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4

2005.10.04

불교 장례법 바꾼 ‘수덕사 쇼크’

법장 스님 법구 기증 엄청난 충격파 … 滿空 스님 부도 금지 이어 새 전통 생기나

  •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입력2005-09-28 14: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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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 장례법 바꾼 ‘수덕사 쇼크’

    9월17일 수덕사에서 열린 법장 스님 천도재.

    법장(法長, 1941~2005) 스님 쇼크. 9월11일 조계종 총무원장을 하다 열반한 법장 스님의 시신 기증이 불교계를 크게 흔들어놓고 있다.

    1994년 법장 스님이 생명실천나눔본부를 세워 장기와 시신 기증 운동을 펼쳐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스님은 당연히 시신 기증을 약속했고, 사후 자신이 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것을 염려한 듯 유언장에 또 한번 시신 기증을 밝혀놓았으니, 그의 열반이 시신 기증으로 이어진 것은 당연지사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여야 했던 불교계의 충격은 만만치 않아 보인다.

    법장 스님을 따라 시신 기증을 약속한 불교신문 주간 정범 스님의 말이다.

    “1700년 한국 불교를 관류해온 풍습 중의 하나가 다비식이다. 다비식이 끝난 뒤 뼈를 찾는 습골(拾骨)과 뼈를 빻는 쇄골(碎骨)을 한 후 사리를 수습하는 것은 한국 불교의 큰 전통이었다. 이렇게 수습한 사리로 부도를 세워놓았으므로, 1000여년 전 불교문화를 알려면 그 시절에 세워진 부도를 살피는 것이 한 방편이었다.



    “법장 유지 실천 적잖은 진통”

    장기 기증은 장기를 적출한 뒤 남은 시신이 돌아오지만, 시신 기증은 모든 것을 던진 것이라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는다. 평생을 수도한 스님들은 유언무언으로 다비식을 이생의 삶을 공(空)으로 돌리는 마지막 의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스님의 열반은 이마저도 공으로 돌려놓았다. 스님의 법구(法軀·스님의 시신)를 기증하는 데는 적잖은 진통이 있었다.”

    진통은 법장 스님이 평생을 보낸 충남 예산군 덕산면 덕숭산에 있는 수덕사에서 강하게 일었다고 한다. 수덕사는 근세 불교의 선풍을 일으킨 경허(鏡虛, 1849~1912) 스님과 그의 수제자인 만공(滿空, 1871~1946), 혜월(慧月)과 수월(水月) 스님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자, 해외 포교에 주력하다 지난해 열반한 숭산(崇山, 1927~2004) 스님의 다비식이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다. 1920년 김원주(金元周)라는 속명으로 여성잡지 ‘신여자’를 창간해 여성해방 운동을 일으키고 1927년엔 언론에 ‘나의 정조론’ 등을 발표해 자유연애를 부르짖다 문득 덧없음을 깨닫고 만공 스님을 찾아가 출가한 뒤, ‘청춘을 불사르고’라는 제목으로 30년간의 구도기를 펴내 화제를 모았던 일엽(一葉, 1896~1971) 스님의 유품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불교 장례법 바꾼 ‘수덕사 쇼크’

    만공 스님의 유훈을 기린 만공탑과 한국 최초의 비구니 선원 ‘견성암’을 가리키는 푯돌.

    일엽 스님이 계셨던 수덕사 견성암은 한국 최초의 비구니 선원이다. 세속적으로는 1966년 송춘희 씨가 부른 절세의 가요 ‘수덕사의 여승’으로 이 절은 더욱 유명해졌다. ‘속세에 맺은 사랑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 홀로 울 적에/ 아~ 수덕사에 쇠북이 운다’는 애절한 가락 때문에 속인들은 감동했지만, 이 절의 스님들은 수행에 방해가 된다며 강한 거부감을 표현한 바 있었다.

    법장 스님에겐 상좌 스님으로 불리는 50여명의 제자가 있다. 피를 나눈 바도 없지만 인연의 법 때문인지 승가(僧家)에서의 스승 제자 관계는 속세의 부자 관계 이상으로 끈끈하다. 돌아가신 분이 생전에 어떤 약속을 했더라도, 사후엔 살아 있는 가족들이 그의 시신에 대한 결정권을 갖는 것은 세속뿐만 아니라 승가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불문율이다.

    법장 스님의 영결식이 수덕사에서 치러졌다면 상좌 스님들의 분위기 때문에라도 다비식이 열렸을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총무원장을 하다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영결식은 조계종단장으로 서울 조계사에서 치러질 수밖에 없었다. 수덕사 상좌 스님들도 상주이지만 총무원 관계자들도 상주가 된 것.

    명분이냐 도리냐? 스님이 타계한 이튿날 총무원에서는 스님의 유지를 받들 것이냐를 놓고 회의가 열렸다. 회의에는 스님의 상좌인 정묵(正默·갓바위 주지) 스님도 참여했는데, 회의에서 내린 결정은 스님의 유지를 따르자는 것. 정묵 스님은 의지를 갖고 이 결정을 후배 상좌들에게 전파했다.

    스님과 불자들도 앞다퉈 시신 기증

    불교 장례법 바꾼 ‘수덕사 쇼크’

    사후 시신 기증을 약속하고 열반한 법장 스님영정.

    그리고 법장 스님의 사형이자 조계종 종회의장(국회의장에 해당함)을 지내고 수덕사 수좌(부방장)를 맡고 계시는 설정(雪靖) 스님, 2003년 새만금 갯벌을 지키기 위해 3보1배 고행을 한 수경(收耕) 스님 등 원로들이 시신 기증을 지지하면서, 한순간에 대세가 기울어졌다. 그 후 여러 스님과 불자들이 앞다퉈 시신 기증을 서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고 한다.

    관계자들은 상좌 스님들이 법장 스님의 시신 기증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데는 수덕사가 갖고 있는 독특한 사풍(寺風)이 일조했다고 지적한다. 수덕사뿐만 아니라 한국 불교를 크게 진작시킨 만공 스님은 경허 스님을 계사(戒師·계법을 일러주는 스님)로 삼아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萬法歸一 一歸何處)’라는 화두로 참선하다 1895년 “법계의 본성을 관찰하여야 한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는 게송을 읊으며 홀연히 깨달았다고 한다.

    그 후 수덕사에 거처한 만공 스님은 부도를 만들지 못하게 했다. 다비식 후 수습되는 사리의 다과(多寡)에 따라 돌아가신 분의 깨달음 정도를 가늠하는 것은 또 다른 상(相)을 낳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만공 스님 역시 입적 후 사리를 수습하지 않았는데, 후인들은 사리조차 남기지 않고 그야말로 ‘만공(滿空)’으로 돌아간 스님을 기리기 위해 만공탑을 만들었다. 이것이 수덕사의 전통이 돼 지난해 이 절에서 열린 숭산 스님 다비식 때도 역시 사리를 수습하지 않았다.

    법장 스님의 법구 기증은 만공 스님의 원력에 또 한 보를 내딛게 한 의미가 있다.

    다비식은 불교 고유의 전통인 것 같지만, 사실은 불교가 개창되기 전부터 인도에서 행해온 장례법이다. 다비(茶毘)는 시신을 태운다는 뜻을 가진 고대 인도어를 음역한 것. 이 장법(葬法)에 따라 석가모니도 유체를 화장했는데, 이것이 불교도 사이에 널리 퍼지고, 한국·중국·일본에까지 전해져 고유한 불교문화가 되었다.

    법장 스님의 열반을 계기로 한국 불교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의 새 전통을 세울 수 있는 계기를 맞았다. 이러한 계기가 이어져 나갈 것인가. 반야심경은 이러한 후렴구를 세 번 반복하며 마무리한다.

    “아제 아제 바라 아제 바라 승아제 모지 사바하(가자 가자 저 건너 언덕으로. 우리 모두 피안으로 건너가 영원한 깨달음을 얻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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