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23

2006.02.21

역전 명승부 알고 보면 ‘멘탈 싸움’

마지막 라운드서 중압감 못 이겨 자멸하기 일쑤 그렉 노먼, 11타 차 뒤집히기도

  • 이종현/ 골프칼럼니스트 huskylee1226@yahoo.co.kr

    입력2006-02-15 17: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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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프의 승부는 마지막 홀 퍼팅이 끝난 뒤 장갑을 벗어봐야 안다고 했다. 그만큼 골프는 변화무쌍하다. 큰 차이로 뒤져 있다가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역전할 수 있다. 2월5일 끝난 두바이데저트클래식 대회가 비근한 예다. 타이거 우즈는 대회 첫날(2월2일) 52위를 기록하며 우승권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으나 파죽지세로 추격전에 나서 3라운드를 마친 뒤엔 공동선두로 올라섰다. 하지만 최종일 16번홀까지 어니 엘스에게 1타 차로 뒤지며 2위에 만족하는 듯했다.

    그러나 우즈는 17, 18번홀에서 놀라운 막판 집중력을 보였다. 17번홀에서 우즈는 티샷을 그린에 올려놓는 데 성공하며 버디를 잡아냈다. 엘스도 만만치 않았다. 대회 내내 강한 모습을 보인 18번홀에서 버디를 낚으면서 다시 도망친 것. 그러자 우즈의 집중력이 더욱 힘을 발휘했다. 18번홀에서 두 번째 샷을 그린 근처 러프에 떨어뜨린 우즈는 절묘한 어프로치 샷에 이은 짧은 버디 퍼팅으로 승부를 연장으로 몰고 갔다.

    국내선 박남신이 최상호에게 번번이 역전패

    연장 첫 홀에서 우즈는 3번 우드로 ‘안전하게’ 볼을 페어웨이로 보낸 반면, 엘스는 드라이버를 꺼내들어 볼을 페어웨이 왼쪽 사막 지역으로 보냈다. 누가 보더라도 엘스의 과욕이었다. 우즈가 그린 앞 워터해저드를 의식해 그린 뒤쪽을 공략, 칩샷으로 파를 목표로 한 반면 엘스는 투온을 노린 것. 엘스의 욕심은 이어져 사막 지역에서 친 엘스의 두 번째 샷이 워터해저드에 빠져버린다. 엘스는 결국 4타 만에 볼을 그린에 올려 보기를 범했다. 우즈는 3온 2퍼트 파로 홀 아웃하고도 우승컵을 안았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엘스는 우즈의 수비적 플레이를 본 뒤 욕심을 부리다가 티샷부터 크게 흔들렸고, 심리적 압박감이 결국 세컨 샷의 실수로 이어졌다. 그린공략을 위해선 레이 업이 필요했으나 롱아이런으로 야자수 등 장애물을 피해 날린 ‘도박적인’ 승부 샷이 그린에 미치지 못한 채 우승의 꿈을 접어야 했다.



    비슷한 역전 명승부가 1986년과 96년에도 있었다. 두 경기의 주인공은 모두 그렉 노먼. 그가 ‘마스터스의 불운아’로 평가받는 까닭도 이 두 대회 때문이다.

    86년엔 잭 니클로스에게 뼈아픈 역전패를 당했다. 골프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명승부로 기억되는 마스터스 오픈 마지막 날 경기에서 노먼은 압도적 기량으로 누가 봐도 우승이 확실해 보였다. 세베 발레스테로스가 노먼에 이어 2위를 달렸으나, 발레스테로스의 역전 우승을 예상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복병은 따로 있었다. 4라운드 초반부터 맹추격을 벌인 니클로스가 그 주인공. 그는 3라운드까지 평범한 성적을 보이다가 4라운드 16번홀에서 이글 롱퍼팅을 성공시킨 후 17번홀에서 버디, 18번홀을 파로 마무리하며 노먼과 동타를 이룬 채 홀아웃했다. 모두가 연장을 떠올리고 있을 즈음, 노먼은 짧은 파 퍼팅을 놓치며 보기를 기록하면서 우승컵을 니클로스에게 넘겨준다. 당시 노먼은 “베테랑(니클로스)의 추격에 심리적으로 흔들렸다. 정상적인 심리 상태였더라면 그렇게 짧은 퍼팅을 놓쳤을 까닭이 없다”고 말했다.

    노먼은 96년 마스터스 오픈에서도 6타 차 선두로 최종일 라운드에 나섰지만 6오버파 78타를 치면서 닉 팔도에게 5타 차로 우승을 내주었다. 팔도가 4라운드에서 11타 차를 뒤집는 대역전을 일궈낸 것이다. 노먼은 당시에도 심리적으로 흔들렸다. 4라운드 초반 플레이가 제대로 풀리지 않는 가운데 팔도가 맹추격해오자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버린 것.

    역전 명승부 알고 보면 ‘멘탈 싸움’

    2005년 6월 김주연이 US여자 오픈 최종 4라운드 18번홀(파4) 벙커에서 마음을 비우고 ‘파세이브만 하자’며 친 샷이 그림같이 홀컵에 빨려들어가 버디를 기록하며 승부를 갈랐다.

    국내 골프대회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적지 않다. 90년대 초 ‘양대 산맥’으로 불린 최상호와 박남신의 맞대결도 그랬다. 90년 동아생명 오픈에서 박남신은 최상호에게 3라운드까지 5타 차로 선두를 지켰다. 전문가들은 박남신의 우승을 점쳤으나 승부는 결국 뒤집혔다. 최상호는 역전 우승 직후 “집중력의 승리”라고 말했고, 박남신은 “최상호 선배와 경기를 하면 이상하게 역전을 당하곤 한다”고 토로했다. 이후 최상호와 박남신은 비슷한 상황을 수차례 재현했고, 그때마다 최상호가 뒤집기로 우승컵에 입을 맞추었다.

    ‘멘탈’ 강한 대표적 선수는 우즈

    이밖에도 박세리가 IMF 직후인 98년 US여자 오픈에서 양말을 벗고 맨발 투혼을 보이면서 역전 우승을 일궈낸 것과 지난해 같은 대회에서 김주연이 18홀에서 벙커샷으로 버디를 성공하면서 우승컵에 키스한 것도 심리가 승부를 가린 명승부 중 하나다.

    명승부를 살펴보면 승자와 패자의 명암은 사소한 곳에서 갈린다. 승자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놀라우리만큼 집중력을 보이면서 교과서적인 공략을 펼친다는 것. 반면 패자는 심리적 압박에 시달리며 과욕을 부리다가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133주 동안이나 세계 랭킹 1위를 지켰고 미PGA(남자프로골프협회) 투어 18승, 두 번의 브리티시 오픈을 포함해 총 74회 우승을 기록한 노먼은 왜 메이저대회 마지막 날 경기에서 역전패를 당하곤 했을까. 비전문가라면 ‘징크스 탓’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으나, 심리적 불안감 즉 ‘멘탈 싸움’에서 졌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골프에서 ‘멘탈’이란 인내력과 집중력을 통해 감정의 흔들림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아마추어들도 “왠지 안 맞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면 실제로 골프공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는 것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노먼 역시 86년 마스터스 오픈에서의 역전패가 평생 쫓아다니며 마음을 어수선하게 만든 것이다.

    프로나 아마추어 골퍼 모두 경기에 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우승할 수 있다’ ‘잘할 수 있다’를 굳게 믿는 것이다. 골프 선수가 최상의 플레이를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판단을 신뢰해야 하고, ‘이상적인 샷을 날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자신감이 흔들리면 스윙이 불안해지고 감각도 잃게 된다. 불안에 휩싸이면 대부분의 골퍼는 평상심을 잃고 과욕을 부리게 돼 플레이가 거칠어진다.

    96년 마스터스 오픈에서 노먼과 팔도의 공략 포인트를 살펴보면 승자와 패자의 ‘멘탈’을 짐작해볼 수 있다. 패자 노먼은 홀마다 핀을 향해 샷을 날렸고, 승자 팔도는 핀이 아닌 그린 중앙을 노렸다. 물론 승리를 위해서는 공격적인 샷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 상대가 추격해올 때 차분하게 그린 중앙을 공략했더라면 승부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골프 황제’ 우즈가 연장 승부에서 높은 승률을 보이는 이유는 ‘멘탈’이 강하기 때문이다. 훌륭한 플레이를 위해서는, 즉 ‘멘탈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자기최면이 필요하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과거 자신의 베스트 샷과 감각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골프장에서 플레이를 망치는 골퍼를 보면 자신의 샷에 대해 부정적이고 자신감이 없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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