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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杜門不出’두문동 72賢을 찾아서⑫|강릉(양근) 함씨와 함부열

쫓겨난 공양왕 위해 삶 바치다

유배지 간성까지 따라가 정착 … “내가 죽은 뒤 왕 밑에 묻어달라” 유언

쫓겨난 공양왕 위해 삶 바치다

쫓겨난 공양왕 위해 삶 바치다

간성 고성산에 있는 함부열의 묘역. 가운데가 함부열의 묘이고, 비석 없는 위쪽의 묘에 공양왕이 묻혀 있다고 한다.

고려시대 마지막 왕인 공양왕은 간성왕이라고도 불린다. 강원도 고성군 간성에 머문 적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1392년 7월11일에 폐위된 공양왕은 원주로 유배되었다가, 8월에 공양군으로 강등돼 간성으로 쫓겨났다. 공양왕이 머문 곳은 간성읍에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나오는 간성읍 금수리 마을 안쪽의 수타사로 여겨진다. 공양왕은 이곳에 머물다가 조선 태조 3년(1394) 3월14일에 삼척 궁촌리로 재차 유배된다. 그리고 한 달 뒤인 4월17일 고돌산의 살해재에서 왕자 석(奭), 우(瑀)와 함께 교살되었다. 공양왕의 무덤은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와 고양시 원당동 두 곳에 있다. 삼척 묘는 처음 묻힌 곳이고, 원당 묘는 조선 왕실에서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불러 올린 뒤에 묻은 곳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제3의 공양왕릉이 고성군 간성읍 고성산에 있다고 한다. 모두 두문동 72현으로 거론되는 강릉 함씨, 함부열(咸傅說, 1363~1442)과 관련되어 생긴 얘기다.

함씨 집안 야사에 공양왕 최후 상세히 전해져

공양왕이 강원도 유배 길에 올랐을 때, 몰래 뒤따르던 이가 있었다. 바로 고려 우왕 13년(1387)에 과거에 급제하고 홍문박사와 예부상서를 지냈던 함부열이다. 함부열의 친형은 함부림(咸傅霖, 1360~1410)으로, 이성계를 도왔으며 조선 왕조 개국공신 3등으로 개성소윤에 임명된 인물이다. 형과 동생이 조선과 고려로 갈라선 것이다. 이 때문에 간성으로 온 함부열의 후손들은 양근 함씨라고 본향을 달리 쓰기에 이르렀다. 양근은 지금의 경기도 양평으로, 강릉 함씨의 시조인 함혁(咸赫)이 삼한시대에 양평에서 부족장인 함왕주악(咸王周鍔)으로 불린 인연으로 붙은 본향이다.



함부열은 간성왕을 따라와 간성에 살게 됐다. 간성왕이 머문 수타사는 지금은 폐사되고, 애초에 5층이었을 석탑 한 기만이 밭 가운데에 덩그렇게 남아 있다. 절터는 계곡 안쪽에 있는데, 그다지 넓어 보이지는 않는다. 함부열은 수타사의 아랫마을인 금수리에 터를 잡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금수리에는 그의 종손집을 포함해서 그의 후손들이 아직도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함씨 집안 야사에는 간성왕의 최후가 좀더 상세하게 전해오고 있다. 1394년 3월에 함부열은 삼척으로 두 번째 유배되는 간성왕의 뒤를 따랐다. 내려간 지 한 달 만에 간성왕을 살해하러 중앙에서 관리가 내려왔다. 역사 기록에는 중추부사 정남진이 내려왔다는데, 함씨 집안에 전해오는 얘기로는 함부열의 형 형조의랑 함부림도 동행했다고 한다. 함부열은 마주친 형에게 간청하여 다른 왕족의 시신만 거두게 하고 간성왕을 간성으로 피신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정남진과 함부림은 도저히 조정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서 간성으로 자객을 보내 간성왕을 살해해버렸다. 그게 공양왕 삼척 사망일인 4월17일에서 8일이 더 지난, 4월25일의 일이라는 것이다.

살해된 간성왕은 금수리 수타사에서 가까운 고성산 기슭에 묻혔다고 한다. 매장을 주도한 사람은 함부열이다. 함부열은 유언으로 간성왕 밑에 자신을 묻고, 자신의 묘에 제사 지내기 전에 왕 무덤에 축문 없는 제사를 지내라고 했다. 행여나 간성왕 무덤이 알려지면 후손들이 다칠까 봐서였다.

쫓겨난 공양왕 위해 삶 바치다

공양왕이 간성에 2년 동안 머물렀을 때 거처한 것으로 추정되는 수타사 터(왼쪽). 다섯 봉우리로 둘러싸인 왕곡마을 바깥으로는 송지호와 동해 바다가 있다.

함부열과 간성왕의 묘는 고성산의 서쪽 기슭에 있는데, 금강산에서 설악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산맥들이 묘역을 휘감아 돌고 있는 명당 터였다. 안산(案山·앞산) 너머 조산(朝山·멀리 호위하고 있는 산) 자락에 관모(官帽)처럼 생긴 관대봉이 물결치는 산맥 사이에 우뚝 솟아 있다.

함부열의 묘에는 근래에 세워진 ‘고려 홍문박사 죽계공 함부열 충의비’가 있다. 함부열의 묘 위쪽에는 비석도 상석도 없는 작은 묘가 있는데, 이곳에 공양왕이 묻혀 있다고 한다. 문헌에 전하는 바가 없고, 함씨 집안에 전해오던 야사집도 실전되어 누구도 입증할 수 없는 일이 됐지만, 함씨 집안 사람들은 이를 사실로 굳게 믿고 있고 지금까지도 축문 없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함부열의 후손들은 간성 지방에 터를 잡고 살게 되는데, 함부열의 손자인 함치근(함영근은 그의 다른 이름)이 현재 전통마을로 지정된 고성군 죽왕면 오봉리의 왕곡마을에 살고 있다. 왕곡마을 어귀의 안내판에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 사이에 고려에 충성하는 강릉(양근) 함씨가 이곳에 들어와 동족 마을을 형성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쫓겨난 공양왕 위해 삶 바치다

왕곡마을에 있는 함희석의 효자비(위). 왕곡마을의 전통 가옥인 함경도식 겹집.

후손 중에 효자 열녀 많아

왕곡마을에서 산 하나를 넘고 내(川)를 하나 건너면 금수리 수타사가 나온다. 강원도 문화재 제78호로 지정된 왕곡마을 가옥에는 함부열의 21대손이자, 양근 함씨 오봉파의 종손인 함정균 씨가 살고 있다. 함정균 씨의 고조부인 함희석을 기리는 효자비가 마을 복판에 있고, 4대에 걸친 5명의 효자를 기리는 양근 함씨 효자각이 마을 동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이 효자각은 1820년에 세워졌다. 왕곡마을에 전해오는 ‘지정다지기 노래’의 “집을 지으면 명당이요, 아들을 낳으면 효자를 낳고 딸을 낳으면 열녀를 낳고’라는 가사에 걸맞은 기념물들이다.

함부열은 고성에 와서 낳은 아들인 함극충(咸克忠)-왕곡마을에 터를 잡은 함치근의 아버지-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고려를 향한 지극한 충성심을 새기며 살았고, 그 후손들도 입향조(入鄕祖)인 함부열의 뜻을 좇아 고향을 지키며 살았다.

역사는 유력한 문헌만으로 구성되는 것도 아니고, 그 문헌만이 진실한 것도 아니다. 집안 어른들의 얘기를 주섬주섬 담아놓은 족보 속에, 까맣게 잊혀져버린 역사적 진실이 담겨 있기도 한다. 그런 개연성을 가지고 역사를 돌아볼 때라야, 사문화되어버린 역사적 사실을 넘어 이 땅에 살았던 인간들의 욕망과 회한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고려 충신 함부열에 얽힌 제3의 공양왕릉 얘기도 그런 관점에서 보아야 하리라.

알 림

*다음 호에는 ‘부림 홍씨와 홍노’에 관한 글이 실립니다.
*두문동 72현에 얽힌 얘기를 간직하고 있는 문중과 후손들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휴대전화 016-341-5045, e메일 twojobs@empal. com




주간동아 2006.01.10 518호 (p68~69)

  • 허시명/ 여행작가 www.travelwriter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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