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9

2005.11.08

북한 노동당은 레임덕인가

당 대회 25년 넘게 안 열리고 젊은 피도 수혈 안 돼 … 장성들 급부상 ‘黨보다 軍’에 권력 집중?

  • 곽대중/ 데일리NK 기자 keyseditor@hotmail.com

    입력2005-11-02 16:3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2002년 8월, 북한의 월간 여성잡지 ‘조선여성’에는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실렸다.

    ‘(1998년 8월)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는 장군님(김정일)께서 삼복기간에 다문 며칠간이라도 휴식하실 것을 토의 결정하고 당과 국가의 명의로 그이께 여러 차례 제의했다.’

    북한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이 기사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을 것이다. 98년 8월 조선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중 생존자는 김정일과 이종옥뿐이었기 때문이다. 이 기사대로라면 김정일과 이종옥은 마주앉아서 김정일이 휴식할 것을 토의 결정하고, 김정일에게 휴식을 여러 차례 제의했다는 말이 된다.

    상무위원은 다섯 명이었는데 김일(84년 3월), 김일성(94년 7월), 오진우(95년 2월) 순으로 사망해 98년 8월에는 김정일과 이종옥만 살아 있었다. 그러나 이종옥도 99년 9월 사망함으로써 현재는 김정일이 유일한 상무위원이다.

    조선노동당의 최고지도기관은 당 대회다. 당 규약상 5년마다 한 번씩 열리게 돼 있는데 1980년 6차대회 이래로 열리지 않고 있다. 물론 필요에 따라 늦추거나 빨리 소집할 수 있지만 자그마치 25년 넘게 당 대회가 열리지 않는 것은 전무후무할 것이다.



    당 대회가 열리지 않을 시 권한을 위임받는 곳은 당 중앙위원회다.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6개월에 1회 이상 소집하도록 되어 있는데, 1993년 12월 회의를 마지막으로 12년째 소집됐다는 소식이 없다.

    사회주의국가 아닌 병영국가 변신?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는 바로 정치국과 비서국, 검열위원회 등의 간부를 선출한다. 정치국은 북한 권력의 핵심으로, 이곳에서 노동당의 모든 정책이 수립된다. ‘정치국 위원’이 되었다는 것은 ‘권력 서열 20위’ 안에 진입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중에서도 ‘상무위원’이 되었다는 것은 노동당 최고의 위치에까지 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독학자 송두율 교수 문제로 널리 알려진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직함은 권력 핵심부에 들어가기 위한 훈련 과정을 밟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새롭게 수혈되는 ‘젊은 피’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난 12년간 북한에서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열리지 않아 새로운 정치국 후보위원들이 전혀 선출되지 않았다. 노동당의 브레인 수혈이 완전 정체된 것이다.

    정치국 상무위원은 1980년 6차 당 대회에서 김일성·김일·오진우·김정일·이종옥 등 5인이 선출됐는데, 이제는 다 죽고 김정일만 살아 있다. 그런데 ‘조선여성’에서 ‘상무위원회가 열려 김정일의 휴가를 결정했다’고 하니 희대의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 아니면 93년 12월 이후 열리지 않은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그동안 비밀리에 열렸다는 말인가? 그러나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공고나 회의 결과가 보고된 적은 전혀 없었다.

    이렇게 당 조직이 멈춰 있다 보니 희한한 일들이 생겨났다. 후보위원은 위원보다 서열이 아래다. 그런데 북한의 실제 권력 서열을 짐작케 하는 주석단 서열을 분석해보면 후보위원이 위원보다 먼저 호명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난다.

    예컨대 최근 사망한 연형묵은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으므로 실질적인 주석단의 권력 서열은 4~5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 정치국 후보위원에 머물렀다.

    최고인민회의 의장인 최태복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인 양형섭도 정치국 후보위원이지만 위원인 계응태(공안담당비서), 한성룡(경제담당비서)보다 위 서열로 호명되곤 한다. 당 직위의 개념이 완전히 무시된 것이다.

    실제 북한 노동당의 사정은 완전히 운명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지금 북한은 당이 이끄는 사회주의국가가 아니라, 군이 이끄는 나치나 무솔리니 시절의 병영국가(兵營國家)와 같이 되었다. 오죽했으면 수정주의이론의 대부로 북한에 우호적 태도를 취했던 브루스 커밍스(62)조차도 “(북한은) 폭력 전문가들이 가장 강력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병영국가’ 개념에 가장 근접한 나라”라고 했겠는가.

    과거에도 북한은 사회주의 무력을 강조했지만, 권력 서열에서는 문민(文民)을 더 중시했다.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구성된 ‘장의위원회’ 서열을 보면 상위 30명 가운데 군 출신은 오진우(당시 국방위 제1부위원장)와 최광(당시 인민무력부장)뿐이었다.

    그런데 90년대 후반 이후 조명록(국방위 제1부위원장)이 서열 10위 안에 이름을 드러내더니, 2001년 4월 최고인민회의 4차회의 때는 조명록·김영춘(인민군 총참모장)·김일철(인민무력부장) 등 군복쟁이들이 줄줄이 10위 안에 들어섰다. 이번에 연형묵 장례위원 명단을 보면 이명수·현철해·김기선·박재경 대장, 김양점·박승원 상장 등 차세대 군 수뇌부들의 이름이 여럿 눈에 띈다.

    당 핵심간부들 고령인 데다 지병도 많아

    그리고 군이 문민을 완전 압도하는 양상과 함께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노령화’이다. 10월9일 있었던 당 창건 60주년 기념보고대회 서열은 최근 북한의 권력구도를 알 수 있는 지표인데, 20위권 인물 가운데 가장 젊은 사람이 김정일이었다. 김영남과 조명록이 77세이고, 이용무(82)·양형섭(80)·김국태(81)·유미영(84) 등 80세 이상도 여럿이었다. 나이가 확인되지 않는 사민당 당수 김영대의 나이를 제외하고 평균 나이가 75.7세이고, 실질적 권력기관인 국방위원회의 위원들 가운데 나이가 확인된 사람들의 평균 나이는 73.3세였다.

    고령자들이다 보니 지병도 많아 조명록은 만성신부전증으로 해외에서 여러 번 수술을 받았다. 이용무도 비만과 당뇨 등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계응태는 치매에 걸렸으며, 현재 공식석상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당 중앙위원 이을설(전 호위사령관)·백학림(전 인민보안상) 등도 퇴임 후 와병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와중에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있다. 오랫동안 대남사업을 도맡아온 김용순이 2003년 10월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송호경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도 지난해 9월 사망했다. 북한 내 반체제 조직을 여러 차례 적발해 김정일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던 전 인민군 보위사령관 원응희 역시 지난해 5월 지병으로 사망했다. ‘김정일의 오른팔’로 불리던 연형묵은 최근 세상을 떴다.

    죽은 것은 아니지만 김정일의 권력 장악에 큰 몫을 담당했던 장성택(김정일의 매제) 중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은 연금 상태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의 애첩으로 후계자 물망에 오르는 정철·정운 형제를 낳은 고영희도 2004년 사망했다. 고영희는 2000년경부터 ‘사모님’이라 불리면서 전방 군부대를 중심으로 우상화 작업이 진행됐는데 사망한 것이다.

    요새 김정일은 이래저래 가슴이 답답할 것이다. 레임덕은 민주국가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다. 김정일도 심각한 레임덕 현상에 빠져 있는 것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