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30

2006.04.11

“100번째 영화가 나의 첫 멜로”

‘천년학’ 찍는 임권택 감독 “이제야 슬슬 사랑 얘기 꺼낼 나이 됐지요”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6-04-05 15: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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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번째 영화가 나의 첫 멜로”

    전남 광양 ‘천년학’ 촬영현장에서 만난 임권택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오른쪽).

    매화가 바람에 날린다. 지천으로 핀 매화와 바람에 날리는 흰 꽃잎이 햇빛과 섬진강 물빛을 한꺼번에 반사해 눈도 제대로 뜨기 어려운데 이순(耳順)의 노(老) 감독은 매화나무 사이로 난 좁은 길을 잘도 찾아 들어간다. 말할 때 그는 더없이 느리건만, 발걸음은 어찌나 잰지 매화나무 사이에서 몇 번이고 그를 놓쳐버린다. 저렇게 매화나무 꽃잎 사이로 아주 사라지진 않을까, 영화 ‘취화선’(2002년)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여기가 ‘만다라’ 찍을 때 왔다갔다하던 곳이오. 경사가 심하고 아주 척박한 땅이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매화나무가 가득하다고.”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의 첫 촬영이 전남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의 청매실농원에서 진행 중이다. 거친 땅에 매화나무 수천 그루를 심어 남도의 관광지로 바꾼 ‘매실 명인’ 홍쌍리 여사가 운영하는 농원 안에 세트가 지어졌다.

    3월11일 전남 장흥에 세워진 주막 세트장에서 제작발표회 겸 첫 촬영이 있었지만, 그날은 기자단과 홍보용 사진을 위한 ‘연출’ 촬영이었으니 청매실농원 촬영(3월27일)이 진짜 첫 번째 로케이션인 셈이다. 정일성 촬영감독에 따르면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될 것”이라고 했다. 봄날, 눈부시게 지는 매화 꽃잎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영화사에서 일기예보에 맞춰 잡은 바로 그날이었다.

    “영화 배경이 좋지 않으면 연기자가 훌륭해도 불만인데, 일기가 좋아 아주 만족스러워요.”



    “100번째 영화가 나의 첫 멜로”

    ‘천년학’의 첫 로케 현장인 광양 청매실농원 세트

    ‘천년학’은 ‘서편제’(1993년)의 속편이면서도 별개인 영화다. 소리에 미친 아버지 유봉에 반발해 집을 나간 동호가 이복누이 송화를 애타게 찾아다니는 과정과, 유봉의 욕심 때문에 눈이 먼 송화가 겪는 인생의 굴곡이 겹쳐질 듯 병행해서 그려진다. 송화는 ‘서편제’의 오정해가, 동호는 배우 조재현이 연기한다.

    광양에 지어진 초가 세트는 송화가 이 지방 부호인 백사 노인의 후사로 들어가 모처럼 호사를 누리며 소리를 닦는 거처로 나온다. 백사 노인은 송화의 예술적 후원자이기도 하다.

    ‘서편제’ 속편이면서도 별개인 영화

    ‘천년학’의 원작 소설 ‘선학동 나그네’ 역시 영화 ‘서편제’의 원작이 된 소설 ‘서편제’와 ‘소리의 빛’을 쓴 이청준 씨 작품이다. 이청준 씨는 ‘천년학’의 시나리오 작업도 맡았다. 현장에서 수시로 임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는 그는 “계속 수정이 되기 때문에 영화가 끝나야 시나리오도 끝난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테면 ‘서편제’와 싸우는 것이다. ‘서편제’와 연속성이 있지만, 전혀 다른 작품으로 태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임 감독은 “‘천년학’은 늘 내 안에서 돌아다니던 것이고 수시로 고개를 내밀던 것”이라고 말했다.

    “100번째 영화가 나의 첫 멜로”

    ‘서편제’ 3부작을 쓴 소설가 이청준 씨(오른쪽)와 임권택 감독

    “원래 ‘서편제’를 찍을 때 ‘선학동 나그네’까지 포함할 생각이었소. 이 소설이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도 있었던 것이거든. 원작이 너무 몽환적이고 신비로운데, 당시 영상으로 드러낼 엄두가 나지 않아. 그래서 ‘서편제’와 ‘소리의 빛’까지 끊어 찍고 이건 한 10년 포기했었지요. 그런데 그놈의 것, 100번째 영화. 난 숫자에 상관없이 편하게 하자 하는데, 외국에서도 궁금해하고 사람들이 볼 때마다 물어보니 ‘그냥은 못 넘기겠구나’ 싶어 어려운 대로 다시 한번 매달려보기로 했지요.”

    그의 예상보다 어려움은 훨씬 컸다. 스타 캐스팅이 되지 않자 투자가 이뤄지지 않았고, 그가 오랫동안 몸담았던 태흥영화사가 제작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임 감독은 “그동안 태흥에서 ‘이거 합시다’ 하면 ‘어, 그럽시다’ 하면서 살았다. 영화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고 살았던 거다. 결국 ‘전화위복’이 됐다”고 했다.

    “100번째 영화가 나의 첫 멜로”

    3월11일 오정해, 신지수, 조재현이 ‘천년학’ 제작발표회 겸 성공 기원 고사에 참석했다(왼쪽부터). 신지수는 오정해의 수양딸로 나온다.

    세상은 변했지만, 노 감독에게 한국 영화의 ‘미래’를 기대하는 제작자도 나타났다. 영화 기자를 하다 제작자로 변신한 키노투 영화사의 김종원 대표가 바로 그 사람. 김 대표가 나서 센추리온 등 투자회사에서 38억원의 순제작비 펀딩을 이끌어냈다. 요즘 상업영화 제작비 평균보다 약 10억원이 적다.

    “내가 50년대부터 영화를 했는데, 그땐 아주 거지같이 영화를 찍었지. 지금은 스태프도 배가 됐고, 필름도 3~4배를 더 써서 찍는다고. 모든 물자가 풍요로워진 거지.”

    그 시절에 대한 향수가 왜 없을까만, 그는 막연한 그리움을 드러내지 않는다.

    “내가 나이가 있어선지 다들 잘 움직여줘. 다른 덴 감독의 지휘권이 많이 준 것 같더군. 우리 팀은 이거 돈 안 돼도 달라붙자, 이런 게 있어요. 해볼 만하다, 이거지.”

    임 감독의 98번째 영화 ‘취화선’은 그 자신의 이야기이고, 자신의 예술적 신념에 대한 마지막 고백 같은 것이었다. ‘취화선’ 에서 오원 장승업이 이런 말을 한다. “항상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밤잠을 설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예술이란 우리 삶을 드러내는 거요. 그 과정의 장애, 걸림돌과의 싸움, 열악한 삶을 개선하려는 의지, 되든 안 되든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지. 근데 삶을 바라보는 시각은 여러 가지니 어느 한 자리에 머물러선 안 되는 거지. 거듭나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어느 정도 이뤘을 때 느끼는 그 희열이란….”

    “내가 전에 멜로 하겠다면 주위에서 말렸어요”

    그는 무슨 이야기로 다시 영화를 시작할까. 99번째 영화 ‘하류인생’에서 임 감독은 좌익으로 몰린 아버지의 연좌제에 걸려 ‘꿈이고 뭐고 없었던’ 자신의 젊은 시절로 돌아갔다. 그리고 자유당 말기에서 유신 무렵까지 태웅이란 청년의 파국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정면에서 그려냈다. ‘취화선’ 이후 그는 무엇에도 거리낌이 없어진 듯했다. 그는 ‘천년학’의 제작발표회에서 “슬슬 사랑 얘기를 꺼내도 될 나이가 됐다”고 말했다.

    “100번째 영화가 나의 첫 멜로”

    여주인공 오정해 씨 (왼쪽)와 임 감독이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내가 전에 멜로 하려면 아는 사람들이 못하게 했어요. 왜냐, 모르니까. 시쳇말로 사랑 한번 못 해보고 청춘을 보냈어요. 이 나이가 되니까 사랑하는 게 참 소중한 거 같아요. 인생에서 그게 빠지면 안 되겠더라고.”

    13년 차이가 나는 배우 채령(본명 채혜숙) 씨와 만나 43세 때에 결혼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보다 더 재미없는 연애담이 있을까 싶다. ‘처음 감독과 배우로 만나 그냥 헤어졌다가 한참 뒤에 다시 만났는데. 그 사이에 아무 연락도 없었지. 다시 만났는데도 별 얘기 없었고.’ 이런 식이다. 2002년 칸의 레드 카펫에서 임 감독보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채령 씨의 모습이 큰 화제였다고 하자 “어, 그래요? 사진 나왔단 얘긴 들었지만 그렇게 인기가 있었는지 몰랐네”라며 즐거워하더니, “집사람이 제일 친하고 믿음직스런 친구”라고 하곤 끝이다.

    파격적인 정사신도 등장한다는 첫 번째 멜로영화에서 그는 사랑을 어떻게 정의할까. 그는 웃음을 터뜨린다.

    “사랑을 내가 정의할 수 있는가. 내가 정의하면 얼치기 같은 소리지. 그러면 영화 개판되는 거야. 그저 동호와 송화는 평생을 찾아다니는 거요. 자꾸만 비끄러지면서 말이야. 동호가 선학동을 찾는 것도 어렸을 때 아버지와 셋이 왔었기 때문이오. 그게 동호와 송화의 사랑인 거지요.”

    촬영장엔 오정해가 부른 남도민요 ‘흥타령’이 끊임없이 흐른다.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든 것이 꿈이로다.’

    전 연기자와 스태프가 이 곡을 숙지하라는 감독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데, 흩날리는 매화꽃과 어우러져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이날 촬영분은 송화가 맹인인 자신을 거두어준 백사 노인의 임종을 지키며 마지막으로 ‘흥타령’을 들려주는 장면. 임 감독의 사랑이 이런 것이지 싶다. 신분과 나이가 다르고, 얼굴 한번 본 적 없고, 살을 부딪치지 않아도 연인이 가진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것.

    제작비 문제로 우여곡절 끝에 촬영 시작

    한 컷, 한 컷 모든 스태프가 의식을 치르듯 움직인다. ‘축제’ (1996년) 이후 10년 만에 스크린에 돌아온 오정해는 외모도 자세도 그때 그대로다. 서울에서 남편이 소품을 가져다주러 왔건만, 전화로 미안하다고 말하고 물건만 전해 받았다. 그녀는 “29살에서 40살을 오가야 하니, 그동안 먹은 나이가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라고 말한다. 정일성 촬영감독이 연기자와 카메라 사이를 뛰어다니며 그림을 만들면 임 감독이 ‘OK’를 낸다. 삼총사처럼 늘 함께 있던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 대신 김종원 대표가 모니터를 지킨다. 임 감독으로선 처음 돈 때문에 ‘영화가 엎어지는’ 경험을 한 셈인데, 이 사장에 대한 섭섭함은 전혀 없는 듯하다.

    ‘서편제’의 유봉 역을 맡았던 ‘배우’ 김명곤은 갑자기 입각해 자리를 비웠다. 임 감독은 “이제 장관이니 김명곤 ‘이분’ 해야지. 이분이 바쁜데 와서 연기를 헌들 잘 하겠소?” 한다. 김 장관이 스크린쿼터를 축소한 데 대해선 “나야 반대하지만, 입각하기로 한 이상 거기 따라야지” 하곤 다른 말이 없다.

    올해 1000만 관객 동원을 한 ‘왕의 남자’를 임 감독도 봤다고 했다. “찍기 어려운 남사당과 이준기란 배우의 매력을 충격적일 만큼 잘 찍었다”고 칭찬한다.

    “이태원 사장 말로는 ‘서편제’ 100만 기록이 서울 단관 관객 수니까 전국 300만~400만 흥행기록이라 합디다. 숫자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문화적 충격’을 준 것이 보람이지요. ‘왕의 남자’나 ‘서편제’나 그 정도 흥행이 되는 영화는 그렇게 된 이유를 규명해봐야 한국 영화 발전에 도움이 될 거요. 나도 아직 그 이유를 모르겠으니.”

    이태원 사장의 ‘유혹’에 넘어가 ‘장군의 아들’을 내리 3편(1992년)까지 찍은 임 감독은 ‘태백산맥’(1994년)을 기획하지만 정부로부터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제작을 막겠다’는 압력을 받는다.

    “어차피 지치기도 했고, 다음 정권에 가서 찍자고 마음을 먹었지. 그런데 내가 일중독자라 쉬는 셈치고 ‘서편제’를 찍었어요. 이 사장에게 돈도 좀 벌어줬고 해서 부담은 없었지만, 한 5만은 들어야 체면이 설 텐데 은근히 걱정을 했었죠. 찍으면서 이거 재미있겠다 싶은 게 한 10만은 들어줄 것 같았지요.”

    ‘천년학’은 올해 12월 크랭크업 해 2007년 5월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서편제’에서 임 감독이 다 못하고 13년 동안 그의 피 속을 돌아다니고 있던 이야기가 ‘천년학’에 있다.

    “시사회 후엔 내 영화를 보지 않아요. 그게 완성이 아니고, 완성에 가까운 영화도 만들어본 적이 없소. 100편 아니라 1000편을 한들 결과를 내지 못할 것을 내 압니다. 단지 그걸 향해 치열하게 한번 가보자고, 그것도 아름다운 거라고 나 자신에게 일러주며 해갈 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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