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8

2005.11.01

포도주 왕국 2000년 아성 ‘흔들’

프랑스 등 유럽연합, 거센 도전에 직면 … 칠레·미국 등 가벼운 맛·저렴함 무기로 승승장구

  • 파리=홍용진/ 통신원 hadrianus@hanmail.net

    입력2005-10-26 17: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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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도주 왕국 2000년 아성 ‘흔들’

    칠레의 한 와인 제조공장. 대형 나무통 속에서 와인을 숙성시키고 있다.

    진한 에스프레소 커피와 부드러운 감촉의 포도주. 이 두 음료는 프랑스인의 두 가지 정신세계를 반영한다. 커피가 머리를 맑게 해 냉철한 이성을 가다듬어준다면, 포도주는 온몸의 긴장을 풀어주면서 삶의 여유를 선사하기 때문. 이중에서도 프랑스인의 삶에 더 깊이 파고든 것은 포도주라 할 수 있다. 커피가 18세기 중반에 들어와 고작 200년이 넘는 짧은 역사를 가진 반면, 포도주는 2000년 전 로마시대부터 프랑스인들과 함께 해왔다. 그런 만큼 포도주에 대한 프랑스인의 사랑과 자부심은 남다르다.

    이런 포도주 사랑은 프랑스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영국은 프랑스 다음으로 프랑스산 포도주를 즐기는 나라다. 프랑스 남서부 아키텐 지역은 14세기까지만 해도 영국의 영토였다. 중세 영국인들은 이곳에서 생산되는 칼칼한 맛의 보르도 포도주를 무척 즐겼다. 영국은 백년전쟁(1337~1453)에서 패한 뒤 이 지역을 잃었지만 포도주에 대한 사랑만은 여전하다. 영국 다음으로는 미국과 독일이 제2, 제3의 포도주 소비국이며, 프랑스 문화권에 속하는 벨기에가 그 다음을 차지한다. 그리고 최근 포도주에 맛을 들인 일본이 세계 5위의 포도주 소비국으로 부상했다.

    유럽 지역의 상표 붙여 본가 위협

    이처럼 세계적으로 포도주가 소비되면서 포도주 생산지 역시 유럽이라는 테두리를 넘어 확장되고 다각화되고 있다. 기온이 높고 건조한 지역에서 잘 자라는 포도는 원래 지중해 지역의 작물이었다. 지중해 국가들, 특히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포도주는 품질 면에서 프랑스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따라서 프랑스를 포함한 이 세 국가는 ‘유럽연합(EU)’이라는 정치적, 경제적 동맹관계 속에서 세계 포도주 시장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각 지역별 상표에 대한 독점적 사용권과 그에 걸맞은 우수한 품질 확보는 기본. 프랑스는 자국에서의 포도주 소비를 장려하는 차원에서 음주운전 단속도 심하게 하지 않는다.

    프랑스를 선두로 한 유럽연합의 포도주 생산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적으로 독점적 지위를 누려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포도 생산에 최적지인 기온이 높고 건조한 지역이 지중해뿐만이 아니기 때문. 남아메리카의 칠레는 물론 남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캐나다 등 포도 재배에 적당한 기후 조건을 가진 나라들이 포도주 산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미국의 성장은 괄목할 만하다.



    이들 신흥 포도주 생산국들은 주로 대규모 경작을 하기 때문에 가격이 쌀 뿐 아니라 맛과 향도 뛰어나다. 맛의 비결은 향료 첨가와 서로 다른 포도주 간의 혼합을 통해 얻어진다. 물론 유럽의 포도주 제조업자들은 전통 방식으로 세심한 정성을 쏟아 시간의 깊은 맛을 간직한 정통 포도주를 생산하고 있다. 신흥 생산국들의 제조방식은 편법으로 여겨 금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유럽권 지역의 포도주들이 유럽 지역의 상표를 붙이고 포도주 본가인 유럽, 특히 프랑스를 위협해오고 있다.



    포도주 왕국 2000년 아성 ‘흔들’

    프랑스의 한 와인 시음장에서 다양한 와인을 선보이고 있는 소믈리에.

    자국의 포도주 시장을 지키려는 유럽 국가들은 신흥 생산국들의 제조방식과 상표 도용을 계속 문제삼아 왔다. 하지만 신흥 생산국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판매 활로를 모색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9월15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타결된 유럽과 미국 간의 포도주 타협안은 포도주 시장을 둘러싼 분쟁을 일단락 지은 것 같다. 하지만 이는 문제의 해결이라기보다는 두 세력 간의 팽팽한 대결 전선을 확인하는 마지노선처럼 보인다. 타협안의 주요 내용이 현재 미국에서 포도주를 생산하고 있는 17개 거대회사의 제품들에 대해서만 유럽연합이 샹파뉴, 샤블리, 부르고뉴, 포르투 등의 상표 사용권을 인정한다는 제한사항이기 때문.

    일단 유럽연합은 미국의 포도주 생산의 증대를 억제하면서 자신의 시장을 지키는 데 성공했고, 미국은 이른바 ‘짝퉁’처럼 여겨지던 미국산 포도주에 명목상의 정당성을 확보한 듯 보인다. 그럼에도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생산자들은 이 타협안에 대해 마냥 고운 시선을 보내고 있지는 않다. ‘갈로’를 비롯한 17개 거대 포도주 기업들이 이미 프랑스에까지 진출한 데다 이들의 포도주 제조방식 역시 전통 생산자들에게는 영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영어 발음으로 샴페인이라고 하는, 샹파뉴 지역에서 생산되는 ‘샹파뉴’ 포도주를 보자. 수백 년간 내려온 전통적이고도 독특한 제조공법의 샹파뉴 옆에 편법으로 만들었다고 여기는 미국산 샴페인이, 그것도 ‘캘리포니아 샹파뉴’라는 희한한 이름을 달고 판매된다는 사실이 이들에게 기분 좋을 리 없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 특히 프랑스는 포도주 시장의 주도권과 기득권을 얼마나 오래 유지할 수 있을까? 미국 등과 포도주 생산업체의 수를 줄이는 데는 합의했다고 하지만(다른 신흥 생산국들과도 이와 유사한 협정을 맺었다) 일관된 제조방식을 통해 대량으로 생산하는 이들 국가의 포도주는 적어도 중급 또는 하급 포도주 시장은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지역적 특색이 살아 있는 각양각색의 포도주 맛을 자랑해왔다. 하지만 이런 지역적 편차는 생산, 유통의 단일화 및 체계화의 장애요소가 될 수도 있다. 전통적인 깊은 맛과 향, 그 명성을 앞세운 유럽의 포도주와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맛과 향, 저렴함을 내세운 신흥 생산국들 간의 포도주 경쟁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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