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40

2006.06.20

‘살인의 추억’ 그 후 3년 칸에서 ‘봉’ 잡았다

  • 입력2006-06-14 17: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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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의 추억’ 그 후 3년  칸에서 ‘봉’ 잡았다
    그를 처음 봤을 때 ‘내 마음의 옥탑방’으로 이상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박상우가 생각났다. 체격이나 생김새도 흡사했지만 특히 안경 너머에서 바라보는 눈빛이 무척 닮았다.

    봉씨라니! 내가 아는 봉씨 성을 가진 이는 이 세상에 봉준호 감독 한 사람뿐이다. 독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 관객 500만 명을 돌파했을 때, 우리는 그 영화가 80년대 말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한 한국인의 원형질적 정서와 집단무의식의 상처를 교묘하게 건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동안 영화 팬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봉 감독이 다시 나타났다. 올해 5월의 칸영화제는 봉준호의 ‘괴물’이 첫선을 보인 곳이었다.

    올해 칸에서 한국영화계는 조용했다. 지난해에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심사위원 대상을 받는 떠들썩함이 있었고, 홍상수 감독의 ‘극장전’이 프랑스 지식인 관객층의 취향에 어필하는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올해 칸 경쟁부문에 출품된 한국영화는 한 편도 없었다. 당초 영화제를 겨냥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알려진 ‘괴물’이 칸 경쟁부문 명단에서 제외되자 충무로에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100억원에 가까운 거액의 제작비를 투자한 ‘괴물’이 형편없는 작품으로 완성됐다는 소문이었다.



    그런데 경쟁부문 발표 뒤, 비경쟁 부문 목록에 ‘괴물’이 올랐다. 그러자 사람들은 ‘비경쟁 부문에 올라갈 수준밖에 안 되는구나’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칸에서 날아온 소식은 달랐다. 막상 감독 주간 시사회에서 ‘괴물’의 뚜껑이 열리자 경쟁부문 작품보다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받았다. ‘괴물’은 칸 마켓에서만 700만 달러에 판매됐다. 한국영화 사상 최고의 금액이다.

    “‘괴물’ 속에 표현된 한국적 정서와 영화적 느낌이 서구 사회에서도 통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쁘다.”

    칸 마켓에서 700만 달러에 판매 … 시사회선 기립박수

    ‘괴물’은 한강 둔치에서 매점을 운영하며 살고 있는 한 가족이 어느 날 정체불명의 괴물을 만나면서 사투를 벌이게 되고, 잊었던 가족애를 찾아간다는 내용이다. 칸에서 시사회가 끝나자 열광적인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봉준호 감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왼주먹을 불끈 쥐어 높이 들어 보이며 답례했다. 그의 표정은 무척 밝았다.

    봉준호 감독은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단편 ‘백색인’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영화를 공부했다. 대학 재학 시절 학교 신문에 카툰을 그리는 등 재주가 많았던 그는 한국영화아카데미 11기로 졸업하면서 단편 ‘지리멸렬’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자 천재 감독이 출현했다는 소문이 충무로에 돌았다.

    싸이더스의 전신인 우노필름에서 그는, 왕자웨이(王家衛) 감독의 촬영감독인 크리스토퍼 도일이 내한해서 촬영한 ‘모텔 선인장’과 최민수·정우성이 주연한 ‘유령’의 시나리오 및 연출부를 거친 뒤, 비로소 장편영화에 데뷔했다. 그러나 봉 감독의 장편 데뷔작은 흥행에 실패했다. 이성재·배두나 주연의 ‘플란다스의 개’(2000년)는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 어떤 감독의 영화에서도 만날 수 없는 독특한 감성이 살아 있었다.

    ‘살인의 추억’ 그 후 3년  칸에서 ‘봉’ 잡았다

    ‘괴물’

    ‘살인의 추억’은 2003년 최고의 영화였다. 거의 모든 영화제에서 그는 감독상을 휩쓸었다. 바로 그 직전 개봉된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는 ‘살인의 추억’보다 더 많은 제작비를 썼지만 흥행에 참담하게 실패했다. 제작사인 싸이더스가 위태롭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살인의 추억’이 전국 500만 명을 돌파해 흥행에 성공함으로써 제작사도 기사회생했다. ‘살인의 추억’은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평단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하면서, 보이지 않는 범인과 대치하고 있는 두 명의 형사들 뒤에 전 국민을 세워놓은 이 영화의 힘은 사건을 끌고 가는 감독의 집요한 힘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괴물’에는 봉 감독 특유의 유머가 담겨 있다. 봉 감독은 현실에서도 독특한 화법을 구사하는데, 그의 말투와 독특한 유머가 극한 상황에서도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낸다. 괴물이 출현하고 사람이 죽어서 영안실로 향하는데, 영안실에서는 주차 문제 때문에 시비가 붙는다. 이런 상황의 언밸런스가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도 웃음을 안겨준다.

    봉 감독은 사춘기 시절부터 이미 이 영화를 구상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그는 잠실대교 교각을 오르는 낯선 괴물의 환영을 봤다고 한다. 잠실 장미아파트 13층에 살고 있던 그는 틈날 때마다 창밖의 한강을 보곤 했는데, 어느 날 잠실대교 교각을 올라가는 괴생물체를 목격했다는 것이다.

    ‘괴물’은 도시 재난영화이자 인간에 대한 드라마

    “그때부터 그 생생한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지금도 나는 괴물의 존재를 믿는다. 영화를 만들면서는 괴생물체의 존재를 어떻게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등장인물의 캐릭터와 드라마 속에서 조화롭게 위치시킬지에 가장 신경 썼다.”

    에이리언 같은 괴물이 실재로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봉준호 한 사람에게만 보인 것인가. 누구도 이를 확인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입시의 압박이 너무 심해서 잠시 헛것을 본 것이라고 하지만, 봉 감독은 그 체험이 너무나 생생해서 나중에 영화감독이 되면 반드시 영화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괴물이 등장한다고 해서 심형래 감독의 ‘용가리’나 일본 영화 ‘고질라’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괴물’은 괴수 영화가 아니다. 도시 재난영화이면서 인간에 대한 드라마가 살아 있는 영화다. 한강 둔치 매점을 운영하는 아버지 역에 변희봉,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무능한 장남 역에 송강호, 그리고 배두나·박해일 등 우리 시대 최고의 연기파 배우들이 등장하는 ‘괴물’은 무엇보다 한국 관객들이 좋아하는 긴장감 속의 유머가 있기 때문에 흥행을 낙관한다. 입소문도 아주 좋다.

    봉준호 감독은 ‘괴물’이 ‘순수 오락의 결정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항상 한국 사회의 집단적 광기를 미묘하게 잡아내는 봉 감독은 이번에도 역시 믿을 수 없는 실체와 그것이 일으키는 파장을 통해 현재의 한국 사회를 이야기하고 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연기를 해야 하니까 배우들이 굉장히 두려워하고 당혹스러워했다.그래서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서 스토리보드와 여러 가지 비주얼을 배우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나중에는 배우들이 허공을 향해 연기를 해도 어떤 존재감을 느낄 수 있게 했다. 오히려 배우들의 리얼한 연기가 컴퓨터그래픽에 도움을 준 것 같다. 그 부분에 있어서 배우들에게 감사한다.”

    ‘짝패’의 제작자이기도 한 류승완 감독의 부인도 연상이지만, 봉준호 감독의 부인도 네 살 연상이다. 그의 부인은 곧 시나리오 작가로 데뷔할 예정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11살짜리 아들이 있다. 봉 감독의 영화에서는 아이들이 독특한 역할을 한다. ‘살인의 추억’에도 영화의 시작과 끝에 이상한 존재감으로 등장하는 아이들이 있지만, ‘괴물’에서도 아이들이 큰 역할을 한다. 다음 작품으로 봉 감독은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를 다룬 이야기와 프랑스 만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 등을 보여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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