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25

2006.03.07

한복, 상상력 날개 달고 진화 중

영화·드라마서 화려한 ‘퓨전 한복’ 관객에 어필 … ‘전통+보편적 공감’ 새 美學 창조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6-02-28 17: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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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복, 상상력 날개 달고 진화 중

    드라마 ‘궁’은 한복과 오리엔탈 인테리어의 화려함을 모던하게 변형해 보여준다. 황태자비의 휴대전화 고리, 테디베어, 한복 배자와 재킷 모두 인기상품.

    “한복이 아주 독특한데, 고증을 하셨나요?”“영화 의상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인 정경희 씨가 고증과 재현을 맡았습니다.”

    영화 ‘음란서생’의 시사회장. 한 남성 관객이 감독에게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은 뜻밖에 ‘한복’이었다. 조선 말이 배경인 ‘음란서생’에 나오는 한복은 TV 사극에서 보던 것과 전혀 달랐다. 한 관객은 “눈이 얼얼하다”고 했다. 이 영화엔 양반의 옥색 두루마기, 왕의 붉은 곤룡포, 상궁의 초록 당의가 없다. 왕은 검은색과 밤색이 섞인 곤룡포, 상궁은 보라와 회색 치마저고리를 입고, 정빈의 화려한 가슴가리개는 프랑스제 란제리와 비교해도 ‘음란’하기 짝이 없다. 또 등장인물에 따라 미묘하게 다른 검은색은 화면을 강렬하고 모던하게 만든다.

    “한복이 이렇게 예쁜지 몰랐어요. ‘궁’에서 황후 민씨가 입었던 조끼를 살까, 황태자비가 입었던 재킷을 살까 고민 중이에요.”

    수목드라마 시청률 1위를 지키고 있는 ‘궁’도 젊은층의 한복 ‘붐’을 주도하고 있다. ‘궁’에 한복과 ‘퓨전 한복’을 지원한 디자이너 배영진 씨의 숍에서 20대 초반의 여성이 고른 조끼와 재킷은 각각 한복의 털배자와 저고리를 변형한 것으로 청바지와 잘 어울리는 ‘오리엔탈 아이템’. 황후 역의 윤유선이 입고 나온 빨강 배자는 방송이 나가자마자 모두 팔려나갔다고 한다. 가히 ‘한복의 재발견’이라고 할 만하다.

    한복, 상상력 날개 달고 진화 중
    “한복이 이렇게 예쁜지 몰랐어요”



    ‘궁’에서 선보인 휴대전화 고리, 떨잠 브로치, 고무신 스니커 등도 인터넷 쇼핑몰의 히트 아이템으로 떠올랐다. 휴대전화 고리는 실패·구슬·노리개 등을 축소한 모형을 장식으로 매단 것이고, 떨잠 브로치는 조선시대 사치의 상징이었던 가체(머리를 땋아 돌려 올린 것)에 꽂았던 떨잠(얹은머리에 꽂는 장식)을 브로치로 응용한 것.

    한복, 상상력 날개 달고 진화 중
    왕실의 화려한 한식 인테리어와 전통가구 또한 인기다. ‘궁’의 미술감독 민언옥 씨에게 ‘한국의 궁궐처럼 인테리어를 바꾸고 싶다’는 호텔, 레스토랑 등의 문의가 쇄도한다고 하니 올해 청담동에는 ‘왕궁’ 레스토랑이 트렌드를 이룰 전망이다.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왕의 남자’ 흥행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 요인 역시 한복이었다. ‘왕의 남자’ 홈페이지에 오른 감상문에는 ‘오방색이 아름답다’는 칭찬이 빠지지 않는다.

    “시대극의 의상은 남아 있는 자료나 유물을 기초 정보로 만듭니다. 그러나 옛 문헌의 짧은 묘사나 어가행렬도 같은 그림에서 보이는 옷이 과연 그 시대 사람들이 입었던 옷일까요? 아무도 알 수 없어요. 오히려 디자이너의 상상력이 가미될 때 관객에게 한복의 멋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습니다.”(정경희, ‘음란서생’ ‘혈의 누’ 등 영화 의상 디자이너)

    한복, 상상력 날개 달고 진화 중

    ‘음란서생’에서 ‘검은색’의 아름다움을 살린 한복을 보여준 디자이너 정경희 씨. ‘YMCA야구단’‘형사’와 대종상 의상상 수상작 ‘혈의 누’가 그의 작품이다.

    ‘음란서생’ 초반에 정빈은 고려시대의 옷을 입고 나온다. 왕과 내시의 검정 옷들은 조선 후기의 ‘흑단령’을 고증한 것이다. ‘한국복식풍속사연구’ 등의 문헌에 따르면, 검은색 옷은 왕과 관료 등 최상류층과 의정부 행사에 참여하는 기생·악공들이 즐겨 입었다고 한다. 디자이너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는 방대한 ‘옷장’ 속에서 극중 캐릭터를 가장 잘 표현하는 옷을 찾아냈다. 철저하게 고증하되, 고증의 속박을 거부한 것이다.

    ‘음란서생’에서 윤서가 정빈의 몸을 쉽게 만질 수 있었던 건 주름을 잘라내 구멍이 많았던 ‘살창고쟁이’라는 실재한 속옷 덕분이었다.

    연산군이 등장하는 ‘왕의 남자’도 마찬가지다. 연산군 때라면 왕은 붉은색 곤룡포를 입었을 테지만, 영화에서 왕(장진영 분)은 푸른색 곤룡포에 푸른색 도포를 입는다. 자기 상처에 갇힌 왕의 심리를 푸른색이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연산군이 붉은색 곤룡포를 입었는지, 아니면 엇나간 행태로 보아 영화처럼 푸른색이나 검은색 옷을 입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나라가 입헌왕국이라는 가상 역사를 소재로 한 ‘궁’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황후와 비, 빈, 황태자비 등은 조선시대 궁중의 복식관례였던 대수 머리에 활옷을 입기도 하지만 힙합 패션으로 궁 내를 활보하기도 한다. 상반신은 서양식 어깨 끈, 치마엔 금박스란단을 댄 ‘궁표’ 이브닝드레스를 선보이기도 한다. 상궁과 궁녀들은 검은색 스커트 정장을 입고 허리와 머리에 빨강 금박댕기를 묶는다.

    드라마 ‘궁’의 의상은 원작 만화 ‘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김해의 김수로왕릉에서 영감을 얻었고, 한복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 원작 만화가 박소희 씨가 ‘궁’의 제작진에게 한 첫 번째 부탁이 ‘한복에 신경을 써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옛것을 그대로 입는다고 전통은 아닙니다. 한복 바지의 커팅을 현대 의상에 응용한다든가, 입체 재단을 한복에 응용하면 재미있고 독창적인 새 전통을 만들어낼 수 있어요. 산업적으로 봐도 한복을 옛 모습 그대로 외국에 파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포스트모던 상품으로 포장 판매

    배영진 씨는 “배우는 만화 주인공처럼 10등신이 아니기 때문에 전통보다 만화와 ‘크로스오버’하기가 더 어려웠다”고 말했다. 사극이 현재적 담론을 다루면서 현대 관객에게 어필하는 한복을 창조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고, 이에 따라 화면에서도 한복과 한국적인 것의 아름다움이 새삼 눈에 들어오게 됐다는 것이다. 시대물의 의상 디자이너가 고증을 중시하는 교수에서 작가들로 바뀐 것도 이런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디자이너의 입장에서 보면, 간접광고(PPL) 효과가 엄청난 현대물과 달리 시대극의 의상 디자인을 맡는 것은 좋게 말해 ‘장기 투자’이며 사실상 ‘희생’을 의미한다. 한 한복 디자이너는 “1000만원을 주고 제작비까지 알아서 해달라는 영화제작사가 흔하다”고 했다. 방송사 사극에 한복을 지원했던 또 다른 디자이너는 “제작비를 받지 못해 드라마 중반부터 옷을 제공하지 못했다. 팔 수도 없는 옷이라 돌려받지도 않았다. 다시는 사극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배영진 씨는 “스크린쿼터 폐지 반대 시위에 나갔다. 한국 영화의 의상 스태프 연봉은 여전히 600만원 수준이다. 이렇게 영세한 영화산업 현실에서 쿼터를 없애는 게 옳은 일일까 싶었기 때문”이라며 “젊은 관객들이 영화나 드라마에서 스타가 아닌 배경을 눈여겨봐주는 건 반갑고 고마운 일”이라고 말했다.

    시대극 ‘기생학교’(가제)의 의상을 준비하고 있는 한복 디자이너 이효재 씨는 “영화 ‘게이샤의 추억’을 보고 안타까웠다. 우리 영화가 한복을 제대로 보여줬다면 동양을 짝사랑하는 서양 감독들이 일본의 기모노에만 도취돼 있을 리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과거 어느 시대 어느 계층에서 입었던 옷은 ‘정지된 옷’일 뿐입니다. 그런 인식이 ‘한복은 뻔하다’는 편견을 갖게 했어요. 문헌을 분석해보면 과거에도 재주 있는 집에선 한복을 맘껏 변형해 멋을 부렸어요. 그 멋을 보여주고 싶어요.”

    2월21일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이 주최한 ‘2006 문화원형 컨퍼런스’에서 ‘왕의 남자’ ‘해신’ 제작자들은 한결같이 ‘전통의 함정’을 강조했다. 중요한 것은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적 공감’이라는 뜻이다.

    영화 속 등장인물이 고려와 대한제국 때의 옷을 동시에 입을 수 있느냐고 따져 묻는 것은 이제 의미가 없다. 한국적 아름다움이 포스트모던한 상품으로 포장돼 비싸게 팔리는 시대, 한복의 오방색이 상상력과 시각적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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