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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社참배 거부 18개교 日帝, 가차 없이 폐교

일본인이 쓴 ‘침략신사’ 속 조선의 신사 이야기

神社참배 거부 18개교 日帝, 가차 없이 폐교

  •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가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일본에서 ‘침략신사(侵略神社, 新幹社 발행)’란 제목의 책이 발간되었다. 저자는 즈시 미노루(子實·55) 씨. 그는 서문에서 해외에 있는 신사는 식민정책 시대,정치적 목적으로 창건해 ‘황국신민(皇國臣民) 교육’ 선전의 장소로 이용했으므로 이를 ‘침략신사’로 부른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 가운데 조선과 대만에 있었던 신사 관련 부분을 요약한다.
神社참배 거부 18개교 日帝, 가차 없이 폐교

제3대 조선총독인 사이토(가운데)가 부인과 함께 조선신궁을 참배하기 위해 계단을 오르고 있다.

침략신사는 특히 조선에서 일본의 식민행정, 황민화 정책을 추진하는 데 가장 큰 기능을 발휘했다. 조선에 있는 침략신사의 대표는 1919년 내각 고시(告示) 제12호에 의해 창건된 ‘조선신궁(神宮)’이다.

조선신궁이 세워진 서울 남산은 예로부터 왕성(王城)을 지키는 산이라 벌채가 금지돼 귀한 상록수(常綠樹·소나무)가 많았다. 이곳은 한일강제합방 전인 1908년 당시 일본인 거류민인 이케다 나가지로(池田長次郞) 등이 일본 거류민 등으로부터 조달한 자금으로 조선 정부로부터 약 30만평을 ‘영구임대’ 받아 1910년 5월29일 ‘한양공원’이란 이름으로 개원한 최고의 땅이었다.

조선신궁 창건에 맞춰 조선교육회는 일본 메이지신궁(明治神宮) 창건 때처럼 ‘헌목(獻木) 캠페인’을 벌여 50여만명에 이르는 조선의 소학교·보통학교 생도에게서 5000엔의 헌금을 징수했다. 조선신궁의 원래 명칭은 조선신사였으나 1925년 6월27일 내각 고시 제6호에 의해 ‘조선신궁’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신궁은 아마데라츠오오카미(天照大神)와 메이지(明治) 천황 두 신을 주제신(主祭神)으로 모셨다. 조선 측에서는 조선 신화(神話)상의 시조인 단군을 모셔야 한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으나 신궁 창건 목적이 황국 선전에 있었기 때문에 거절되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신공황후(神功皇后)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등을 제신 후보로 거론하기도 했었다.

신사 강제참배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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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산에 있었던 조선신궁 전경.

1936년 ‘신사규칙’이 제정되면서 조선총독부는 전면적으로 ‘황민화’ 정책을 전개했다. 이에 맞서 신사 강제참배에 대한 저항도 본격화되었다. 이 저항은 평양에 있는 미션스쿨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1935년 11월14일 평안남도 지사인 야스타케 나오(安武直夫)가 도내 공·사립중학교 교장회의를 소집해 평양신사를 참배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대해 미션스쿨인 숭실중학교 교장 매킨 씨와 숭의중학교 교장 스나크 여사 등이 참배 거부를 표명하자, 지사는 ‘참배하지 않으면 천황을 모욕하는 죄가 된다’며 60일의 말미를 주고 이에 따르지 않으면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통고했다.

12월1일자 동아일보는 ‘도(道) 당국 태도 강경, 미션교 재학생 현재 10만, 오노(大野) 학무과장은 국가의식에 참배하는 것은 당연, 폐교도 불사’란 제목의 기사로 조선총독부의 강경한 태도를 보도하고 있다.

12월2일 총독부는 4일로 예정된 히로히토(裕仁) 천황의 차남 명명(命名)식을 기해 신사참배를 거행하도록 통첩을 발령했다. 그리고 그날 신사참배가 불가능한 학교는 교내에서 행사를 가지라고 명령했다. 이에 미션스쿨 측은 교내에서 행사를 거행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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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가 평양(북미) 장로회가 신사참배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개최하려던 집회를 금지하자 매킨 씨 등은 북미장로협의회 집행위원회, 그리고 평양의 27개 교회 목사와 협의해 다시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대해 총독부는 36년 1월 매킨 씨와 스나크 여사의 교장직을 박탈하고 학무국에 사상계를 신설해 단속을 강화하며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학교에 대해서는 폐교를 명하겠다는 방침을 확고히 했다.

총독부가 국제적인 비난을 받을 가능성을 무릅쓰고 강경하게 나온 것은 가톨릭의 신사참배가 한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32년 일본 조치(上智)대학에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 거부운동이 벌어졌을 때 로마교황청은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고 충성과 애국심의 표명이므로 참배해도 좋다’는 통첩을 내렸다. 36년에는 조선에도 똑같은 통첩이 내려졌기 때문 가톨릭계 미션스쿨에서는 이미 신사참배가 행해지고 있었다.

따라서 총독부는 신사를 참배하지 않는 학교에 대해 가차 없이 폐교를 명령해, 1938년까지 북장로파계의 8개교, 남장로파계 10개교가 폐교되었다. 숭실전문학교 등은 이때 완전히 문을 닫게 되었다.

황국신민의 선서와 기독교계의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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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궁 중앙광장에 있었던 ‘도리이’.

1937년 10월 조선의 황국신민 캠페인을 위해 악명 높은 ‘황국신민의 선서’가 제정되었다. 조선신궁 정면에 있는 참배 길 계단 밑에는 돌로 만든 거대한 ‘황국신민의 선서비’까지 세워졌다.

1938년에는 매월 1일을 ‘애국일’[이날은 39년 8월부터 ‘흥국봉공일(興國奉公日)’로 개칭되었다]로 제정해 신사참배와 청소, ‘히노마루(일장기)’ 게양, ‘황국신민의 선서’ 제창, 근로봉사 등의 강제동원이 이뤄졌다.

당시 조선의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신자는 46만명으로 알려졌고, 그중 60% 정도는 장로파 신자들인데 이들은 신사참배에 대해 강하게 저항했다. 때문에 조선총독부는 이 교회에 대해 ‘교회 안에 국기게양탑을 세울 것, 국기에 대해 경례를 할 것, 예배 시 황국신민의 선서 제창을 할 것’ 등을 강요했다.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탄압에 대해 일본의 교계(敎界)는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일본 프로테스탄트 최대 교파의 지도자이고 훗날 일본기독교단 의장으로 선출됐던 일본기독교회대회 의장 도미다 미쓰루(富田滿)는 평양에서 있었던 강연회에서 “국가는 국가의 제사를 국민에게 요구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야스쿠니 신사 공식참배를 추진하는 사람들과 거의 똑같은 말을 했다.

도미다는 조선의 크리스천들이 순교를 각오하고 신사참배에 저항하자, “지금은 그렇게 할 때가 아니다”라고 당국의 대변자 같은 발언을 했다. 그로 인해 조선총독부는 더욱 적극적으로 조선의 크리스천들을 탄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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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지금의 서울) 신사. 남산에서 내려다본 조선신궁(아래).

1938년 9월 평양에서 개최된 제27회 장로파 총회는 결국 “우리는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며 또한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반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인 것을 자각한다. 따라서 신사참배를 솔선수행하고, 나아가 국민정신 총동원 운동에 참가한다”는 성명을 내기에 이르렀다.

광복 후 조선민중들이 신사 불태워

1945년 8월15일 패전을 맞았을 때 조선총독부가 가장 걱정한 것은 천황의 공식사진인 ‘어진영(御眞影)’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와 ‘신사’의 존엄 유지였다. 그러나 조선민중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패전 당일인 15일 바로 평양신사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을 시발로 16일에는 정주(定州)신사, 안악(安岳)신사, 온정리(溫井里)신사 등이 화염에 싸여 파괴되었다.

8월16일부터 여드레 동안에는 신사와 학교에 ‘어진영’을 봉안(奉安)하기 위해 특별히 세워놓은 봉안전에 대한 방화 파괴가 무려 136건에 이르게 되었다. 8월17일 조선신궁은 총독부 마지막 비행기에 ‘어영대(御影代·거울)’를 실어 일본 궁중으로 가져갔다. 그 후 이러저러한 형태로 ‘침략신사’의 ‘어영대’가 일본으로 돌아왔다. 일본으로 옮겨온 제1호 어영대는 조선신궁의 것이었다.

이후 총독부는 사전(社殿)의 소각명령을 내려 신궁 소각을 개시했다. 그런데 우연히 소각 과정에서 일어난 연기를 목격한 한국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미 육군 24군단장)이 군정장관 아놀드 소장(미 육군 7사단장)을 신궁에 파견해 소각중지 명령을 내렸다.

이에 신궁 측은 ‘신궁 신사는 종교적 전당이 아니라 황실의 조상과 공로가 있는 일본인에 대해 존신존엄의 염(念)을 표하는 곳이다. 이 건물들은 일본인을 위해 지은 것으로 조선과는 관계없다’는 거짓말로 설득해, 주한 미군정청의 허가를 얻어 소각을 재개했다.

9월21일 미 군정청은 일반명령 제5호로 신사에 관한 규정을 폐지하고 신궁 신사의 재산을 접수했다. 이에 각 신사는 미 군정청에 재산목록 등을 제출함으로써 신사 신궁의 토지와 건물은 미 군정청에 완전 접수되었다.

대만의 침략신사

일본은 아시아 각지를 침략하면서 많은 침략신사를 세웠는데, 이때 가장 먼저 세운 침략신사가 ‘대만신궁’이었다. 대만의 침략신사에 관해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기타시라가와 노미야요시히(北白川宮能久,1847~95). 그는 ‘친왕(親王)’이라는 별호로 존칭되는 인물인데 제2차세계대전 전에는 수신(修身·도덕) 교과서에도 등장한 적이 있다. 지금은 말을 타고 있는 그의 동상이 도쿄(東京) 치요다(千代田)구 기타노마루 공원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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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대구에 설치한 대구신사.

그는 메이지유신 후 육군호산(戶山)학교를 졸업하고 1892년 제4사단장과 6사단장(중장, 한국군으로 치면 소장)으로 청일전쟁에 종군했다. 1895년 4월, 청일전쟁을 종식하는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대만을 할양받아 대만을 무력진압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대만으로 건너갔다가 10월28일 대남(臺南)이라는 곳에서 ‘전병사(戰病死)’했다.

황족이 해외에 처음으로 나갔는데 ‘전병사’까지 하자 메이지 정부는 다음해 2월 그를 육군대장으로 추서하고 국장을 치러주었다. 그리고 1901년 대만신궁을 지으면서 그를 제신(祭神)으로 모셨던 것이다.

일본은 1945년까지 대만 이외의 여러 곳에 침략신사를 지었다. 이때 대만 건너편에 있는 중국 복주(福州)의 신사도 기타시라가와를 제신으로 모시게 되었다.

대만 총독부는 대만 침략의 상징인 기타시라가와를 모신 대만신궁을 중심으로 ‘황민화’교육을 계속해 갔으므로, 1945년까지 이 신궁은 대만의 황민화 정책 상징물로 자리 잡았다.

주간동아 2005.11.01 508호 (p40~42)

  • 이수항/ 동아일보 심의팀 부장 doldol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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