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3

2005.09.20

“액션과 사랑 … 양날의 칼 잡았죠”

  • 입력2005-09-14 11: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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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액션과 사랑 …     양날의 칼 잡았죠”
    하지원은 원래 하지원이 아니다. 전해림이 본명이다. 1998년 ‘진실게임’으로 데뷔한 뒤 얼마 안 돼 그녀는 한국 여배우의 중심축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지난해 봄, 그녀를 인터뷰하기 위해 간 남산 서울예대에서 그녀보다 먼저 만난 사람은 이명세 감독이었다. 그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서 여기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형사’ 대본 리딩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형사’에 하지원이 캐스팅된 것을 알았다.

    하지원은, 전도연도 그렇지만, 특별히 미인이라고 부르기에는 평범한 얼굴에 속한다. 그러나 좋은 배우들이 그렇듯이 카메라의 빨간 불이 들어오면 그들은 돌연, 전혀 다른 인물로 변신한다. 앞에서 수다 떨고 커피 마시던 사람이 아닌 것이다. 배우들이 카메라 앞에서 자신이 아닌 낯선 모습으로 변신하는 것을 보면, 배우란 신에게 도전하는 거의 유일한 인간의 직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객을 사랑하는 형사 역 … 복잡한 감정 표현 무난히 소화

    ‘형사’에서 남순 역을 맡은 하지원은, 방학기의 같은 원작을 TV 드라마로 만들었던 ‘다모’에서 그녀가 맡은 배역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똑같은 작품의 똑같은 배역을 TV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로 해석한 것은 물론 감독의 생각이지만, 그것을 표현한 사람은 배우 하지원이다. ‘형사’의 남순은, 감성적이었던 ‘다모’의 채옥과는 다르게 외향적이고 껄렁하다. 마치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박중훈 캐릭터의 여자 버전 같다. 팔자 걸음걸이에 욕지거리를 내뱉고 얼굴을 심하게 일그러뜨리는 그녀지만, 적인 줄 알면서도 ‘슬픈 눈’이란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해야 했다.

    “드라마 ‘다모’에 대한 부담감을 안 가질 수 없었는데 영화 찍으면서 잊어버렸다. 촬영하면서 그런 부담감은 어느덧 사라져버렸다. ‘다모’의 캐릭터와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은 보는 분들이 느끼시는 게 정확하다.”



    이명세 감독의 ‘형사’는 방학기의 같은 원작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비주얼한 측면에서 ‘다모’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빚어낸다. 이명세 감독은 스타일리스트로서 자신만의 독특한 비주얼을 만들어냈고, 그 결과 작품의 내러티브는 많이 축소되었다. 대중 속에 숨어서 활동하는 여포교 남순이 역모를 꾀하는 병조판서의 자객 슬픈 눈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진다는 간단한 내용이지만, 이명세 감독은 내러티브 자체의 견고함보다는 비극적 사랑에 빠지는 남녀의 감성을 복고적 세트를 배경으로 화려하게 펼쳐 보인다.

    “영화 속의 남순이라는 캐릭터는 감독님이 하나씩 만들어줬다. 남순의 독특한 걸음걸이나 표정, 그런 것들을 내 안에서 뽑아내 주었다. 도입부의 장터 신은 마지막에 촬영해서 큰 도움이 되었다.”

    “액션과 사랑 …     양날의 칼 잡았죠”

    한국 영화계의 중심으로 성장한 하지원의 새 영화 ‘형사’, ‘내 사랑 싸가지’,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형사’ 도입부의 장터 신은 이명세의 화려한 영화적 기교가 빛나는 명장면이다. 복잡한 장터 신은 소매치기들과 포교들, 그리고 장터의 건달들이 뒤섞이며 뛰고 달리는 역동적 장면들로 연출되었다.

    “액션연기를 하면서 서러운 점도 많았다. 여자는 신체구조상 꽉 끼는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에 보호대를 넣을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너무 힘들어서 나중에는 보호대 대신 생리대를 팔꿈치 등에 넣어서 몸을 보호했다. 액션 연기는 체력을 많이 소모하기 때문에 장어 같은 보약도 먹었다.”

    하지원은 우아한 액션 동작을 위해서 선무도와 탱고를 배웠다. 물론 이명세 감독의 권유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근육을 단련시켜 남자 체형으로 바꿔나갔다. 영화 찍다 보니 다리에 알통도 생겼다.

    ‘형사’통해 진정한 연기에 눈떠

    “가장 연기하기 힘들었던 장면은 동료들이 죽어서 남순이 슬픈 눈을 찾아가는 신이었다. 시나리오 볼 때부터 가장 막막한 장면이었고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걱정이 많았다. 그 신을 찍기 전, 감독님과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발에 돌을 달고 걸어가는 느낌의 걸음걸이로 결정했다. 내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술 한잔 먹고 할까 하고 감독님이 말씀하시기도 했다. 그 장면에서 남순의 감정 변화가 너무 심하다. 사랑하는 감정, 슬픈 감정, 슬픈 눈을 죽이고 싶은 감정들이 뒤섞여 있다.”

    ‘형사’ 시사회에 나온 하지원은 영화 속에서 누더기 옷을 입은 것과는 다르게 흰색 블라우스에 검은색 슬랙스 정장을 입고 있었다. 머리를 뒤로 묶고 마이크를 잡은 그녀는 “어젯밤 불안해서 술 한잔 했더니 오늘은 마음이 조금 편하다.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봐주셔서 감사하다”고 솔직하게 인사를 했다.

    모든 배우들이 그렇지만, 가장 힘든 순간은 자신이 출연한 영화가 개봉되기 직전이다. 밤을 새워 힘들게 시험공부를 한 뒤 시험을 치르기 직전의 긴장감이 엄습하는 것이다. 하지원도 그랬다. 그녀가 한 사람의 배우로서 성장한 것은, 공포 영화를 통해서였다. 하지원의 별명은 한때 호러퀸이었다. 안병기 감독의 ‘가위’(2000년)와 ‘폰’(2002년)을 통해 그녀는 흥행배우로 발돋움했고, 임창정과 공연한 ‘색즉시공’(2002년)은 코미디 장르에서도 그녀가 통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역전에 산다’ ‘신부수업’ ‘키다리 아저씨’ ‘내 사랑 싸가지’로 이어지는 그녀의 선택은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작품을 고르는 안목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녀는 상업적이면서도 흥행하지 못하는 작품에만 연이어 출연했다. 하지원 자신의 안목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매니지먼트에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므로 이명세 감독의 ‘형사’는 하지원 본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명세 감독님과 작업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너무 영광이었다. 까다롭다는 소문을 많이 들었는데, 작업하면서 실제로 힘들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아주 좋은 경험이었다. 혼자 울기도 하고 많이 속상하기도 했는데, 감독님이 설명하는 남순이라는 캐릭터를 내 자신이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형사’는 내 개인적 발전을 위해 많은 도움이 된 작품이다. 엄청나게 많은 공부가 된 영화다. 작업하게 되어 너무 즐거웠다. 상투적인 표현으로 즐거운 게 아니라, 나도 몰랐던 내 자신의 얼굴, 그것을 감독님께서 뽑아주는 일들이 너무 즐거웠다. 촬영이 끝난 뒤 집에 가서도 나는 남순의 걸음걸이를 몇 가지씩 개발하기도 했다. 다음 날 그것을 감독님이 보고 그중에서 하나를 뽑아주셨다. 그것이 영화 속에 등장한 남순의 독특한 걸음걸이다. 고생도 엄청나게 했지만 개인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영화였다.”

    이제 그녀는 백지수표처럼 다음 작품을 기다리고 있다. 실제로 어떤 영화 제작자들은 그녀를 캐스팅하기 위해 백지수표를 보낸 적도 있다. 최근 하지원은 태원 엔터테인먼트의 정태원 대표이사가 스펙트럼DVD의 경영권을 인수할 때 함께 매입한 지분을 매각해서 10억원이 넘는 시세차익을 챙겼다. 물론 그녀 자신이 직접 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그녀의 행보는 지나치게 상업적 흥행을 의식하는 작품 선택과 맞물려서 배우로서 성장하는 한계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나는 그녀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흥행배우로서뿐만 아니라 좋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연기자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내 바람이 그녀에게 전달되기는 힘들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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