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11

2005.11.22

아직도 내 사랑, 그대는 DJ

영향력 여전 여야 정치인 ‘구애 경쟁’ … 내년 지방선거 ‘DJ 우산 쓰기’ 몸 달아

  •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입력2005-11-16 13: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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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내 사랑, 그대는 DJ
    ‘동교동’이 붐빈다. 여야 수뇌부가 너도나도 김대중(DJ) 전 대통령 우산 밑으로 모여들고 있다. 11월8일 열린우리당 정세균 당의장이 DJ를 찾은 것을 비롯, 14일에는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DJ를 예방했다. 한화갑 민주당 대표도 16일 DJ를 찾아간다.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DJ의 회동 가능성도 거론된다. 여야 정치인들은 서로 다른 목적과 이해관계를 가지고 동교동을 찾는다. 그러나 그들의 방정식을 풀어낼 해법은 DJ로부터 출발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DJ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정치를 떠난’ 그이지만 원심력과 구심력이 뒤섞여 터져나오는 묘한 흐름에 몸을 맡기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그 속에 은퇴한 정치 9단의 노회함이 묻어난다. 말 한마디로 정치권을 들었다 놓은 그의 입지는 갈수록 강화된다.

    11월8일 DJ는 우리당 정세균 당의장의 방문을 받고 ‘여러분이 나의 정치 계승자’라고 말했다. 움직임 ‘자체’가 정치적 행보로 비춰지는 시기, 그는 오이밭에서 신발끈을 고쳐 맸다. 호남을 놓고 민주당과 경쟁에 나선 우리당으로서는 더없이 좋은 호재. 즉시 적자논쟁에 불을 붙여 민주당을 압박했다.

    그러자 민주당이 발끈했다. 민주당 유종필 대변인은 “정치 계승 발언의 DJ 덕담은 수십 번도 더 들은 노래”라고 물타기에 나섰다. 유 대변인은 “우리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김 전 대통령은 ‘분당은 이유야 어찌되었든 잘못된 것 아니냐’는 말로 우리당을 질책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우리당 전병헌 대변인 등이 나서 “분당의 ‘분’자도 듣지 못했다”고 부인했다.

    DJ 발언 한마디에 ‘일희일비’

    혼란이 가중되자 DJ 최경환 비서관이 교통정리에 나섰다. “덕담으로 하신 말씀으로 특정 정당을 지칭해서 한 게 아니다”며 민주당의 손을 들어줬다. 그럼에도 민주당과 한화갑 대표는 떨떠름한 표정이다. 그렇지 않아도 한 대표는 요즘 몸도 마음도 고달프다. 당내 반(反)한파들이 수시로 지도력에 이의를 제기하며 항명해 권위에 상처를 내고 있기 때문. 그러나 뾰족한 대응수단이 없는 것이 민주당의 요즘 위상이다. 그런 과정에 DJ 발언으로 한바탕 소란까지 보태졌다. 당연히 당내에 말이 날 수밖에 없다.



    한 대표는 민주당이 내년 5월 지방선거를 통해 명실상부한 제3의 정당으로 거듭나길 기대한다. 가능성은 높다. 특히 텃밭이었던 호남권에서의 민주당 지지세는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 한 대표 주변에는 지방선거 공천을 문의하기 위한 지역 유력가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승부처인 광주와 호남에서 확실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DJ 우산’이 필요하다. 한 대표는 우리당과 벌이는 DJ ‘적통자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싶어한다. 한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은 당과 호남 민심에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며 “민주당의 정통성을 확인해주면 당으로선 더 바랄 게 없다”고 말했다.

    아직도 내 사랑, 그대는 DJ

    김대중 전 대통령이 11월8일 김대중도서관에서 정세균 열린우리당 의장의 예방을 받고 악수를 나누고 있다. 2004년 8월12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김대중 전 대통령을 방문, 김대중도서관에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9월6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 준공식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한화갑 민주당 대표가 악수를 나누고 있다(왼쪽부터).

    한 대표는 11월16일 DJ를 만난다. 물론 비서실은 의례적 만남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지방선거를 앞둔 정치권이 요동칠 준비가 끝났다. 한 대표도 이 상황에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정치적 스승인 DJ의 한 수가 무엇보다 필요한 시기고, 행간을 읽는 DJ의 수를 읽지 못하면 정치낙오자 신세를 면키 어렵다. 그러나 DJ는 침묵의 미덕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의 침묵은 ‘정치를 떠났다’는 명분을 지킴과 동시에 정치권의 흐름을 동교동으로 집중시키는 이중효과를 불러온다.

    9월 김 전 대통령이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을 때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국정원 도청 문제와 관련, 국민의 정부 도덕성이 도마에 오른 탓에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픈 것이라는 정치적 진단이 흘러나왔다. 덩달아 DJ 건강에 대한 최악의 시나리오도 거론됐다. DJ와 연이 있는 정치권 인사들이 일제히 병원 문을 두드렸다. 14일 DJ와 회동한 박 대표의 방문 의사도 전달됐다. 물론 기회를 갖지는 못했다. 최경환 비서관은 “박 대표의 이번 동교동 방문이 그때 불발된 회동의 연장선상”이라고 설명했다. 구구한 정치적 해석을 거부한다는 선언이다. 그러나 박 대표의 동교동 방문은 동교동 지적처럼 단순한 예방으로만 보기 어려운 정치적 해석이 뒤따른다. 박 대표가 동교동과 호남에 들인 정성을 알고 있는 사람일수록 이번 방문의 의미를 여러 갈래로 분석한다.

    박 대표는 지난해 8월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으로 DJ를 찾아간 적이 있다. 이 자리에서 “아버지 시절 여러 가지로 피해를 보고 고생한 데 대해 딸로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DJ는 박 대표에게 “지역감정 해소와 동서화합의 적임자”라고 화답했다. 외형상 극적인 화해의 모습이었다. 박 대표는 올해 초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인 전남 신안군을 방문해 현지 주민들과 간담회를 했다. 박 대표는 11일 전남도청 개청식에 참석하는 한편, 한나라당 대표로는 처음으로 전남지역 국립대 초청강연을 추진 중이다.

    정치 떠났지만 최고의 흥행 카드

    박 대표의 이런 행보는 당의 서진정책의 일환이다. 호남권에서 한나라당의 지지세를 확보하려는 전략이다. 요즘 한나라당은 국민지지도 40%대의 고공행진을 한다. 당 한 관계자는 “마의 40%대 벽을 깬 것도 사건이지만 호남지역에서 10% 전후해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도 불가사의”라고 말했다. 이 지지도에서 한나라당은 호남에 대한 기대와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한다. 박 대표가 DJ를 방문하며 정성을 들인 것은 바로 이 지지도와 매우 관련 있어 보인다. 한나라당 한 의원은 “DJ가 우리당에 ‘정치적 계승자’란 말을 안겨준 만큼, 한나라당에도 선물을 주지 않겠느냐”고 기대한다.

    아직도 내 사랑, 그대는 DJ

    김대중 전 대통령이 9월6일 김대중컨벤션센터 개관을 알리는 터치스크린버튼을 작동하고 있다.

    DJ 구애에 나선 한나라당이 승부처로 보는 정치 행사는 내년 5월 지방선거다. 선거전문가(?)인 박 대표도 호남선거에는 영 자신이 없어하는 눈치. 그래서 DJ가 펼쳐놓은 우산의 가장자리라도 얻어 발을 디밀고 싶어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러나 천 리를 내다보는 DJ는 이번에도 역시 지긋이 눈만 감고 있다. YS가 동교동 삼거리를 기웃거리는 것도 눈길을 끈다. 물론 주변 인물들이 강하게 견인한 탓도 있겠지만 40년 경쟁과 협력의 파트너였던 DJ와의 대화해란 명분을 거부하기 힘들었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YS와 DJ의 만남이 더욱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두 사람이 만나 생성하는 시너지 효과 때문이다. YS-DJ가 영·호남 지역 화합을 선언하고 민주개혁세력 간 재통합의 주춧돌을 마련할 경우 이들의 존재 가치는 상상을 초월할 수 있다. 정국은 곧바로 정계개편의 와중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동교동 사정에 밝은 민주당 한 인사는 “DJ는 이 정치 여정에 동참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치를 떠난 지난 3년 동안 DJ 자신의 최대 업적이었던 햇볕정책의 상당 부분이 훼손됐고, 정치적으로는 도청론에 휘말려 도덕성에 상처를 입었다. 정치를 떠난 그가 부담스러워하는 대목이다. 이런 틈새를 파고 여야 정치인들이 DJ 우산 밑으로 몰려들어 ‘구애 경쟁’을 벌이고 있다. 정치를 떠난 DJ는 여전히 흥행 1위의 ‘스타’로 자리잡고 있다. DJ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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