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3

..

“울퉁불퉁 송편에도 情은 듬뿍”

음식 장만 힘들어도 설레는 추석 … 고향 생각·편견 어린 시선엔 서글픔 들기도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5-09-13 16:3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울퉁불퉁 송편에도 情은 듬뿍”

    외국인 주부를 대상으로 전북과학대에서 열린 차례상용 나물 만들기 강의. 여느 실습 강의보다 질문도 많고, 웃음도 많이 터져나왔다.

    9월7일 전북 정읍시 전북과학대학의 한국음식 실습실. 우리 민족의 명절 추석을 앞두고 최옥범 교수와 남상명 교수(호텔조리영양 계열)가 정읍에 살고 있는 국제결혼한 외국인 며느리들을 대상으로 차례상용 나물 만들기를 가르치느라 열을 올리고 있었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시끌벅적한 말소리에 명절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른들은 도라지나물을 약간 굵게 하는 걸 좋아하세요. 서울은 기름을 많이 써서 윤기를 내지만, 이 지방에선 담백하게 물을 넣어 볶아요.”(남상명 교수)

    “교수님, ‘탕근’ 좀 썰어넣으면 어때요, 예쁘게?”(비다, 필리핀)

    “평상시 먹을 땐 당근 넣어도 좋고 고추장에 무쳐도 맛있지만, 차례상 나물은 깨끗한 색으로 만들어야 해요.”(남 교수)

    “조상님 좋아하시는 대로 해야 하는 거죠? 생선 놓을 땐 배를 앞으로 놓고요.”(비다)



    “필리핀엔 고사리 없는데, 나중에 비빔밥 만들면 맛있어요.”(비칠리아, 필리핀)

    16만여명의 외국인 배우자 거주

    남 교수가 숟가락을 들어 한국 음식은 그 안에 오를 만큼 작게 만드는 것이 원칙이라고 말하자 외국인 주부들은 “왜 삼겹살은 상추에 싸서 커다랗게 먹느냐. 한국에 와서 놀랐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사이 일본 여성 다케시다 미사코 씨는 예쁜 글씨로 고사리나물 무치는 법을 노트에 적었고, 또 다른 일본 여성 고토리카 씨는 꼼꼼히 숙주를 다듬었다. 전북과학대에서 일본어 강의도 하는 고토리카 씨는 “시댁이 경상도인데 생선음식은 맛있지만 고춧가루를 너무 많이 넣는다. 그래도 추석은 다 같이 모여 맛있는 것을 먹어서 좋은 날”이라고 미소를 짓는다.

    한국에서 산 지 짧게는 한 달에서 10년 된 한국의 외국인 ‘며느리’들의 추석맞이는 한국 여성들과 똑같이 바쁘고 분주했다. 그러나 한국의 전통 음식과 차례상을 준비하는 열정에는 한국 사람의 심성을 넘어서는 뭔가가 있다.

    한국 사람들이 의무로 여기는 음식 준비지만 이들의 차례 음식 배우기에는 다른 나라 문화에 대한 존중과 호기심이 더해져 있다. 이들은 ‘어동육서’나 ‘홍동백서’처럼 한국인들이 입으로 외우는 진설(進設)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했다. 가톨릭 신자인 필리핀 주부들은 “종교 때문에 차례 지내는 데 거부감이 없느냐”는 질문에 “추석 차례는 한국 문화일 뿐, 괜찮다”고 입을 모았다.

    보건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에는 약 16만명의 외국인 배우자들이 살고 있으며, 이 숫자는 매해 크게 늘고 있다. 한국인과 외국인의 결혼은 이미 전체 혼인 수의 8%를 넘어섰을 만큼 일반적인 형태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울퉁불퉁 송편에도 情은 듬뿍”

    한국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 주부들이 송편을 먹으며 추석 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아직까지 한국 남성과 결혼한 외국인 여성들이 훨씬 많아 국제결혼 세 커플 중 둘은 외국인 주부들이며, 많은 수가 서울 및 경기도 지역과 농업 인구가 많은 호남 지역에 사는 것으로 파악된다. 해운업을 기반으로 하는 도시에는 옛 러시아연방에서 온 여성들이 국제결혼한 경우가 많다.

    농업 인구가 많은 정읍에는 한국 남성과 국제결혼을 한 외국인 주부 143명이 산다(2004년 말 현재). 중국, 필리핀, 일본, 베트남, 대만, 태국 등 국적도 다양하다. 2002년 처음 외국인 주부들을 위해 한국 음식 만들기 강의 프로그램을 시작한 최옥범 교수는 “외국 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언어와 음식이다. 특히 국제결혼으로 혼자 우리나라에 오게 되면, 외로움도 큰 문제가 된다. 비슷한 처지의 주부들끼리 한국 음식을 만들어 나누어 먹으면 빨리 한국 문화에 적응도 하고, 심리적 안정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해 프로그램을 시작했는데 반응이 아주 좋다”고 말한다.

    97년 한국 남성과 결혼해 서울에서 살고 있는 일본 여성 우사미 요오코(39) 씨는 남편뿐 아니라 한국 문화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어 명절을 맞는 마음도 남다르다. 남편이 주요무형문화재인 전남 임실필봉굿 서울전수단 단장인 이정우 씨로 이 씨가 일본 유학 때 만나 함께 풍물을 배웠고, 우사미 씨는 한국에 온 뒤 전북대 한국음악과에서 수학했다. 웬만한 한국 사람보다 한국의 문화와 정신에 대해 해박할 수밖에 없다.

    우사미 씨는 한국에 온 뒤 추석과 설에 시댁 가는 일을 거른 적이 없다. 연애를 할 때도 명절 때는 예비 시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대학 강사인 그는 두 아들과 함께 올해도 일찌감치 집 근처 대형할인매장에서 명절 장보기 준비에 나섰다. 제법 추석 분위기가 느껴져 그는 벌써 마음이 설렌다고 말한다.

    “시댁이 전남 고흥의 거금도라는 섬이라 기차, 버스, 배를 갈아타야 하는 먼 길이죠. 명절 땐 그 점이 가장 힘들어요. 외국인이긴 하지만 명절 땐 한국 여성들이랑 똑같다고 생각해요. 결혼 때 양가에서 반대가 있었지만 지금은 시댁과 시가 친척들이 무척 친절하세요. 일본엔 이렇게 많은 식구들이 모이는 일이 거의 없어서 더 재미있습니다.”

    “늦게 나타나는 얌체 동서 때문에 화나요”

    아무래도 우사미 씨는 제상 차리기가 서투르기 때문에 서울에서 고기, 한과 등 재료를 사가고, 제사 음식 만들기는 시어머니가 맡아서 하며, 온 식구들이 모여 송편을 만드는 것으로 규칙을 만들었다. 우사미 씨는 시골집의 재래식 부엌을 결혼 전에 입식으로 수리를 한 것도 외국인 며느리에 대한 배려일 것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다.

    “울퉁불퉁 송편에도 情은 듬뿍”

    시누이가 준 한복을 입고 추석을 맞을 예정인 예리나 씨와 남편 양영철 씨. 함께 동물병원을 하는 의사 부부다(위). 국악을 하는 한국 남편과 결혼해 한국에서 살고 있는 우사미 요오코 씨가 두 아들과 함께 시댁에 가져갈 선물을 고르고 있다.

    최근 ‘예리나’라는 이름으로 연예 활동을 시작한 에고로바 엘레나(29) 씨도 타슈켄트에서 우리나라로 시집와서 네 번째 추석을 맞는 외국인 며느리다. 예 씨는 2001년 타슈켄트 의대에 재학 중이었는데, 당시 인제 의대 교수로 타슈켄트에 온 남편 양영철 씨의 통역, 번역 일을 하면서 사랑에 빠져 결혼해 우리나라로 오게 됐다.

    “친정에서 많이 반대했어요. 그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가 고집을 꺾고 저한테 지셨지요. 지금 나는 행복하지만, 어머니 혼자 타슈켄트에 계신 것이 가장 마음 아픕니다.”

    원래 교수였던 남편은 결혼 후 평소 좋아하던 동물들을 고쳐주고 싶다며 부산에 ‘캐츠 앤 독’이라는 동물병원을 냈고, 예 씨도 거기서 함께 일한다. ‘캐츠 앤 독’은 유기견들을 돌보는 병원으로 유명한데, 이것은 예 씨가 시작한 일이다.

    얼마 남지 않은 이번 추석은 예 씨 부부에게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예 씨가 연예 활동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시아버지에게 고백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예 씨는 류승범, 황정민 등이 출연하는 새 영화 ‘사생결단’에 캐스팅이 결정됐다. 예 씨는 “집이 있는 부산에서 100% 촬영하는 것이라 쉽게 출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추석 준비 걱정 안 해요. 제가 맏며느리지만 시누이 한 분, 시동생 한 사람(?)과 사이가 좋고 시아버지가 저를 좋아하세요. 명절 때도 시어머니가 안 계시지만 무리하지 말라, 제상 따로 차리지 말라고 계속 말씀하세요. 친척들이 다 같이 모여 이야기하고 노는 것이 참 재미있어요. 친척들이 하라는 대로 해요.”

    예 씨는 시누이한테서 받은 한복을 입고 “너무 예쁘다.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즐거워했다.

    서울 대림동 한국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외국인 주부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산 기간이 짧아 초보 주부 역할하랴, 한국어를 배우며 한국 문화에 적응하랴 힘든 적응 기간을 보내고 있었다. 수업이 끝난 이들은 모처럼 센터 1층에 있는 카페에 모여 송편을 나눠 먹으며 추석 준비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한국에서 처음 추석을 맞는다는 한 여성은 “송편은 어떤 소스에 찍어 먹느냐?”고 물어 다른 주부들이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우리 시댁은 전라도 김제라서 멀어요. 전에는 혼자 음식 차렸는데 지금은 동서랑 해요.”(라켈)

    “우리 시댁도 전라도 부안입니다. 결혼한 지 3년 됐는데 명절 때 꼭 가요. 올리브유를 선물로 사갖고 가서 다 같이 전을 부쳐요.”(에디타)

    대부분 신혼이거나 갓난아이를 둔 이들은 한국인 남편과 지내는 일은 어렵지 않지만, 친척들이 모이면 ‘동서’ ‘형님’들과의 관계가 아직도 ‘어지럽다’고 말했다.

    “울퉁불퉁 송편에도 情은 듬뿍”

    전북과학대에서 열린 차례상용 나물 만들기 강의에서 실습 중인 외국인 주부 고토리카 씨와 비다(오른쪽) 씨.

    한국어 수강생들 중 막내인 체리(22) 씨는 “필리핀 엄마가 매일 전화해서 오늘은 김치 했냐고 물어본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고춧가루가 매우니 담그지 마, 하시며 만들어주신다. 명절 때도 어렵지 않다. 시어머니가 50대로 젊기 때문에 잘 이해하신다”고 말해 부러움을 샀다.

    외국인 며느리들은 한국 며느리들보다 더 한국적이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추석을 준비하지만, 이들이라고 해서 ‘명절 신드롬’이 피해가진 않는 듯했다. ‘명절 신드롬’이야말로 한국 며느리들의 정체성인지도 모른다.

    한 태국 여성은 “동서들이 음식 다 됐을 때 집에 와서는 차례 지내고 음식만 싸가지고 다들 가버린다. 태국에서도 파티를 자주 열지만, 다 같이 음식 만들고 다 같이 정리하는데 여긴 안 그렇다. 그럴 때 화가 난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또 다른 필리핀 여성은 “한국 음식은 손이 많이 간다. 명절 때 많은 음식을 혼자 하다 보면 친정 생각이 많이 난다”면서 “명절엔 돈도 많이 들어간다. 나는 맏며느리인데 명절 때 우리만 돈을 많이 써서 남편과 자주 싸운다”고 말했다.

    그러나 외국인 며느리들의 ‘명절 신드롬’에 더 깊은 시름을 짓게 하는 것은 성탄절이나 새해맞이 같은 고국의 큰 명절에도 친정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많은 외국인 며느리들이 몇 년 동안 고국에 가보지 못한 것이 ‘한국인과 결혼해 가장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 한 필리핀 여성은 “지난 7년 동안 한 번도 고향에 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조선족인 김성화(28) 씨는 “아들 둘 낳고 사니 여기가 내 집이다 생각하고 살지만, 시댁 식구들이 많이 모여도 난 찾아볼 친척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명절이 더 서글퍼질 때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 남편들 “아내 부담스러워할까” 조심

    또 우리나라에 유달리 강한 ‘단일민족’ 정서 때문에 국제결혼을 한 외국인 며느리들은 상처를 받는다. 특히 동남아인들에 대한 한국 정부의 처우와 한국인들의 무례한 시선에 분노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한 필리핀 여성은 “왜 필리핀 사람이 한국에서 사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내 남편이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한국에 사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너 가난하구나, 돈 때문에 한국 사람과 결혼했구나’라고 말한다. 명절 때 시댁에 가면 시댁 식구나 이웃들 중에도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 명절 때 일도 힘들지만, 그런 질문 때문에 더 화가 난다”고 말했다.

    현실을 들여다보면, 한국어나 한국 음식을 열심히 배워 명절을 준비할 수 있는 외국인 주부들이나 전문직을 가진 외국인 주부들은 전체 국제결혼 주부 중 소수이고, 매우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

    대부분은 국제결혼에 대한 한국 사회의 편견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는 일조차 꺼려한다. 실제로 몇몇 여성은 인터뷰 약속을 한 뒤에 ‘남편과 시댁에서 절대 얼굴을 내놓지 말라고 했다’며 숨어버리기도 했다.

    또한 국제결혼이 급격히 늘어나지만 이들에게 체계적으로 한국어나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기관은 전무하다. 전북과학대 남상명 교수는 “한국 음식 강의를 준비하면서 국제결혼 주부가 이렇게 많은데, 한국 음식을 강의하는 프로그램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놀랍고 안타까웠다”고 말한다.

    한국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에서 상담교육을 하는 손호영 씨는 “국제결혼한 외국인 주부들이 한국 문화를 배우려는 열의는 놀랄 정도다. 아이들을 완전한 한국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 자신이 먼저 한국 문화를 익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외국인 여성과 결혼한 한 한국 남성은 “아내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명절 땐 아예 교회에 간다. 국제결혼한 외국인 여성들이 우리 문화와 언어를 빨리 익히고 사회적으로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공적 기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국을 떠나 멀리 한국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 ‘한국 며느리’들은 ‘혼자 알아서’ 살림을 꾸려가야 하는 탓인지 여느 나라의 여성들보다 현명하고 용감한 듯하다. 필리핀 여성 비다는 “TV 보고 시장에서 사먹으면서 송편, 부침개, 잡채 맛을 혼자 연구해 추석 때 차례상을 차렸다. 이젠 친척들도 맛있다 하고 다른 친구들에게 가르쳐준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낸 한 일본인 주부는 이렇게 말했다.

    “명절 때 짓궂은 친척들은 독도가 어느 나라 땅이냐고 묻기도 해요. 그럴 때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대답해요. 추석도 ‘우리 명절’이고요. ‘독도는 우리 땅’, ‘추석은 우리 명절’, 맞지요?”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