런 과정을 어떻게 수용해야 할까? 상식적으로만 보면 그런 결과가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삶의 가치를 물리적인 것으로만 규정하는 것의 방증은 아닐까? 다음 소설을 통해 생각해보자.

    구겨진 바바리코트 속에 시래기처럼 바랜 심장을 안고 은혜가 기다리는 하숙으로 돌아가고 있는 9월의 어느 저녁이 있다. 도어에 뒤통수를 부딪히면서 악마도 되지 못한 자기를 언제까지나 웃고 있는 그가 있다. 그의 삶의 터는 부채꼴 위에 있다. 넓은 데서 점점 안으로 오므라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은혜와 둘이 함께 있던 동굴이 그 부채꼴 위에 있다. 사람이 안고 뒹구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느니. 어디선가 그런 소리도 들렸다. 그는 지금. 부채의 사북자리(접었다 폈다 하는 부채의 아랫머리)에 서 있다. 삶의 광장은 좁아지다 못해 끝내 그의 두 발바닥이 차지하는 넓이가 되고 말았다. (…) 바다를 본다. 큰 새와 꼬마 새는 바다를 향하여 미끄러지듯 내려오고 있다. 바다. 그녀들이 마음껏 날아다니는 광장을 명준은 처음 알아본다. 부채꼴 사북까지 뒷걸음친 그는 지금 핑그르르 뒤로 돌아선다. 제정신이 든 눈에 비친 푸른 광장이 거기 있다.- 최인훈 소설 ‘광장’

    펼쳐진 부채에 비유된 ‘삶의 광장’은 점점 좁아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사북자리’는 ‘두 발바닥이 차지하는 넓이’로 표현될 만큼 주인공 이명준의 삶의 위기감이 고조된 공간이다. ‘사북자리’란 더는 물러설 수 없어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곳, 인식이나 사고의 전환을 의미하는 곳이다. 이명준이 바다를 진정한 광장으로 인식한 것은 자신이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공간에 서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발상이다. 이명준은 자유롭게 날고 있는 갈매기를 보면서 바다를 어떠한 사상과 억압에도 짓눌리지 않는 정신적인 광장으로 선택한다. 창의성 있는 사람은 시공간의 물리적인 한계에 다다르면 이를 정신적 가치로 극복한다. 논술에서는 이명준처럼 정신적 가치를 풍부한 상상력으로 구현해낼 때 창의력으로 평가받는다.

    일제 강점기에 어떤 독립운동가는 감옥생활에서 얻은 정신적 가치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사람이 감옥의 좁은 공간에서 고통을 물리적으로만 받아들이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창의적인 사람이 감옥에 들어가면 재빨리 그곳을 정신적으로 재구성한다고 한다. 이른바 감옥의 좁은 공간에서 세상의 삶의 구조를 압축하여 재구성한다는 것이다. 이럴 때 비로소 정신 속에서는 좁은 감옥이 넓은 세상이 되어 자유를 느낀다고 한다. 이것은 좁은 감옥을 지혜롭게 극복하는 방법으로,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계속 추구하는 원동력이 된다. 창의적 발상이 이렇게 자신의 정체성까지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이번엔 이육사의 시 ‘절정’을 보자. (1) ‘매운 계절(季節)의 채쭉에 갈겨/ 마츰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리발 칼날진 그 우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2)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는 사북자리를 접점으로 두 개의 부채를 붙인 모습으로 볼 수 있다. (1)은 물리적인 공간이 점점 좁아지는 형국으로, 마지막에는 선택의 폭이 없어진다. 하지만 시적 화자는 (2)에서 창의적 발상을 시도한다. 시적 화자는 견디기 어려운 극한 상황에서 오히려 그것을 넉넉한 관조의 정신으로 받아들이는 높은 차원의 해결법을 보여준다.



    만약 위의 이명준의 부채꼴을 반대로 하여 인간의 삶을 해석하면 어떨까? 즉 어린 시절, 젊은 시절을 부채의 사북자리로 생각하고 중년을 넓은 부채꼴에 배치한다. 어린 학생이 자신의 한 가지 소질을 발굴해 집중적으로 연마한다면 그 결과 중년에 선택의 폭은 더 넓어지지 않을까? 요즘 학부모들이 어린 자식들을 많게는 대여섯 개의 학원에 보내는 현실을 비판할 때 이 ‘부채꼴’ 논리를 사용하면 어떨까?

    우리는 역사를 통해 선인(先人)들의 수많은 선택을 접하게 된다. 시련을 정신적 가치로 극복하는 것은 선인들의 자유의지로 목표를 이루는 원동력이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제 학생들도 이런 ‘부채꼴’의 원리를 활용해 창의적인 사고를 도출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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