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54

2006.09.26

사형수 男과 자살 미수女 상처 보듬고 애정 싹트고

송해성 감독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 입력2006-09-21 16: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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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형수 男과 자살 미수女 상처 보듬고 애정 싹트고
    나는 사형제도에 반대한다. 사형제도는 인간이 변화하지 않는다는 사실, 한번 죄를 지으면 그 죄값도, 그 인간의 영혼도 절대 변화하지 않으리라는 가정에 기초한 형법제도다.

    그러나 평론가이기에 앞서 임상심리학자로서 나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것을 보았다. 단단한 사람이 무너지고, 약한 사람이 승리하고, 차가운 사람이 따뜻하게 되는 것을 보아왔다. 물고기가 사람이 되는 것은 마술이지만, 사람이 변화하는 것은 기적이었다.

    어쩌면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유일한 문제는 바로 위와 같은 논리에 대적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닐까? 위와 같은 의제, 누가 봐도 반박하기 힘든 휴머니즘을 등에 업은 시대적 의제에 정면 도전을 하지 못한다는 것 말이다. 즉, 이야기를 얹는 방식이나 캐릭터 모두 올바르고 정직하고 정공법인데, 정작 도발과 의문이라는 예술의 본질은 빠져 있다는 것.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누가 봐도 착한 사람들의 착한 영화다.

    세 명의 여자를 죽이고 사형수가 된 남자가 있다. 그리고 세 번의 목숨을 버리고 자살미수자가 된 여자가 있다. 여자는 대학 교수이고 집안도 좋고 얼굴도 아름답다. 남자는 길거리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했고, 진흙탕 같은 삶을 살아왔다. 그 두 사람이 일주일에 3시간, 목요일 10시부터 1시까지 마주 앉아 행복한 시간을 갖는다. 기실 ‘이따만한 해 때문에 자살을 시도했다’는 여자나, ‘아침이 가장 두려웠다’는 남자는 모두 죽음 한가운데에 끼어든 빛을, 삶을, 두려워한다. 마치 여름 태양이 너무 눈부셔 사람을 죽였다고 주장한 카뮈의 뫼르소처럼.

    사형수 男과 자살 미수女 상처 보듬고 애정 싹트고
    공지영 작가의 이 단단한 신파에 송해성 감독은 두말없이 멜로의 손을 들어준다. 강동원과 이나영 두 배우의 얼굴 클로즈업 샷이나 액션, 리액션 샷이 반복되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초반은 극히 평범한 할리우드 영화처럼 정석대로 간다. 용서와 소통이라는 천국의 계단을 향한 발걸음은 한국판 ‘데드 맨 워킹’의 행보를 충실히 따른다.



    건강염려증이 있는 유정의 어머니는 가죽장갑 위에 반지를 끼고 다닐 정도로 자신의 육체를 아낀다. 그러나 딸의 상처는 외면한 적이 있다. 윤수는 유정보다 더 일찍이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동생과 걸식으로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눈먼 동생은 가수 출신인 유정이 부르던 애국가를 참으로 좋아했고, 두 사람은 서로의 피부 안쪽에서 그런 기억들이 스며들어 피 흘리는 모습과 소통의 열망을 보게 된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지점이라면 ‘강동원의 발견’을 첫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너무나 꽃미남이라서, 이런 남자를 사형시켜야 한다는 것 자체가 여성 관객들에게 안타깝게 느껴지는 이 배우는, 이 작품으로 ‘배우 강동원’으로서 첫발자국을 내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원작에 없는 사투리 연기는 외면상 유정과 윤수가 매우 다른 세계에 놓여져 있다는 것을 한눈에 이해시키는 그럴듯한 구석이 있다.

    사형제도에 대한 문제의식 폭넓게 다뤄

    사형수 男과 자살 미수女 상처 보듬고 애정 싹트고
    이나영의 경우는 늘 이나영은 이나영인, 그러니까 예의 그 연기하지 않는 것 같은 연기를 하는 특유의 자의식을 그대로 드러낸다. 연기의 앙상블이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각 배우들이 최선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지점에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온다. 과연 사형이란 죽음의 스펙터클과 어떻게 정면 승부할 것인가. 원작에서 사형 장면의 묘사는 통째로 빠져버렸다.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시점 자체가 유정이란 1인칭 화자의 것이어서 이 점은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다르다. 감방에 대한 묘사가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마당에 안 보여주는 것이 보여주는 것보다 더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 이르러서 송 감독은 실력을 한껏 발휘한다. 전작 ‘파이란’처럼 쓸쓸하고 낮은 멜로의 기운을 스크린과 관객들에게 한껏 불어넣는다. 사형 장면을 보고 나서야 송 감독이 이 초베스트셀러를 차기작으로 택한 이유가 이해된다. ‘파이란’을 거쳐 ‘역도산’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까지 그의 모든 남자 주인공들은 쓸쓸히 죽어가는 똑같은 행로를 거쳐왔다. 송 감독의 세상에서 사랑이란 결코 육체적인 것이 아니다. 중국 여자 파이란과 한국 남자 강재가 지리적 거리로 떨어져서 서로 만날 수 없었다면, 유정과 윤수는 ‘넥타이 공장’이란 사형제도와 감옥이란 쇠창살에 막혀 서로의 눈물을 닦아줄 수 없다. ‘역도산’에서는 억제된 육체적 갈망과 사랑이란 순백의 팬터지가 ‘일본 속의 한국인’이란 사회적 대의에 눌려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대로 걸렸다. 원작이 있는 작품에 유독 강한 송 감독의 면모가 사형 장면에서 드디어 감정선을 폭발시킨다. “네가 좀 울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던 유정이 물론 어느 결엔가 하염없이 운다.

    남자 주인공 사형 장면에선 관객 눈물샘 자극

    그리하여 당신도 울게 될 것이다. 계절은 가을이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영화는 너무 착하고, 너무 올바르다. 강동원은 죽기 아까울 만큼 잘생겼으며, 이나영은 그런 그를 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은 죽어가는 남자 주인공을 어떤 방식으로든 구출할 수 없었던 운명선이라는 점에서 ‘파이란’과 지독할 만큼 닮아 있다. 또한 이 지점에 이르면 갑자기 평범한 듯 보이던 송 감독의 연출도 교도소의 응달에서 모질게 자라나는 들풀 한 송이까지 잡아낼 정도로 정교해지는 괴력을 발휘한다.

    ‘파이란’과 ‘역도산’으로 1승 1패의 전적을 쌓았던 송 감독에게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다시 승수를 쌓게 하는 영화라 볼 수 있다. 물론 ‘파이란’의 서정성과 사회적 통찰력을 다시 기대하기란 어렵겠지만, 좋은 원작과 좋은 캐릭터가 있으면 송 감독은 언제든 섬세한 멜로영화를 만들 수 있는 감독이라는 것은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거기까지면 된 것일까? 개인적으로 우리 사회에 상존하는 계급의 문제를 이런 식의 휴머니즘으로 봉합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이러한 팬터지가 더 위험하다고 본다. 또한 감독은 보도자료에서 언제나 ‘인간’과 ‘소통’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고백하지만, 솔직히 그걸 ‘역도산’처럼 3년간의 제작기간과 110억원의 제작비를 들여서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세상에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의도는 정서적 카타르시스와 사형제도 폐지에 관한 진정한 설득이다. 전자든 후자든 세상에 이롭게 쓰이기를. ‘우리 사회의 진정 행복한 시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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