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25

2006.03.07

속살 드러낸 妖婦 연기 “난 이제 소녀가 아니에요”

  • 입력2006-03-06 11: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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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살 드러낸 妖婦 연기 “난 이제 소녀가 아니에요”
    아역 배우 출신이 성인 연기자로 성장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내가 생각할 때 그 이유는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아역 배우들에게 요구하는 연기가 너무 정형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대개 아역 배우들에게 원하는 것은 깊은 내면연기가 아니라 성인 연기자의 보조 역할 정도에 한정된다. 울거나 웃거나 하면서 아역 배우들은 관습적 연기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아직 연기세계를 확립하지 못한 아역 배우들은 자신의 개성으로 독창적 영역을 확보하기 전에 관습적 연기에 함몰될 가능성이 높다.

    7살에 데뷔 16년째 연기 생활 … ‘버스, 정류장’으로 영화 신고식

    두 번째는 아역 배우 이미지의 틀을 깨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대중은 아역 배우가 성장해도 여전히 그의 앙증맞은 얼굴을 기억한다. 뛰어난 아역 배우일수록 고착된 이미지의 틀에 갇히기 쉬우므로 성인 신고식을 위해 눈물겨운 노력이 필요하다. 드라마 ‘토지’의 어린 서희 역을 맡아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이재은은 영화 ‘노랑머리’를 찍으며 파격적인 섹스신을 소화했다.

    세 번째는 연기 외적인 것이다. 연기자 생활을 하면서 너무 일찍 성인들의 세계를 알아버리기 때문에 정서적인 혼란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아역 배우 중에서 가끔 사춘기의 터널을 통과하며 말썽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는데,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아도 격렬한 심리적 내상을 겪는 사람들이 많다.

    김민정은 초등학교 1학년 때인 7살 때부터 연기를 했다. 1982년생인 그녀는 88년 TV 드라마 베스트극장 ‘미망인’을 통해 데뷔한 뒤 무려 16년째 연기자 생활을 하고 있다. 그의 활동 이력을 살펴보면 지금까지 부침이 거의 없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청소년기에도 그는 꾸준히 연기활동을 했다. 대부분 ‘장녹수’(95년), ‘보고 또 보고’(98년), ‘왕과 비’(98년), ‘사랑해 당신을’(99년),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2000년), ‘카이스트’(2000년) 같은 TV 드라마를 통해서였지만, 김민정은 사춘기의 통과제의를 무난히 거쳐 성인 연기자로 진입하는 데 성공한 드문 배우가 되었다.



    아역 배우가 아닌 김민정의 영화 신고식은 ‘버스, 정류장’(2001년)이었다. 이미 청소년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짱’(1998년)에서 반장 역을 맡은 바 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막 들어가면서 찍은 ‘버스, 정류장’이야말로 배우 김민정의 신고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쉽게도 영화는 실패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김민정은 원조교제를 하는 고교생 역을 맡았다. 그리고 다시 TV 활동을 하다가 변영주 감독의 ‘발레교습소’(2004년)를 찍었다. 거기에서도 청소년기의 성장통을 앓는 황보수진이라는 배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음란서생’은 그의 연기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그녀가 속살까지 드러내며 처음으로 성인 배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왕의 후궁인 정빈 역의 그녀는 사대부 출신 명문장가 김윤서(한석규 분)에게 마음도 주고 몸도 준다. 그런데 김윤서는 남몰래 ‘흑곡비사’라는 포르노 소설을 쓰고 있는데, 그 소설이 남녀의 성교 장면을 그린 삽화까지 넣어 유통되면서 스캔들을 일으켜 곤경에 빠진다. 정빈은 정치적 위협을 느낀 것은 물론 배신감에 사로잡혀 김윤서를 왕에게 고발하고 모함한다.

    “여배우들은 화면에 노출되는 자신의 모습에 매우 민감하다. 전신 노출은 말할 것도 없고 팔이나 등만 노출돼도 커다란 심적 부담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결국 중요한 것은 연기에의 몰입이다.”

    속살 드러낸 妖婦 연기 “난 이제 소녀가 아니에요”

    ‘음란서생’

    ‘노랑머리’에서 ‘스리섬’ 등 파격적인 노출로 단숨에 아역 배우의 이미지를 벗어버린 이재은과는 다르게, 김민정은 ‘음란서생’에서 등만 노출한다. 대사의 수위나 소재의 파격성을 생각하면 다소 수위가 낮지만 그것 역시 오랜 연예계 생활을 통해서 체득한 지혜일 것이다. 김민정은 전부 다 보여주는 것보다는 보여줄 듯 말 듯 하는 게 여배우의 미덕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작품 들어가면 촬영 없는 날에는 방 안에만 있다. 내가 맡은 배역의 감정선이 흐트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품이 끝날 때까지 친구들도 안 만나고 전화도 하지 않는다.”

    무섭지 않은가? 그는 허구의 배역을 통해 자아와 세계의 갈등을 해결해온 것이다. 김민정은 그동안 여우, 깍쟁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이제는 스스로 즐기면서 연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는 “찍고 나서 후회가 되지 않을 작품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기에 매우 신중하게 작품을 고른다.

    첫 성인 배역 맡아 성공적 변신 … 아역 이미지 훌훌

    김민정은 김대우 감독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읽고 노출 수위가 약간 걱정되었지만 출연하기로 결심했다. 시나리오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정빈은 일종의 팜므파탈인데, 남성을 유혹하는 매력과, 사랑에 배신당하고 복수하는 과정에서 폭넓은 감정선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상당히 어려운 배역이었다.

    “장녹수 등 역사 속의 요부 이미지를 참고하지는 않았다. 시나리오 자체를 분석해서 내 것으로 소화하려고 했다. 대본을 읽고 감독과 캐릭터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사랑이 깊은 만큼 나중에 배신감도 컸을 것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 부분이 매우 중요했다.”

    김민정 얼굴의 반은 눈이 차지한다. 그녀를 보면 처음에는 눈만 보인다. 금방 눈물이 그렁그렁 맺힐 것 같은 그 큰 눈 속에는 차가운 지성과 뜨거운 열정이 공존하고 있다. 커다랗고 또렷한 눈이 김민정의 가장 큰 매력이지만, ‘음란서생’을 보면 그녀의 도톰한 입술이 요부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데 큰 구실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왕의 여자’ 김민정은 김대우 감독이 영화를 찍으면서 그녀에게 붙여준 별명대로 ‘체리’였다. 하얀 크림케이크 속 체리 같은 존재가 정빈이라는 감독의 비유는 매우 적절해 보인다. 그녀는 윤서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음란 비사의 물줄기 속에서 중심을 잡고 힘을 잃지 않으며 한 사람의 개성 있는 연기자로 자리잡는 데 성공했다.

    정치적 억압을 받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가 포르노를 쓰며 현실의 억압으로부터 일탈한다는 ‘음란서생’의 테마는 매우 정치적인 것이지만 영화는 대중적인 성적 자극과 멜로, 코미디를 적절하게 배합해 완성도를 높였다. 특히 후반부의 왕과 윤서, 정빈 등 사랑과 욕망으로 엉켜 있는 세 사람이 부딪치는 장면은 연기자들의 뛰어난 내공 없이는 표현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김민정은 감정의 진폭을 탁월하게 조절하며 삼각점의 균형을 잡음으로써 더 이상 아역 배우의 이미지를 찾을 수 없는 ‘여배우’ 김민정이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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