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17

2006.01.03

‘탐욕 열차’서 내려 나눔의 바다로

아름다운재단 박원순 상임이사 … “나눔의 마음, 성공하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습관”

  •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입력2005-12-28 14: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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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욕 열차’서 내려 나눔의 바다로
    박원순(49) 변호사는 ‘나눔 전도사’다. 2000년 8월 그가 첫 씨앗을 뿌린 ‘아름다운재단’은 이제 우리나라 기부문화의 상징이 됐다. 박 변호사는 우리나라 최대 모금단체인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감사이기도 하다. 그 외 여러 복지·모금 단체 및 기업 사회공헌팀들이 그의 지지와 조언을 기다리고 있다. 그가 우리 기부문화를 이끌어가는 실질적 리더이자 가장 신뢰받는 파트너 중 한 명이 됐음을 증명하는 내용들이다.

    사람들에게는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참여연대’를 대표하는 시민운동가에서 사회사업가로 ‘변신’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함께 나누며 사는 세상’을 꿈꾸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의 일이다. 연원을 따져 들어가면 이렇다.

    “전 입학 시험에 두 번 떨어졌어요. 한 번은 고등학교, 한 번은 대학교였죠. 고교 재수 때는 꼭두새벽부터 밤까지 단팥빵 하나로 버티기 일쑤였고, 그 뒤로도 고학을 하느라 고달픈 점이 많았지요. 대학에 입학하면서 ‘이제 큰 어려움은 끝났다’ 했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서울대 법대 1학년생이던 1975년 5월, 도서관에서 ‘타임’지를 읽으며 미팅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바깥에서 요란한 함성이 들려왔다. 캠퍼스로 난입한 경찰이 학생들을 무차별 폭행, 연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눈에 불똥이 튄 그는 무조건 밖으로 달려나갔다. 시위 대열에 끼여 이리저리 휘둘리다 결국 경찰에게 연행되고 말았다.

    “긴급조치 9호가 발효된 며칠 후였거든요. 저야 단순가담자에 불과했지만 엄벌에 처해졌죠. 수감생활 4개월에 학교에서도 제적됐고요.” 하지만 감옥은 그에게 새로운 학교였다. 다른 소년범들과의 우정을 통해 오히려 그는 ‘인간은 선하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다양한 ‘교양서’들을 읽으며 세상 보는 눈도 넓혔다. 그는 “이렇듯 예기치 못한 경험과 각성들이 결국 나를 나눔의 바다로 이끄는 첫 계기가 됐다”고 말한다.



    영국·미국 유학길에 서구의 기부문화 체험

    출소 후 몇 년을 방황하다 비로소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했다. ‘법의 목적은 평화이고, 거기에 이르는 과정은 투쟁’이라는 독일 법철학자 예링의 말이 길잡이가 돼 줬다. 24세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검사가 됐으나 생활은 갈등의 연속이었다. 죄를 따져 벌을 매겨야 하는 업무가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았다. 사표를 내고 변호사가 됐다. 그리고 돈 버는 맛을 알았다. “기사가 모는 승용차를 탔고 휴대전화도 썼어요. 제법 큰 단독주택도 마련했으니 또래 친구들과 비교하면 잘나가고 있었던 셈이죠. 경치 좋은 곳을 지날 땐 ‘저런 곳에 별장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으니까요.”

    그렇다고 그가 ‘돈만 밝히는’ 변호사였던 것은 아니다. 여러 단체에 크고 작은 기부를 하고 있었고 주변의 어려운 이들에게도 인색하지 않았다. 권인숙 성고문 사건, ‘말’지 보도지침 사건 등을 맡아 인권변호사로도 활약했다. 하지만 그는 당시의 자신에 대해 “이미 탐욕이란 열차에 올라탄 상태였다”고 말한다. 그런 그에게 아차 싶은 순간이 찾아왔다. “조영래 변호사 병문안을 갔을 때였어요. 절 보시더니 ‘돈 그만 벌고 이젠 눈을 좀 돌려봐, 외국에도 나가보고…’ 하시더군요. 가슴이 뜨끔했지요.”

    그는 더 늦기 전에 삶의 태도를 바꾸기로 결심했다. 91년 8월, 한창 물 오른 변호사 일을 그만두고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박 변호사는 그곳에서 처음 서구의 발달한 기부문화를 접했다.

    “신문에 기부금을 모은다는 광고가 심심치 않게 실리더군요. 또 ‘영국 국민의 73%가 매년 1회 이상 기부에 참여한다’는 등의 기사가 눈에 띄기도 하고요. ‘아, 이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그때부터 손 닿는 대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죠.”

    영국 유학 후 이어진 미국 하버드대학 객원연구원 생활은 기부에 대한 그의 관심을 더욱 증폭시키는 계기가 됐다.

    “어느 날 대학신문에서 도로시 파커라는 소설가가 쓴 칼럼을 읽게 됐어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어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은 뒤 ‘그것은 바로 체크 엔클로즈드(check enclosed)’란 답을 내놓았더군요. 우리말로 옮기면 ‘수표 동봉’ 정도가 될 텐데, 기부금이 들어 있다는 뜻이죠.” 서울 가회동 아름다운재단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는 이 칼럼을 비롯한 각종 기부 관련 자료들을 꼼꼼히 정리해놓은 스크랩북이 아직도 남아 있다.

    93년 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뒤 박 변호사의 삶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집도 없고 차도 없었다. 시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명색이 변호사인 가장은 아내, 심지어는 딸아이에게까지 가끔 차비 빌려달라 손 벌리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 그는 “막상 돈에서 자유로워지니 돈을 좇던 시절에는 맛볼 수 없던 마음의 여유를 벌 수 있어 좋다”고 말한다. “남편인 내가 잘 벌던 시절엔 분명 생각도 못했을 일에 자기 이름을 걸고 열심히 사는 아내와, 물려줄 것 하나 없으니 알아서 잘 커야 한다고 반협박하는 부모 덕에 어린 시절부터 자립심 하나는 확실하게 다져진 아이들을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라는 것이다.

    공익과 자선 목적 재단법인 설립 기부문화 이끌어

    박 변호사는 99년 다시 두 달간 미국에 머물며 현지 시민운동을 찬찬히 둘러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패권주의의 상징으로만 생각해온 미국 사회 전역에 참으로 다양한 기부문화가 발달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공익과 자선을 목적으로 하는 재단법인이 가진 놀라운 마력’은 그에게 가히 충격으로 다가왔다.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재단법인 기금은 한번 들어오면 절대로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런 만큼 한번 들어온 기금은 지구의 종말이 올 때까지 좋은 목적에 쓰일 수밖에 없는 거죠. 그 당연하고도 대단한 힘을 제대로 확인하고 온 셈입니다.”

    2000년, 마침내 그는 뜻을 같이하는 지인들과 함께 아름다운재단을 설립했다. 2002년부터는 상임이사로 재직하며 ‘1% 나눔 운동’ ‘아름다운 가게’ ‘나눔의 가게’ 등 우리나라의 기부문화를 획기적으로 바꾸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그는 “아름다운재단의 가장 큰 목적은 모금이 아니라 문화를 바꾸는 것”이라 말한다. 감성적·일시적 기부에서 이성적·지속적 기부로,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모금 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저수지와 관개시설을 만들어 가뭄에도 삶의 뿌리를 지킬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진짜”라는 설명이다.

    “저는 나눔의 마음이야말로 성공하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습관이자 조건이라 확신합니다. 또 진정한 리더는 ‘조화롭게 어울려 사는 삶만이 진정한 가치를 지닌다’는 자각과 실천력을 갖춰야 한다고 믿습니다. 성공하고 싶다면 ‘나는 진심으로 나보다 못한 이웃과 나눌 마음의 자세를 갖추고 있는가’를 늘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겁니다. 돈에 사로잡힌 자는 진짜 부자가 될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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