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39

2006.06.13

미국에서 버림받고 한국에서 홀대받고

범죄 연루 추방된 재미동포들, 설움의 고국살이 ... 취업 어렵고 친인척도 외면 ‘이방인 신세’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6-06-07 14: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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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서 버림받고 한국에서 홀대받고

    서울 성북구의 한 쉼터에서 생활하는 추방자 C 씨가 면도를 하고 있다.

    “요즘엔 외국인과 이민자를 범죄인 다루듯 해요. 한국으로 추방되는 한인도 늘고 있고요. 불법체류자뿐 아니라 영주권자도 마구잡이로 쫓겨나고 있습니다.”

    미국의 한인단체인 뉴욕청년학교 문유성(38) 사무국장은 “미국이 못되게 변해가고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인종의 멜팅팟(Melting Pot)이라고 불리던 미국이 배타적인 나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각 주(州)마다 이민법을 강화하고 있고 비(非)백인에 대한 차별도 심해졌는데, “미국 주류 사회의 이민자 박대가 거세진 것은 9·11테러 이후 나타난 현상”이라는 게 문 국장의 진단이다.

    9·11테러 후 가벼운 범죄에도 가차없이 추방

    “너희 나라로 되돌아가라!”

    반(反)이민법 시위가 조금씩 사그라지던 4월 말, 재미동포 S(36) 씨는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라”는 날벼락 같은 소리를 들었다. 폭력사건에 연루돼 교도소에서 생활해온 그는 ‘관용’을 기대했다. 싸움을 말리다가 본의 아니게 죄를 저지른 만큼 추방까지 당하리라곤 생각지도 않았다.



    “일곱 살 때 미국으로 건너와 30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의 실수로 추방이라니요. 변호사 비용으로 3만 달러를 썼는데, 다 부질없는 짓이었어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길 줄 알았다면 진작에 시민권을 따놨어야 하는데…. 나처럼 1970~80년대에 이민 온 사람들은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절차가 번거롭기도 하고 시민권자가 된다고 해서 특별한 혜택이 있는 것도 아니었거든요.”

    S 씨는 대학에서 무역을 전공한 뒤, 샌프란시스코의 빌딩관리업체에서 일했다. 30년간 미국에서 살았으며,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고, 미국 정부에 세금을 낸 사실상의 ‘미국 시민’인 그가 추방된 이유는 간단하다. 범죄를 저지른 비(非)시민권자, 즉 ‘불온한 외국 국적의 영주권자’라는 것이다. “모국은 한국이었으되 뼈를 묻을 곳은 미국이었다”는 그는 하루 세 끼를 모두 시리얼로 해결하면서 한 달째 한국에서 고단한 날을 보내고 있다.

    영주권을 가진 이민자들에 대한 강경한 추방 조치가 미국 사회에 휘몰아치고 있다. S 씨처럼 삶의 궤적이 송두리째 바뀐 이들이 즐비한 것. 70~80년대에도 범죄를 저지른 영주권자에 대한 추방은 있었으나 무거운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세계의 인종을 하나로 녹여내던 ‘멜팅팟’이 썩은 싹을 골라버리는 ‘샐러드 보울(Salad Bowl)’로 변한 셈이다.

    9·11테러 이후 이민국을 흡수 통합한 미 국토안보국은 영주권자 추방과 관련해 불관용(Zero Tolerance) 정책을 강조하고 있다. 미국이 실형 1년 이상의 범죄를 저지른 영주권자를 추방하기 시작한 것은 1996년에 이민법을 개정하면서부터다. 그러나 이 법은 반(反)이민법이라는 비판이 거세 9·11테러 이전까지는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았다. 문 국장은 “언제부턴가 미국 주류사회가 시민권을 갖지 못한 외국인을 감시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했다”면서 안타까워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추방된 영주권자는 2001년 116명에서 2004년 316명으로 급증했다(인천공항에 신고된 강제 퇴거자 기준). 그러나 이 통계에 추방당한 이들이 모두 포함된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한국계 영주권자의 추방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일반 여행자들과 같은 입국 절차를 거쳐 들어오는 경우엔 집계가 불가능하다. 재미 한인사회는 지난해에만 적어도 1000명 이상이 한국으로 추방된 것으로 보고 있다.

    “시민권자인 자식을 두고 한국으로 추방되거나, 영주권자인 자녀를 한국으로 떠나보낸 이산가족이 적지 않습니다.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안타까운 일이죠.”(미국 시민권자인 디딤돌선교회 전은찬 목사)

    뉴저지에 사는 미국 시민권자 K(16) 군은 ‘고아 아닌 고아’로 살고 있다. 지난해 아버지가 한국으로 추방되면서 생이별을 한 것. 어머니는 수년 전 아버지와 이혼한 뒤 연락이 두절됐다고 한다. K 군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아버지가 몹시 보고 싶다. 나는 아버지가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며 울먹였다.

    가족들과 생이별 ‘바다 건너 이산가족’

    앞서의 S 씨도 “미국에 두고 온 아이들이 보고 싶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K 군은 아들로서, S 씨는 아버지로서 생이별의 아픔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은 아직도 내가 추방당한 걸 모릅니다. 전화를 하긴 해야 하는데….”

    S 씨의 소망은 하루빨리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는 5년 후엔 다시 아이들과 함께 살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한국으로 추방당할 때 이민국에서 2011년엔 “영주권을 다시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S 씨의 바람은 그저 바람일 뿐이다. “영주권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은 정확하게는 “심사를 받을 수는 있다”는 뜻이다. 한 번 추방당한 외국인이 다시 미국에 들어가는 것은 말 그대로 ‘하늘의 별 따기’다. 보통은 관광비자조차 나오지 않는다.

    S 씨는 세계십자가선교회(강원 횡성군 서원면)에서 생활하고 있다. 알음알음으로 마약 및 알코올 의존자들이 치유 및 회복 프로그램 과정을 밟고 있는 이 선교회를 소개받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일산이라고 들어보셨어요? 그쪽에 연고가 있긴 한데….”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는 한국에서의 삶을 두려워했다. 자란 땅으로부터 버림받은 S 씨 같은 추방자의 삶은 고단하다. 이들은 한국에 친인척이 있더라도 환영받지 못한다. ‘범죄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두메산골에서 어떻게 구했는지 먹다 남긴 햄버거 하나가 눈에 띈다. 시리얼만 먹는 게 안쓰러웠는지 누가 선물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그의 삶은 먹다 남은 햄버거만큼이나 뒤죽박죽이었다.

    ‘내일도 새로울 게 없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중년 추방자의 하루는 난감하다. 2000년 미국에서 추방된 C(53) 씨는 미국의 가족을 잊은 지 오래다.

    “한국에 돌아오니 공항에서 짐짝 취급을 하더라고요. 30년 만에 돌아온 한국에 피붙이도,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서울 성북구 정릉동의 한 쉼터에서 지내는 C 씨는 LA에서 잘나가는 ‘건달’이었다. 미국에서 발행되는 한국계 언론에 통면 기사가 실릴 만큼 ‘유명인사’였던 그도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미국식 생활이 몸에 밴 데다 괄괄한 성격 탓에 직장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취재진이 카메라를 꺼내들자 그의 눈가에 덩그렇게 눈물이 맺혔다. 취재 대상이 된 자신의 처지가 측은하게 느껴진 데다, 한국에서의 고단했던 5년이 주마등처럼 스쳤기 때문이다.

    “수십 년 전에 떠난 나라에 혼자 들어와서 무슨 재주로 적응을 해. 미국에 있는 딸과도 연락이 끊긴 지 오래고. 그래도 한때는 잘나가던 사람인데, 추방자 ‘대표’로 인터뷰이가 됐으니 어처구니가 없구려.”

    C 씨와 한방을 쓰는 추방자 P(46) 씨는 빌딩 유리창을 닦다가 추락해 병원에 입원해 있다. C 씨는 “친구이자 말벗이던 룸메이트가 병원에 있어 적적하다”고 했다.

    2004년 12월 미국에서 추방된 P 씨는 막노동을 하면서 지내다 사고를 당했다. 의료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아 걱정했으나, 다행히 국립의료원에서 노숙자 자격으로 무료 치료를 받고 있다.

    추방된 남성의 대부분은 P 씨처럼 막일을 하는데, 고정된 수입이 없다 보니 범죄 유혹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특히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20, 30대 추방자가 그렇다고 한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는 주민등록증을 발급해주는 게 전부일 만큼 추방자들에 대해 무관심하다. 한 추방자는 “곤궁에 처한 국민에게 적응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 아니냐”고 되물었다.

    정상적인 직장을 찾기 어렵다 보니 영어강사로 학원에 취업하는 게 추방자들의 유일한 희망이다. 젊은 추방자들이 가장 많이 종사하는 직종이 학원강사이기도 하다.

    2003년 추방된 J(27) 씨는 경기 의왕시의 한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친다. J 씨는 생후 3개월 때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한국에 돌아오기 전까지는 우리말을 한 마디도 못했다고 한다.

    “한국말부터 죽어라 배웠어요. 한국 피가 흘러서 그런지 금세 익힐 수 있었지요. 한국이 미국보다 좋은 점은 ‘가짜’가 많다는 거더군요. 가짜 미국대학 졸업장을 사서 학원에 취직했죠. 운이 아주 좋았어요. 부모가 한국인임에도 자신이 한국계라는 사실을 모르고 살다가 추방된 사람들도 있어요. 흑인 혼혈이나 백인 혼혈은 대다수가 그렇고요. 이런 사람들이 한국에서 뭘 할 수 있겠어요. 한국에서도 마약에 손대고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거죠. 추방된 사람들이 구성한 갱(Gang)도 있는데, 못 들어보셨어요?”

    한국으로 추방된 미국 영주권자들은 ‘모두’ 범죄자다. 마약사범이나 강간사범 등 중범죄자도 적지 않다. 한국 사회가 이들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홀대하는 이유다.

    추방 대상이 되는 범죄의 종류는 광범위하다. 상습적 음주운전, 배우자 학대(Spouse Abuse, 추방당한 남성들은 대개 부부싸움이었다고 주장한다) 등으로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된 이들이 특히 많다.

    경기 남양주시 마석에 사는 G(45·여) 씨는 일본계 미국인인 남편의 술수에 넘어가 추방당한 경우다. 남편이 G 씨가 영주권자라는 사실을 악용해 한국으로 추방되도록 일을 꾸몄다는 것이다. 남편이 “아내가 문제가 많다. 이혼해야겠다”면서 법원으로부터 접근금지 명령을 받아냈고, G 씨가 이를 어기면서 실형을 받게 된 것.

    한국 생활 못 견디고 美로 밀입국하기도

    미국에서 마약에 손댔다가 3월에 추방당한 K(29·여) 씨는 6월 초 전은찬 목사와 함께 병원을 찾았다. 상반신에 새긴 문신 가운데 남의 눈에 쉽게 띄는 팔의 문신을 지우기 위해서다. 팔을 휘감은 문신이 사라지면 ‘추방자’ ‘범죄자’라는 낙인도 지워질까.

    낙인을 견디지 못하거나 적응에 실패한 일부 추방자들은 최후의 방법으로 밀입국을 선택한다. 무비자로 여행할 수 있는 캐나다에서 미국으로의 월경을 시도하는 것. 밀입국에 성공해 뉴저지에 거주하는 K(33) 씨는 “추방자에게 한국은 죽음보다 더한 공포의 땅이었다”고 말했다. 9·11테러 이후의 미국만큼이나 한국도 배타적인 사회라는 주장이다.

    “예전에 영주권자였다면 지금은 불법체류자죠. 그래도 미국이 훨씬 편합니다. 한국에서의 1년은 정말 끔찍했거든요.”

    미국에서 버림받고, 한국에서 홀대받는 추방자들은 미국의 불관용 정책이 바뀌지 않는 한 그 수가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전 목사는 “추방자들이 지금 같은 추세로 증가하면 사회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며 “비록 범죄자일지라도 정부가 지금처럼 외면해서는 안 된다. 하루빨리 한국 적응을 도와주는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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