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26

2006.03.14

‘메달 획득 기계’ 전명규의 힘

쇼트트랙 세계 최강 한국팀 키운 건 8할이 그의 공로 … 독창적 훈련법과 작전 고안

  • 기영노/ 스포츠평론가 younglo54@yahoo.co.kr

    입력2006-03-13 10: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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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달 획득 기계’ 전명규의 힘

    전명규 교수

    “한국 쇼트트랙을 키운 건 8할이 전명규다. 한국이 세계 정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전명규 덕이다.”

    쇼트트랙계에서 이 말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전명규(43) 한국체육대 교수는 1988년부터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때까지 국가대표팀을 맡으면서 올림픽 금메달 11개를 포함, 780여개의 메달을 따는 데 기여했다. 대한빙상연맹 고위 관계자는 그를 ‘메달 획득기계’라고 부른다. 한국 쇼트트랙의 계보를 이어온 전이경, 김소희, 김동성, 채지훈, 김윤미, 주민진, 안현수 등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보석이 없었다.

    쇼트트랙은 1938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공식대회가 열렸다. 이후 50여년 동안 한국에선 누구도 이 종목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80년대 중반 국가대표팀이 처음으로 꾸려졌고, 이때 선발된 선수들은 스피드스케이팅을 하다가 도태된 이들이었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패배의식에 젖어 ‘해봤자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88년 전 교수가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한국 쇼트트랙은 일대 전기를 맞이한다.

    1988년 감독 부임 후 일대 전기 맞아

    ‘메달 획득 기계’ 전명규의 힘
    “쇼트트랙과 관련해 참고할 만한 자료조차 없었다.”



    전 교수도 문외한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쇼트트랙과 관련한 외국 서적을 구해 읽으면서 책에 나온 대로 가르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당시 쇼트트랙 세계 최강이던 일본을 오가며 경기를 관전하고 일본 국가대표팀 훈련을 벤치마킹했는데, 일본의 노하우를 들여오기 위해 일본어를 익히기도 했다. 빙상계의 한 인사는 “전 교수는 지도자로 태릉선수촌에서 15년을 지내면서 틈틈이 학업에 힘써 박사 학위를 받았을 만큼 학구파”라며 “선수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불구덩이에도 뛰어들 사람”이라고 말했다.

    94년 릴리함메르 동계올림픽 때의 일이다. 전이경이 훈련 도중 빙판에서 미끄러지면서 발목을 다쳤다. 병원에서는 출전이 불가능하다고 했으나, 전 교수는 울먹이는 전이경을 다독이며 치료법을 찾아 나섰다. 그는 “중국 대표팀 주치의로 온 한의사가 용하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 “침 한 번만 놓아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껄끄러워하는 중국 의사에게 그는 막무가내로 매달렸다. 결국 침을 맞은 뒤 전이경은 상태가 호전돼 경기를 뛸 수 있었고, 그 대회에서 2관왕에 올랐다.

    전 교수는 선수를 철저하게 실력 위주로 뽑았다. 94년 릴리함메르 동계올림픽 때 빙상계 고위 인사가 특정 선수를 국가대표로 뽑아달라고 부탁하자 “자꾸 이러시면 저 국가대표 감독 그만둘 겁니다”라고 거절한 일도 있다.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때는 특정 선수를 빼고 안현수를 선발했다고 해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안현수는 무명이었기 때문에 대한빙상연맹도 그의 선발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안현수는 이 대회 1000m 경기에서 미국의 안톤 오노와 중국의 리자준에게 걸려 넘어지면서 메달을 따지 못했다. 그러나 4년 뒤 안현수는 세계 쇼트트랙 역사상 최고의 성적(3관왕)을 거두며 토리노 동계올림픽의 영웅이 되었다. 전 교수의 혜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메달 획득 기계’ 전명규의 힘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1000m 결승에서 전이경 선수가 ‘날 들이밀기’ 기술을 이용해 1위로 통과하고 있다.

    한국 여자 쇼트트랙은 토리노 동계올림픽 3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94년 릴리함메르, 98년 나가노, 2002년 솔트레이크 대회에 이어 4연속 금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들 대회 모두 강력한 우승 후보는 중국이었다. 그러나 금메달은 언제나 한국의 차지였다. 대회마다 전 교수의 기상천외한 작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 교수는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에서 ‘반 바퀴 더 타기’라는 작전을 고안했다. 외국(특히 중국) 선수들이 터치를 하기 위해 주춤거리는 사이 사인을 내서 한 선수가 반 바퀴를 더 타게 한 것이다. 주민진이 이 작전을 멋지게 소화하면서 한국은 쉽게 우승할 수 있었다. 전 교수는 “국가대표팀 감독 15년 동안 메달을 수없이 땄지만 이 승리를 가장 값지게 생각하고 있다”면서 “가끔 비디오를 보면서 당시의 감동을 되새긴다”고 말했다.

    ‘날 들이밀기’는 골인 동작의 교과서

    한국이 개발한 쇼트트랙 기술과 독특한 훈련법은 대부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날 들이밀기’가 대표적이다. 92년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계주 결승에서 김기훈은 골인 지점에서 발을 쭉 뻗어 캐나다 선수를 제치고 1위로 들어왔다. 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김동성과 전이경도 이 기술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현재 ‘날 들이밀기’는 세계 모든 선수가 사용하는 골인 동작의 교과서가 됐다.

    전 교수는 한국 선수들을 위한 ‘맞춤형 스케이트’도 고안해냈다. 외국 선수들이 타는 스케이트 날의 길이는 42.4cm. 하지만 한국 선수들은 날이 44~46cm인 스케이트를 탄다. 코너링을 중요시하는 쇼트트랙에선 날이 짧을수록 유리하다는 게 정설이었지만, 전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체력과 기술만 갖추면 얼마든지 날이 긴 스케이트를 타면서 스피드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전 교수가 독창적인 훈련법과 기술로 각종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며 세계를 놀라게 하자 외국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빗발쳤다. 그 가운데 중국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중국은 전 교수에게 상당한 액수의 연봉을 제시하면서 3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달라고 제안했다. 하나는 전 감독이 중국으로 들어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 선수들을 한국에서 훈련시키는 것, 그리고 그것도 안 되면 중국 지도자들을 한국으로 보낼 테니 가르쳐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 감독은 모두 거절하고 교수의 길을 택했다. 그는 한국체육대에 가서도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이강석에게 쇼트트랙 주법을 전수, 이강석이 토리노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500m에서 동메달을 따는 데 기여했다. 스피드스케이팅이 실외경기에서 실내경기로 바뀌면서 아웃코스에서 인코스를 파고드는 코너워크 기술이 중요해졌는데, 전 교수는 이강석을 쇼트트랙 경기장에 데려가 빠른 속도로 코너를 도는 훈련을 시켰던 것이다.

    쇼트트랙 숨은 공로자 2인

    개척자 편해강 부회장과 ‘제2 전명규’ 박세우 코치


    ‘메달 획득 기계’ 전명규의 힘

    편해강, 박세우

    대한빙상연맹 부회장이면서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심판으로 활약한 편해강 씨는 한국 쇼트트랙의 개척자. 편 부회장은 쇼트트랙이 생소하던 1980년대 중반 쇼트트랙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활약했다. 그는 88년 전명규 한국체육대 교수에게 지휘봉을 넘길 때까지 국가대표팀을 가르쳤다. 편 부회장은 열악한 환경과 싸워가며 한국 쇼트트랙이 세계 정상에 오르는 데 디딤돌을 놓았다.

    그리고 국가대표팀 박세우 코치는 전임 코치들의 구타 파문으로 국가대표팀 분위기가 뒤숭숭할 때(2004년 11월) 취임했다. 그는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면서 2005년 동계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최은경을 5관왕,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는 진선유를 3관왕으로 이끌었다. 박 코치는 스스럼없이 선수들과 어울리는 덕장형 지도자다. 쇼트트랙계에서는 박 코치를 ‘제2의 전명규’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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