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27

2006.03.21

“王氏 귀신이 될지언정 李家의 신하는 못 한다”

두문동에 들어가 순절 … 유언 따라 봉분도 만들지 않아

  • 허시명/ 여행작가 www.travelwriters.co.kr

    입력2006-03-20 11: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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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王氏 귀신이 될지언정 李家의 신하는 못 한다”

    물계서원의 봄 향사를 준비하기 위해 회의를 하고 있다.

    경남 창녕에 가면 물계서원이 있다. 서원은 조선시대에 학문을 연구하는 사설 교육기관이자 명현(明賢)을 기리는 곳으로, 대체로 지역공동체의 유림이 주체가 돼 건립했다. 그런데 물계서원은 다르다. 한 가문이 주체가 돼 만들어졌다. 1724년 창녕 성씨 가문에 의해서였다.

    좌의정까지 지낸 이복원(李福源, 1719~ 1792)은 물계서원에서 조상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것을 두고 “고금에 창녕 성씨 일가뿐이며, 천하에 물계서원 하나뿐이다. 아, 거룩하다”고 평했다. 비록 대원군 때 물계서원은 무너지고 1995년에 다시 세워졌지만, 여전히 국내 유일의 문중 서원이다. 그렇다고 집안사람만 드나드는 것은 아니다. 봄, 가을 제사와 서원 행사는 지역의 타성(他姓) 유림들이 앞장서 치른다.

    호를 ‘두문자’로 하고 불사이군 뜻 마음에 새겨

    1809년 물계서원에서 두문동의 역사를 정리한 ‘두문동선생실기(杜門洞先生實記)’가 간행됐다. 성석주(成碩周, 1649~1695)가 그의 직계 선조이자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성사제(成思齊)의 행적을 기록한 것에 두문동 관련 자료를 덧붙여 펴낸 것이다.

    성사제의 호는 두문자(杜門子)다. 고려가 망하자 조선의 세상으로 나가지 않고, 두문불출(杜門不出)하겠다는 의지를 호에 새긴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등장하는 ‘공자건두문불출(公子虔杜門不出)’에서 유래한 말로 여겨지는데, 성사제는 자신뿐 아니라 아들의 이름까지도 두문불출의 의미를 담아 두(杜)라고 고쳤다고 한다.



    성사제는 신현(申賢, 1298~1377)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신현은 안향과 우탁의 도통(道統)을 이색, 원천석, 정몽주에게 연결시켜준 유학자다. 원천석 감수, 범세동 편찬, 성사제가 증보(增補) 작업에 참여한 ‘화해사전(華海師全)’은 신현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술한 책이다. 조선시대 내내 잊혀졌다가 1931년 군산에서 발견된 ‘화해사전’은 비록 위서(僞書)의 논란이 있지만, 고려 말 유학의 계통과 성리학의 이해 수준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료다.

    성사제는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해 문장과 책문(策問)을 만지는 일을 주로 했고, 벼슬은 보문각 직제학(直提學·정사품)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그는 “차라리 왕씨의 귀신이 될지언정 이가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寧爲王氏鬼不作李家臣)”고 말하고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그는 부인에게 “나는 고려의 신하라 신조(新朝·조선)에 벼슬해서 조상을 욕보이지 않을 것이고, 이제 곧 죽을 것”이라며 “아들을 데리고 고향(창녕)으로 돌아가서 선영을 지키라”고 했다.

    현재 물계서원에는 21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모두 창녕 성씨 사람들의 것이다. 그중에서 고려 말 충신으로 성여완(成汝完)과 성사제가 있고, 조선 개국공신으로 성석린(成石璘)이 있다. 성여완은 고려가 망하자 경기도 포천 왕방산으로 숨어들어 조선에 협력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큰아들 석린이 조선 개국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냈고, 둘째 석용(石瑢)과 셋째 석연(石王因)이 대제학 벼슬을 해 두문동 72현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성여완과 성사제는 당숙과 조카 사이고, 성석린과 성사제는 6촌 형제다. 성사제는 조선 왕조에 협력하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을 테지만 단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내가 죽더라도 시체를 염하지 말 것이며, 봉분도 만들지 않음이 옳을 것이다”는 말을 남겼고, 결국 두문동에서 순절하고 무덤도 없이 잊혀졌다.

    “王氏 귀신이 될지언정 李家의 신하는 못 한다”

    ① 시조 재실 안의 시조 비와 600년 된 느티나무. ② 성사제를 기리는 망송각 안의 망제단. ③ 망송각 처마의 소박한 문양. ④ 시조 묘 동산에 자리 잡은 시조 재실.

    성사제의 존재가 다시 부각된 것은 1796년(정조 20) 유생들에 의해서였다. 그의 행적을 알게 된 유생들이 개성유수에게 알리고, 유수가 임금에게 보고했다. 그 결과 1808년(순조 8) 개성 표절사에 그의 이름이 오르게 됐다. ‘두문동선생실기’가 간행된 것은 그 이듬해의 일이다.

    정조 때 유생들에 의해 성사제의 행적 부각

    현재 창녕에 사는 성씨의 9할은 성사제의 후손이다. 부인 성산 이씨와 아들 두는 고향에 내려와 아버지의 유지를 잘 받든 셈이다. 물계서원 건립을 주도한 이들도 물론 성사제의 후손이다.

    성사제의 후손은 무덤조차 없는 것을 아쉬워해, 1812년에 창녕읍 조산리의 부인 성산 이씨 묘 옆에 망송각(望松閣)을 짓고 그 안에 망제단(望祭壇)을 마련했다. 망송각 아래쪽에는 신도비(神道碑)도 세웠는데, 신도비는 현재 창녕 성씨 시조 묘가 건너다보이는 대지면 대지초등학교 앞쪽으로 옮겨져 있다.

    두문자 성사제가 끝까지 지키려 했던 것은 충(忠)이었고, 효(孝)였다. 나라를 위한 충은 자신이 지켰지만, 선조를 위한 효는 아들에게 맡겼다. 그렇게 충효를 삶의 지표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도비가 건너다보고 있는 시조 묘의 사연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성사제는 시조 성인보(成仁輔)의 6세손이다. 성인보는 창녕 지역의 호장(戶長)이었는데, 연초에 개경에 임금을 알현하러 갔다가 병을 얻어 숨을 거두었다. 그러자 동행했던 아들 송국(松國)이 자신의 효성이 부족해 아버지가 객지에서 돌아가셨다고 자책하며, 나라에서 제공한 우마차와 장례비를 마다하고 몸소 지게에 아버지의 시신을 지고 천 리 고향 길을 내려왔다. 고향에 이르렀을 때 눈이 내려 하룻밤을 묵게 됐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시신 주변에 호랑이 발자국이 있었다. 시신엔 탈이 없어서, 호랑이 발자국을 따라가 보니 야트막한 언덕에 눈 녹은 양지가 있었다. 송국은 그곳에 아버지를 안장했는데, 호랑이가 잡아준 명당이라 하여 지금도 풍수가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시조 묘에서 가까운 곳에 물계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좋은 터에 조상을 모시고, 그 정신까지 모시고 있는 셈이다. 사육신 성삼문(成三問)과 동국 18현의 한 사람인 우계 성혼(成渾)의 위패도 모시고 있는데, 나라와 운명을 함께한 성사제의 존재가 있기에 더욱 빛나는 공간이다.

    ◆ ‘杜門不出’ 두문동 72賢을 찾아서는 이번 호로 끝맺습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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