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13

2005.12.06

국수로 일군 富 멋지게 씁니다

  •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입력2005-11-30 15: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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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수로 일군 富 멋지게 씁니다
    송학식품 성호정 회장은 국수왕(王)이다. 국수, 냉면 등 면(麵)에 관한 한 한국 최고임을 자부한다. 뜨거운 물만 부으면 먹을 수 있는 떡볶이, 감자수제비, 해물국수 등 그가 만드는 면의 종류는 줄잡아 250여종. 성 회장을 국수왕으로 부르는 이유는 그가 만든 면류의 양과 질이 모두 1등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국수를 통해 일군 부(富)를 사회에 환원하는 데 앞장서는 나눔의 삶이 국수왕으로서의 위상 정립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성 회장은 현재 100여 곳의 사회복지시설과 교회 등에 매달 쌀과 자사 제품을 기증한다. 북한과 볼리비아, 아제르바이잔 등 지구촌 가족들 중에도 성 회장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볼리비아와 아제르바이잔 등지에서 성 회장에게 의지해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사람은 줄잡아 4000여명. 경제적 부담도 만만치 않지만 성 회장은 개의치 않는다.

    “나의 사업체와 내가 일군 부는 나의 것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관리할 뿐 쓰임새와 용도는 하나님이 정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성 회장이 갖는 나눔의 미학에는 종교적 신념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밑바닥을 들여다보면 누군가가 덮어준 낡은 야전잠바 하나가 가져다준 충격과 감동이 숨어 있다.

    “어린 시절 용산 삼각지의 조그만 사글셋 방 한 칸에 여덟 식구가 산 적이 있는데 방이 좁아 칼잠을 자도 대여섯 명만 잘 수 있었다. 나머지는 길거리에 천막을 치고 자곤 했는데 어느 날 잠을 자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야전잠바가 내 몸을 감싸고 있었다. 미군 야전잠바는 당시 너무 비싸 내 능력으로는 결코 살 수 없는 옷이었다. 그 잠바를 보면서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내가 앞으로 잘 산다면 이분처럼 살겠다.”



    100여개 사회복지시설·교회 등에 매달 쌀·국수 기증

    미군용 점퍼 하나를 계기로 시작된 성 회장의 나눔과 베풂의 삶은 북한에 국수공장을 차리면서 구체화되고 있다.

    “구호단체인 월드비전과 함께 2004년 북한을 방문했다. 당시만 해도 북한의 공장 가동률이 10% 정도 수준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무료로 지원하는 것보다 ‘북한 주민들에게 일거리를 만들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성 회장은 생각을 하면 곧바로 실천에 옮긴다. 귀국한 그는 월드비전 측과 협의, 북한에 국수공장을 세우는 작업에 몰두했다. 2005년 평양시 삼일포에 대지 600평 규모의 국수공장이 건설됐다. 남북 합작으로 만들어진 이 민간기업에 근무하는 직원은 200여명. 이 공장에서 생산되는 국수 등 면류는 모두 250여종. 북한의 식품가게, 백화점, 식당 등에 공급하느라 2개 라인을 완전 가동하고 있다.

    국수로 일군 富 멋지게 씁니다

    성호정 회장이 9월 평양시 국수공장을 방문해 직원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성 회장은 생산량을 늘려 한국과 제3국으로의 수출도 꾀할 계획이다. 그러자면 공장을 증설해야 한다. 북한 측도 공장을 더 지어줄 것을요청하고 있다. 성 회장은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그렇게 할 계획이다. 단순히 돕자는 것이 아니라 사업가적 안목에 따른 결정이다.

    “북한도 많이 변하고 있다. 시장이 개방되고, 주민들이 시장경제에 눈뜨는 듯한 느낌이다. 과거에는 가게 종업원들에게 수당을 지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은 많이 팔면 지급한다. 당연히 직원들은 더 많이 팔기 위해 애쓴다. 올해부터는 월급을 받는 사람들도 많이 늘어났다고 들었다. 자본주의경제의 기본인 임금체계는 북한의 시장 기능을 활성화할 것이다.”

    ‘나누고 베푸는’ 성 회장의 발길은 북한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기아에 지친 볼리비아, 아제르바이잔, 동티모르 등지의 어린이들을 지원하는 활동도 꾸준히 전개한다. 이들을 돕는 데도 성 회장은 국수왕으로서의 장점을 충분히 발휘한다. 경제적 비용을 줄이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입을 수 있는 음식 가운데 하나가 국수나 냉면 같은 면류 음식이기 때문이다.

    “국수 및 냉면 기계를 현지에 보낸 뒤, 현지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를 송학식품 파주공장으로 불러 한 달 정도 냉면 만드는 기술을 가르친다. 선교사가 기술을 익힌 뒤 그 나라에 가 현지인들과 함께 국수와 냉면을 만들어 나눠준다.”

    성 회장은 동티모르 등 현지를 방문, 그들의 어려운 삶을 직접 체험했다. 성 회장 눈에 비친 그들의 삶은 피폐하기 이를 데 없다.

    “옆에서 보니 많은 사람들이 하루 한 끼로 사는 것 같더라. 아침에 반을 먹고, 반은 남겨두었다가 저녁에 먹는 식이다.”

    성 회장은 조만간 동티모르에 무료 배식을 추진할 계획이다. ‘오랫동안 전쟁을 하다 보니 고아들이 엄청 많고, 그들이 굶주림에 지쳐 있다’며 한 선교사가 SOS를 청한 것이 배경. 성 회장은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몇 차례 현지를 방문했다.

    성 회장은 무엇보다 ‘먹는’ 것에 집착한다. 남이 굶는 것을 보지 못한다. 먹는 사업을 하고, 남을 돕는 방법도 음식을 나눠주는 것을 가장 큰 미덕으로 생각한다. 동티모르 역시 이 같은 생각에 따라 같은 방법으로 도움을 줄 계획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성장 배경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6남매의 장남인 나는 중2 시절 사실상 가장 노릇을 떠맡았다. 그 나이에 내가 무슨 수로 가족을 건사하겠는가.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이 다 그랬지만 정말 밥 굶기를 밥 먹듯이 했다. 시장에서 시든 채소를 주워서 국을 끓여 먹었고 막걸리 지게미로 빈속을 채울 때도 허다했다.”

    국수로 일군 富 멋지게 씁니다

    10월21일 동티모르를 방문해 현지 어린이들과 사진을 찍었다.

    그래서 누가 굶는다는 소리를 들으면 본능적으로 먹을 것을 떠올린다. 혹독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은 환경의 지배를 받거나 반대로 환경에 적응, 개척을 하는 경우로 구별된다. 성 회장은 환경이 주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근성’을 체득했다. 이런 근성은 사업을 하는 데 보이지 않는 힘이 됐다.

    북한·볼리비아·동티모르 등 빈곤국 어린이들도 꾸준히 도와

    면 종류는 유통기한이 짧다. 하루 팔 양을 생산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때문에 거래처도 서울과 경기 지역 등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이런 곳으로 팔려간 물건도 유통기한을 넘겨 반품되기 일쑤. 사업의 성패는 결국 제품의 유통기한을 늘리는 것이었다. 1992년 일본에서 열린 식품박람회에 참석했던 성 회장은 일본에서 가져온 찹쌀떡이 10여일이 지나도 변질되지 않고 신선도를 유지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알고 보니 알코올 순도 95%의 술 원료인 ‘주정’을 제품에 뿌려 살균과 방부성을 높이는 간단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 기술을 개발하는 데 엄청난 시간과 인내가 필요했다. 제품을 한국으로 가지고 와 수천 번 같은 실험을 반복했다.”

    성 회장은 가난이 가져다준 근성이 없었다면 포기했을 일이라고 생각한다. 주정으로 만든 면 제품은 유통기한이 2개월 이상 늘어났다. 국내 식품업계에서는 일대 혁신이었고, 특허를 취득한 성 회장의 국수 면류는 전국으로 실려나갔다. 비건조된 제품 혁신은 수출의 길도 열어주었다.

    국수왕 성 회장의 꿈은 미국의 록펠러처럼 세계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기업가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성 회장은 북한의 국수공장을 증설할 예정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조만간 평양을 방문할 것이다. 받는 삶보다 베푸는 삶에서 기쁨을 느끼는 성 회장이다.



    사람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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