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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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상술 ‘행복한 만남’

기업은 금전적 지원, 작가는 상품에 상상력 불어넣기 … 간섭·왜곡 없는 ‘윈-윈’ 모델 정착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5-11-02 15: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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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과 상술 ‘행복한 만남’

    한젬마가 디렉터가 된 삼성 래미안 주택문화관, 낸시 랭의 쌈지 브랜드 ‘낸시랭’, ‘플라잉시티’가 만든‘에르메스’ 쇼윈도, SK ‘아트센터 나비’의 INP작가 양아치 씨가 만든 핸드폰방송국(왼쪽부터).

    도시 빈민들의 주거 공간을 연구하는 미술 그룹 ‘플라잉시티’와 세계적 패션하우스 에르메스, 지퍼와 단추를 소재로 작업해온 작가 한젬마와 거대한 래미안 주택문화관, 젊은 예술가들과 던힐 담배, 타악기와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 인사동 지하의 대안공간 사루비아 다방과 가죽 브랜드 토즈, 그리고 명품 ‘엽기’ 퍼포먼스 작가로 유명해진 낸시 랭과 쌈지.

    서로 무관하거나 심지어 정반대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은 요즘 가장 행복한 조우를 한 파트너들이다. 기업은 돈을 내고 예술가들은 상상력을 제공했지만, 간섭도 왜곡도 없다. 예술가들은 조각하듯 모델하우스를 만들고, 이중섭처럼 담뱃갑에 그림을 그리며, 예민한 귀로 오토바이 엔진음과 북소리를 조율한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라는 말이 깃발처럼 휘날리면서 기업들이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 됐다. 그러나 기업은 작품 구입을 포함해 세금 환급을 위해 ‘쌩돈’ 쓰는 것을 ‘후원’이라 생각해왔고, ‘운 좋은’ 작가들은 현수막이나 도록에 기업의 로고를 인쇄했다. 기업과 예술가는 노골적으로 권력 관계에 놓였고, IMF가 닥치자 기업은 가장 먼저 문화 예산을 없앴다.

    작가가 만든 루이비통 가방 ‘불티’

    예술과 상술 ‘행복한 만남’

    무라카미의 체리가 그려진 루이비통 가방과 이동기가 그린 아마조나백(오른쪽).

    그러나 최근 기업과 작가는 서로 동등한 위치에 서려 한다. 심지어 역전의 조짐도 나타난다. 얼마나 창의적인 작가들을 발굴했는가, 그들의 예술적 재능을 얼마나 잘 살려주는가가 세계적 기업으로서 선진성과 경쟁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한 다국적 기업의 홍보 담당자는 “광고보다는 문화 기사를 읽거나 문화 행사에 참여해 소비를 결정하는 소수의 소비자들을 위한 VIP 마케팅에서 예술은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말한다. 그래서 최근 예술가들에 대한 후원은 기업보다 ‘상품’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드라마에서 상품이 노출되는 것처럼 예술활동 속에서 상품의 간접광고가 이뤄진다.



    세계적으로 예술가와 상품이 가장 행복하게 만난 예로는 150년 역사를 가진 루이비통이 2001년 뉴욕의 반항적 아티스트 스티븐 스프라우즈에게 가방을 주고 ‘마음대로’ 그래피티(벽화예술) 작업을 하게 한 것이다. 올해는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에게 체리를 덧그리게 했다. 똑같이 생산된 루이비통 가방이지만 그래피티나 체리는 ‘예술품’이 되어 2배 넘는 가격이 붙었는데도 전 세계적으로 ‘솔드 아웃’됐고 루이비통은 ‘회춘’했다.

    예술과 상술 ‘행복한 만남’

    아모레태평양이 후원한 배병우의 사진집.

    이는 패션 브랜드들이 예술가를 짝사랑하게 된 결정적 사건이 된 듯하다. 우리나라에서도 9월 패션하우스 로에베가 대표 상품인 ‘아마조나백’ 30주년을 맞아 미술, 사진, 무용 등 다양한 장르에서 선정한 30명의 우리 예술가들에게 아마조나백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을 의뢰했다.

    또 구두와 가방으로 유명한 토즈는 인사동의 대안공간 사루비아 다방이 선정한 4명의 작가에게 토즈의 가죽 재료로 작품을 만들게 했다. 김주현 등 작가들은 자신들의 작품 컨셉트를 가죽에 응용한 작품을 제작한 뒤 경매에 부쳐 1600만원의 수익금을 모아 대안공간을 후원했다.

    우리나라에서 예술을 통해 상품의 이미지를 가장 성공적으로 보여준 회사로는 에르메스와 쌈지, 태평양퍼시픽 등이 손꼽힌다.

    세계적 브랜드인 에르메스의 한국 법인인 에르메스코리아는 5년 전부터 에르메스 미술상과 부산영화제에 ‘에르메스와 함께 하는 한국영화 회고전의 밤’을 설치했다. 10월21일 5회 수상자를 발표하고 12월11일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 전시 중인 에르메스코리아 미술상은 불과 5년 만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주목받는 예술상 중 하나가 됐다. 예술계 시상이 주로 ‘공로상’ 성격인 데 비해, 에르메스 미술상은 현재 가장 두드러진 작가들을 대상으로 치열한 논쟁 끝에 결정되기 때문이다. 심사위원으로 방한한 프랑스 디종 컨소시엄 디렉터인 프랑크 고트로 씨는 “프랑스엔 없는, 매우 한국적인 기업의 후원 제도”라고 말하기도 했다.

    에르메스는 2004년 미술상 후보였던 미술그룹 ‘플라잉시티’에 5개 매장 쇼윈도를 맡겨 다시 화제가 됐다. ‘전통’의 에르메스가 아방가르드하고 ‘민중’적인 작가와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아모레태평양·쌈지 활발한 후원

    “전엔 에르메스란 이름조차 알지 못했어요. 에르메스 가방이 아무리 비싸도 그걸 디스플레이하는 길거리의 쇼윈도는 대중적인 미디어라고 생각해 작업을 맡았죠.”(전용석, ‘플라잉시티’ 작가)

    ‘플라잉시티’의 자체 프로젝트 ‘청계천 박람회’를 하면서 만든 합체 금속 로봇으로 에르메스의 가을용 쇼윈도를 만든 그는 정치와 탈정치, 미술과 패션, 고급과 키치를 나누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덧붙였다.

    에르메스는 현재 도산공원 앞에 갤러리와 박물관을 둔 사옥을 신축 중이다.

    아모레태평양은 한국의 미에 천착하는 예술가들을 집중적으로 지원한다. 이 회사는 ‘소나무’의 작가 배병우의 작품을 뉴욕과 서울의 스파 인테리어에 이용하고 최근 그의 대형 사진집 ‘청산에 살어리랏다’를 출간했다. 또 한복 디자이너 이효재 씨의 앞치마전을 열고, 이영희 등 다섯 디자이너들에게는 핑크 리본(유방암 방지 홍보)을 이용한 작품을 만들도록 지원했다. 이효재 씨는 “ 태평양의 최고가 라인 설화수를 상징하는 황금색 앞치마를 제작해 공동 마케팅을 했다. 직접 대중을 만날 기회가 없는 작가에게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예술과 상술 ‘행복한 만남’

    할리데이비슨과 타악기의 협연으로 이뤄진 2005 신차발표회.

    쌈지는 1992년 출범 때 순수 작가의 이미지를 상업광고로 활용하여 예술 마케팅의 충격을 준 회사이며, 이를 바탕으로 성장했다. 지금도 쌈지스페이스, 갤러리쌈지, 쌈지미술창고, 쌤쌤회관 등 순수/ 상업적인 공간들을 운영한다. 미술 작가 최정화와 이불, 음악인 ‘언니네 이발관’ ‘3호선버터플라이’등 유명한 아티스트들이 쌈지의 지원을 받았다.

    쌈지는 ‘터부 요기니’ 시리즈와 이색적인 퍼포먼스로 스타가 된 아티스트 낸시 랭을 아트디렉터로 계약하고, 올해 겨울 ‘낸시랭’이라는 별도의 패션 라인을 출시한다. 우리나라에서 아티스트의 이름을 붙인 첫 번째 브랜드다.

    “제 모든 작품에 루이비통의 이미지가 있어요. 상품에 대한 거부감? 전혀 없어요. ‘낸시랭’이 출시되면 제가 입고, 신고, 드는 것이 작품이 될 거예요. 제가 ‘걸어다니는 갤러리’가 되는 거죠.”(낸시 랭, 아티스트)

    ‘너무나 미국적이고 남성적인’ 상품 할리데이비슨을 판매하는 할리데이비슨 코리아는 신차발표회를 문화적인 이벤트로 만들어왔다. 10월9일 이천 도자센터에서 열린 올해 신차발표회에서는 타악 연주자들과 할리 데이비슨이 협연을 벌여 도심에선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 할리의 엔진음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재기 발랄한 작가 들만 선호 ‘옥의 티’

    10월에 ‘도시의 바이브’전을 연 아트센터 나비의 INP 작가 그룹과 SK라는 기업의 관계도 매우 흥미롭다. INP 작가들은 휴대전화와 GPS, PDA, SMS 등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와 다양한 위치기반 기술을 이용해 사람이 얼마나 즐겁게 ‘노는가’ 보여준다. INP 작가인 양아치 씨는 “엔지니어들이 미디어를 테크놀로지로 접근한다면, 예술가에게 미디어란 곧 ‘태도’와 상상력이다”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전시작인 ‘Shoot me if you can’(작가 최태윤)은 명동 안에서 자기 휴대전화 번호가 쓰인 옷을 입은 게이머들이 돌아다니다가 폰카에 ‘찍히면 죽는’ 게임이다. 대도시와 디카에 대한 욕망, 감시카메라의 폭력성을 드러낸 미술 작품이기 이전에 참여자들이 너무나 열광한 놀이다.

    전시 말미에 열린 워크숍 ‘도시적 유희와 위치기반 미디어’는 미디어아트가 컴퓨터로 ‘요지경’이나 터치스크린 기술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우리들의 오해!) 미디어를 이용한 ‘놀이’임을 보여주었다. 노소영 관장은 “위치기반 미디어를 이용하면 창조적인 방식으로 지리적인 범주보다 더 넓은 네트워킹을 연결할 수 있다. 그것이 ‘함께 놀고 싶은’ 한국인들의 욕구”라고 말했다.

    아트센터 나비는 SK에 속해 있지만 미디어아트 작가와 첨단의 정보들이 이곳으로 수렴하고 있으며, 그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이 SK텔레콤과 SK커뮤니케이션에 신선한 산소를 불어넣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기업이 예술을 사랑하고, 작가가 상품에 뮤즈의 혼을 불어넣어주는 건 삶의 시각적인 풍경을 아름답게 하고, 속도를 최고의 가치로 아는 사회에 제동을 건다는 점에서 ‘거품’이어도 반갑다. 기업의 마케팅 담당자들이 전문적 안목 없이 재기발랄한 작가들만을 선호하다 보니, 역시 ‘주변머리 없는’ 작가들은 또다시 소외된다는 걱정이 들기 시작하지만.

    자기 부서 입장만 고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포’를 겪었던 한 작가는 “그래도 기업이 작가와 일하기로 결심한 마음만은 너무 장하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동의했다. 기업들도 작가에게 지원하는 비용에 비해 상품의 이미지에 미치는 효과는 막대하다는 것을 눈치 챘다. 이것이 유행이 아니라 전환이라는 확신이, 예술가들에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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