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64

2016.11.23

정치

“우리도 다 알아요. 참정권 없어 촛불 들었죠”

정치집회 심장이 된 청소년들

  • 박세준 기자 sejoonkr@donga.com

    입력2016-11-18 16:2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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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12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 2시부터 모이기 시작한 인파는 5시가 되자 광화문광장과 서울광장은 물론, 두 광장을 잇는 세종대로까지 꽉 메웠다. 집회 주최 측은 100만 명이 모였다고 추산했지만(경찰 추산 26만 명), 기자 가늠으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듯했다. 매년 100만 명이 모이는 여의도 불꽃축제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몰렸기 때문이다. 세종대로에만 100만 명 정도고, 광화문광장을 중심으로 주변 도로인 청계천로, 새문안로, 경희궁길, 종로1길 등 주변 도로와 골목 사이사이에도 촛불을 든 집회 참가자가 핏줄처럼 퍼져 있었다.

    사상 최대 규모 촛불이 모인 이 역사적 현장의 주인공은 젊은이도 어르신도 아닌 각계각층 시민, 그중에서도 특히 교복을 입고 참가한 중고생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나온 학생이 대다수였지만, 부모와 함께 촛불을 든 학생도 적잖았다. 경기 안산시의 김모(46) 씨는 중학교 1학년 딸의 권유로 거리로 나섰다. 김씨는 “아이가 마냥 어린아이인 줄 알았는데 현 정치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고, ‘국민 한 사람으로서 집회 현장에 나가자’고 하니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오후 5시 이후부터는 세종대로 진입 자체가 불가능했다. 6시쯤 광화문광장에서 만난 시민과 이야기를 나누다 인파에 휩쓸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주변은 집회 참가자로 꽉 막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시청광장까지 흘러 내려갔다. 시청광장을 지나 대한문까지 가는 데 평소 같으면 걸어서 10분 정도 소요되는데 이날은 한 시간 반이나 걸렸다. 일부 시민은 세종대로를 벗어나 골목골목에서 촛불을 들고 집회를 이어갔다.



    자녀들이 부모 참여 이끌기도

    광화문 인근과 골목에 모인 인파는 규모는 달랐지만 외치는 구호와 구성원은 똑같았다. 모두 대통령을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고, 그 구호 속에서 심심찮게 앳된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참가한 학생의 면면은 다양했다. 친구들과 함께 거리로 나섰다는 경기 화성시의 김유진(16) 양은 “우리가 아무리 어린 학생이라지만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의 관계가 크게 잘못됐다는 것쯤은 잘 안다. 어른은 투표권이 있어 다음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평가할 수 있지만 미성년자인 우리는 투표권이 없다. 미성년자가 대통령의 실정을 꾸짖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이 집회에 참가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오게 됐다”고 밝혔다.



    경기 안양시에 사는 김모(18) 군은 부모와 함께 집회에 나왔다. 김군은 “지금 수험생인 데다 평소 부모님이 학업에 대한 기대가 크셔서 집회에 나간다고 말씀드리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어제 부모님에게 말씀드리자 흔쾌히 승낙하면서 ‘함께 나가자’고 하셨다”며 “집에서는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많이 들어 최근 부모님과 대화가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오늘 집회에 함께 나와 구호를 같이 외치고 부모님의 대학시절 집회 이야기를 들으며 오랜만에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남녀노소 누구나 자신의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에 가장 예민한 법. 이 때문에 학생들이 거리로 나온 이유를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의 이화여대 부정입학 의혹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많다. 하지만 현장에서 만난 학생들의 반응은 달랐다. 서울 중구에 사는 박모(18) 군은 “정유라 부정입학 의혹에 화가 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최순실 게이트’다. 돈 많고 권력 있는 집안 자녀의 부정입학 논란은 정유라가 아니더라도 자주 나온다. 그러나 대통령이 전문가도 아닌 사람의 의사에 따라 국정운영 방향을 결정했다는 것은 초유의 사태다. 이 부분에 문제를 느껴 집회에 참가한 것이지 부정입학에는 큰 관심이 없다”고 밝혔다.



    “입시 부정보다 대통령 부정 더 화나”

    경기 성남시에서 온 이린아(17) 양 역시 “정유라의 부정입학 의혹도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 대다수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었지만, 나처럼 어린 학생을 더 화나게 하는 것은 자기 잘못에 책임을 지지 않는 대통령의 태도”라고 말했다.

    당장 학생들부터 눈앞의 입시보다 대통령으로 인한 국정혼란을 걱정할 만큼 집회 참가자의 태도는 성숙했다. 모두가 분노의 구호를 외쳤지만 “평화시위를 합시다” “경찰에게 욕하지 맙시다” 등 자정의 목소리는 자칫 과격해질 수 있는 일부 시민의 마음을 녹였다.

    실제로 밤 10시 무렵 경찰 차벽이 설치된 종로구 내자동 인근에서 집회에 참가한 몇몇 시민이 경찰버스 위에 올라가거나 경찰의 방패를 빼앗는 등 과격 행동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시민들의 만류로 금세 버스 위에서 내려왔고 방패도 다시 경찰에게 돌려줬다. 엄청난 인파가 모인 시위였지만 “질서를 유지하자”는 자정의 목소리가 사고 발생을 막았다.

    11월 12일 서울 종로소방서 발표에 따르면 집회 현장에서 병원으로 이송된 사람은 총 7명. 이들의 증상은 찰과상, 전신 쇠약, 구토, 단순 통증 등 경미한 수준이었다. 집회가 끝난 거리도 깨끗했다. 집회 현장에서 배부된 유인물과 손팻말 때문에 쓰레기가 많았지만 시민들이 직접 쓰레기봉투를 구해 와 깨끗이 치웠다.

    서울 금천구의 임모(56) 씨는 “작은아들이 집회에 참가한다고 해 걱정이 돼 함께 나왔다. 이렇게 질서를 잘 지킬 줄 알았으면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집회 참가자의 높은 시민의식에 놀랐다”고 말했다. 서울 은평구에 사는 중학생 조정진(15) 군은 “이번 집회는 대통령에게 국민의 불만을 알림과 동시에 대통령에게 실망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함께 구호를 외치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기회인 것 같다”며 집회에 참가한 소감을 밝혔다.

    우석균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은 11월 13일 새벽까지 집회를 함께 한 청소년들이 여러 버스정류장에서 첫 버스를 기다리며 서로 보듬은 채 앉아 있는 모습을 지켜본 뒤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박근혜 정권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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