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25

2006.03.07

한국 농업 길 떠나 ‘희망’ 만났다

벤처농업대학 졸업생들 특별한 일본 여행 … 앞선 기술과 시스템 확인, 농업 활로 모색 계기

  • 지명훈/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mhjee@donga.com

    입력2006-02-28 15: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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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농업 길 떠나 ‘희망’ 만났다

    한국벤처농업대학 학생들과 일본 시즈오카현 농민들이 2월18일 심포지엄을 마친 뒤 ‘한일 농업 일신우일신’이라는 즉석 퍼포먼스 작품을 들고 기념촬영을 했다.



    농업 이야기 끝에는 으레 한숨이 이어진다. 분노한 농민의 모습도 연상된다. 하지만 2월17일부터 20일까지 실시된 충남 금산의 한국벤처농업대학 5기 졸업생 80여명의 일본 시즈오카(靜岡)현 졸업여행은 ‘희망 캐기’였다.

    방문 경위부터 그랬다. 이번 방문은 시즈오카현 초청으로 이뤄졌다. 일본 농민에게 자극을 주고 싶다는 것이 초청 이유였다. 한국보다 농업 환경이 나은 일본이 “한 수 배우겠다”며 한국 농민을 초청한 것 자체가 이례적이었다.

    시즈오카현은 한국에서 벤처농업이 활기를 띤다는 소식을 듣고 이 대학 운영을 주도하고 있는 민승규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을 초청, 강연을 들은 뒤 지난해 10월 이 대학을 방문해 수업을 참관하기도 했다.

    “한 수 배우겠다”며 일본서 초청



    한국벤처농업대학(www.vaf21.com)은 민 수석연구원이 2000년 농업 발전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만들었다. 창의력과 기업가 정신을 갖춘 농민을 선발해 매달 1박2일로 마케팅과 경영전략을 가르친다. 졸업 논문은 ‘사업계획서’로 대체하는데 매 기수에서(100명 내외) 절반만 졸업장을 받을 정도로 심사가 엄격하다. 강의는 농업과 경영 등 각 분야 전문가의 자원봉사로 이뤄지며, 강의료는 약간의 농산물로 대신한다. 외부의 재정지원을 받지 않기 때문에 대학은 수업료(1인당 연간 90만원 내외)만으로 운영된다. 매화꽃 축제로 유명한 전남 광양 청매실농원 경영자 홍쌍리 씨 등 수많은 ‘스타 졸업생’을 배출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일본에 가졌던 감정과 생각은 모두 버리세요. 일본에 물건을 팔러 왔다고 생각하면 태도를 바꿀 수 있습니다. 알아봤더니 시즈오카현에서는 한국 김치를 먹어본 적이 없답니다. 그만큼 가능성이 큰 시장입니다.”

    17일 오후 2시 반경, 이 대학 전준일 교수는 나고야 공항에서 시즈오카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인식의 전환을 촉구했다. 동행한 민 수석연구원의 주문도 이어졌다.

    “한국 사람 가운데 일본에서 기업을 하는 사람은 많은데 농업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농업 분야에서도 성공 사례를 만들어야 합니다. ‘농업의 박찬호’ ‘농업의 박세리’가 나와야 합니다.”

    즉석 농업 강의도 이뤄졌다. 김완배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베이징의 백화점에 가면 중국 사과와 이보다 9~10배가 비싼 일본 사과가 있지만 중국의 고소득층은 일본 사과를 사먹는다”며 “고품질로 승부하면 우리 농업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강조했다. 농업 정책과 유통 분야 전문가인 김 교수는 이번 여행 동안 농민들의 애로 상담역을 자임했다.

    한국 농업 길 떠나 ‘희망’ 만났다

    한국벤처농업대학 설립을 주도한 민승규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서울의 한 전시회에 함께 참석한 벤처농업인들과 포즈를 취했다.

    18일 오후 1시 반 시즈오카현 모리마치(森町) 문화회관에서 열린 ‘농업인이 만드는 한일 농업의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주제의 심포지엄은 졸업여행의 하이라이트 행사였다. 이 자리에는 한국 벤처농업을 알아보려는 일본 농민 300여명이 참석했다.

    이날 심포지엄에서 양상추 재배농 스즈키 아키라 씨는 ‘논을 3배 활용한 매력 있는 농업’, 멜론 재배농 나구라 미쓰코 씨는 ‘나는 세련된 카페 점주’, 사천녹차원 이창효 대표는 ‘한국 녹차산업의 새로운 경쟁력’, 두리농원 진민자 공동대표는 ‘멋진 친환경 농업, 이득 보는 친환경 농업’이라는 주제로 각각 발표했다. ‘성장 농업의 한일 비교’를 발표한 이와테(岩手) 대학 기노시타 유키오 교수는 “농업기술과 시스템은 일본이 앞서지만, 개인의 파워와 열정에서는 한국이 월등하다”고 평가했다.

    양국 농민은 심포지엄이 끝난 뒤 소비자 신뢰 획득 등 5개 항의 ‘한일 농업의 희망 선언문’을 합창했다. 심포지엄장 밖에 진열한 ‘도자기 소금’ ‘즐거운 樂 딸기’ ‘쥐눈이콩 청국장’ 등 50여개 품목의 벤처농민 농산가공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오카모토 노부코 시즈오카현 농림국장은 “양국 농민의 교류를 한일 농업박람회와 아시아 농업박람회로 확대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농민들은 모리마치 농업시설과 녹차밭, 녹차박물관, 나구라 미쓰고 멜론 농장을 방문했다. 이 가운데 모리마치 농협은 농민들의 부러움을 샀다. 농민과 합심해 고품질 농산물을 개발하고 집단출하로 경쟁력을 높여 ‘모리마치 모델’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농민운동가 출신의 이정옥 ‘행복한 고구마’ 대표는 “일본 농업은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것으로 보여 부러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부러움으로 그치진 않았다. 이동차량 안에서 즉석토론이나 의견 발표를 통해 희망을 얘기했다.

    “농업은 한숨 아닌 희망이다.” “정부 지원에만 의존하면 결국 죽는다.” “반도체보다 어렵다는 농업을 대충해서는 안 된다.”

    풍년농산미곡종합처리장 나준순 대표는 “이번 방문을 통해 오히려 우리 농업이 어떤 부분에서 경쟁력을 갖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며 “정말 멋있는 농업을 해봐야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한일 농업의 희망 선언문

    ● 우리는 안전한 먹을거리를 제공함으로써 소비자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다.
    ● 우리는 농업이 생명산업의 축으로 자리매김해 두 나라 국민이 지지하고 필요로 하는 산업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 우리는 의존적인 타성에서 탈피해 환경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체질 변화를 추구한다.
    ● 우리는 생동감 있고 지속 가능한 농업 농촌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데 기여한다.
    ● 우리는 앞으로 교류를 심화해 한일 두 나라 농업이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인터뷰 김동태 한국벤처농업대학장

    “농업은 희망 업종 … 고품질 농산물로 승부해야”


    한국 농업 길 떠나 ‘희망’ 만났다
    “잘 해보려는 의지만 있다면 농업은 분명 희망 업종이에요.”

    이번 졸업여행에 동행한 김동태 한국벤처농업대학장(전 농림부 장관·사진)은 “농민들이 심포지엄과 홈 스테이 등을 통해 노력하면 난관을 타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일본 농민들은 소득구조가 안정돼 있고 농외소득이 높으며 기술 수준도 앞서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기업과 농촌의 상생을 꾀하는 일사일촌(一社一村) 운동이나 정신력은 한국 농민에게서 배울 게 많다고 했다”며 “우리의 장점을 잘 살려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독불장군처럼 각개전투를 하지만 일본은 자치단체와 농협, 농민이 합심해 품질을 향상시키고 집단으로 출하해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농업의 집단화를 실현한 시즈오카현 모리마치 농협의 사례는 하나의 모델로 평가할 만하다. DDA(도하개발아젠다), FTA(자유무역협정) 등으로 한국 농업 위기론이 고개를 들고 있지만 틈새시장은 분명히 있다. 지레 겁먹지 말고 다른 나라의 정보를 충분히 확보하고 이를 토대로 고품질 농산물로 승부해야 한다.”

    김 학장은 “정부도 다양한 농업 지원책을 마련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잘 활용해야 하며, 자치단체 등을 통해 필요한 제도를 제안해 정부 예산이 효율적으로 집행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 학장은 2001년 9월부터 2003년 2월까지 농림부 장관을 지낸 뒤 건국대 농축대학원 석좌교수로 농업정책과 식품유통 등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이 대학 학장직은 지난해부터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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