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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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소 침묵에 국정원 떤다?

도청 자료 사용처 그만이 알아 … 장세동, 박지원 섞어놓은 한국형 보스 스타일

  •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입력2005-08-18 17: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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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정소 침묵에 국정원 떤다?

    김현철 씨(왼쪽)와 오정소 전 안기부 1차장.

    1995년 2월27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 쫛쫛호실. 2개의 룸이 하나로 연결된 방에서 문민정부의 실세 김현철(김영삼 전 대통령 아들) 씨와 김기섭(당시 안기부 운영차장) 씨가 한 낯선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조금 후 낯선 남자가 “앞으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며 현철 씨에게 인사를 했다. 다른 룸의 열린 문으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박경식(G남성비뇨기과 원장) 씨는 ‘저 사람이 누굴까’라고 생각했다. 박 씨는 8월11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10년 전 상황을 재구성했다.



    “문을 열어놓아 그들이 있는 곳이 훤히 보였다. 대화를 나누다가 낯선 남자가 현철 씨를 향해 상체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당시 나는 인사를 하는 사람이 누군지 몰랐다. 그런데 이틀 후 TV를 보고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았다. 그는 국정원 1차장으로 발탁된 오정소 씨였다.”

    박 씨의 기억 속에 있는 이 잔영은 ‘안기부의 불법 감청 테이프 유출 사건’의 핵심 인물로 떠오른 오 씨와 현철 씨와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단적인 장면이다. 오 씨의 정보원 생활 곳곳에는 현철 씨의 흔적이 묻어 있다. 오 씨가 대공정책실장직을 맡고 미림팀을 조직, 도청에 나선 것도 일정 부분 현철 씨와의 관계에서 파생한 운명으로 볼 수 있다.



    오정소 침묵에 국정원 떤다?

    이원종 전 정무수석.

    오 씨는 현철 씨와 경복고, 고려대 동문이다. 이원종 전 정무수석도 같은 사이. 오 씨는 이 씨의 고교 6년 선배이고 현철 씨의 14년 선배다. 오 씨는 자신의 능력과 학연을 통해 문민정부 안기부의 실세로 군림했다.

    그러나 초기 오 씨의 정보원 생활은 별 볼일 없었다. 오 씨의 고향은 황해도 해주다. 해외로 망명한 뒤 ‘반(反)박정희 활동’을 했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과 동향. 이 때문에 오 씨는 한때 안기부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외환’을 타고난 성격으로 극복했다.

    오 씨는 추진력이 강한 사람이다. 그의 보좌관으로 일했던 김기삼 씨는 “열정적인 성격”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정치적인 감각도 발달했다. 어떤 점에서는 YS랑 닮았다는 평가도 나왔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보고서를 잘 쓴다든가, 자잘한 업무를 잘 챙기는 스타일은 아니다”고 증언한다. 오 씨는 의리를 중시했다. 그래서 제2의 장세동이란 평가도 뒤따른다. 김기삼 씨의 설명이다.

    “의리를 중시하는 한국형 보스 스타일이었다. YS 시절 악역은 혼자 다 짊어졌다고 봐도 된다. 저돌적인 데가 있어 장세동과 비교될 수도 있지만 DJ 정부의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과 비교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으로 본다.”

    그러나 하는 일이 박 전 장관과 비슷했을 뿐 스타일은 박 전 장관과 달랐다. 김 씨의 지적대로 오 씨는 YS 정부의 난제들을 온몸으로 떠안았다. 대공정책실장이란 자리가 가져다주는 숙명으로 볼 수 있다. 국내 정보를 수집하는 부서는 국내 담당 차장 산하의 대공정책실과 과학보안국 등이었다. 그 가운데 대공정책실은 사람을 통한 정보수집(HUMINT)을 담당했다. 과학보안국은 신호정보를 수집(SIGINT)한다. 엄밀히 따져 미림팀의 도청 업무는 대공정책실의 고유한 업무라고 할 수 없다. 대공정책실과 과학보안국에서 수집한 첩보는 모두 분석 부서인 기획판단국으로 전달된다.

    대공정책실에는 수집단이 3개 있었다. 제1단은 정치와 학원, 제2단은 경제와 사회·종교·노동 등을 담당했고, 제3단은 신문과 방송을 담당했다. 3단장은 언론계와 협조를 담당하는 협력단장을 겸했다. 이 조직을 통제 운영하는 사람이 오 씨였고, 그는 국내의 모든 분야에 수집관(I/O)을 파견하여 각 요소의 정보를 수집·취합했다. 이렇게 취합된 정보는 정국을 재단하고 운영하려는 사람에게는 마약과 같다.

    오 씨가 대공정책실장을 원했는지, 아니면 현철 씨 등 그를 둘러싼 정치적 세력들이 그의 역할을 원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오 씨는 미림팀 등을 통해 확보한 각종 정보를 활용, 정보기관은 물론 정치세력에 자신의 존재를 과시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현철 씨다. YS의 부족한 2%를 채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던 현철 씨는 오 씨가 주는 정보에 서서히 중독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현철 씨의 중독현상은 심해졌고, 그에 따라 오 씨에 대한 의존도도 깊어갔다. 대공정책실장직을 맡은 오 씨에게는 YS 정부의 모든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보이지 않는 해결사로서의 몫이 주어졌다.

    “미림팀 보고서 전적으로 관리”

    오 씨는 도청 자료 등 대공정책실에서 생산한 각종 자료들을 매우 조심스럽게 다뤘다. 김기삼 씨의 설명이다.

    “보좌관으로 일했던 나도 자료 등을 직접 보지 못했다. 다만 밑에서 일하다 보니 그렇게 전달한다는 사실만 알게 되었다. 미림보고서는 전적으로 오 실장이 관리했다.”

    오 씨는 화끈하고 적극적인 만큼 돈 씀씀이도 큰 편이었다. 항간에는 그가 업무추진비 및 활동비 지급에 인색했다는 얘기도 나오지만 그를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치고 ‘통 큰 오정소’를 부정하는 사람은 드물다. 특히 밤새워 작업(도청)하는 현장팀 등에 대해서는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 ‘역할에 비해 대접을 못 받는 미림팀원’의 불만을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이 화끈한 업무지원이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당시 그의 뒤에 문민정부의 황태자였던 현철 씨가 버티고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를 바탕으로 오 씨는 안기부 내에서 실세 실장으로 통했다. 이런 배경을 믿어서인지 왕성하게 활동했다. 김기삼 씨는 “안기부와 국정원에 근무하면서 실장 가운데 오 전 실장만큼 힘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기억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도 많이 꼬였다. 특히 고교 및 대학 동문들이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고 한다.

    오 씨는 가능한 범위 안에서 이들을 챙겼다고 한다. 그는 문민정부 안기부 인사 가운데 초고속 승진 기록을 갖고 있다. 오 씨는 해외공작국 출신이다. 해외공작국 행정과장을 하다 90년을 전후해 언론을 담당하는 협력단이 신설되면서 초대 협력단장으로 발탁됐다. 오 씨의 친형이 모 언론사 간부를 지냈고, 오 씨 역시 몇몇 언론사 사주들과 절친한 관계였다는 지적도 있다.

    오 씨는 문민정권이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출세 가도를 탔다. 1992년 10월 3급에서 2급으로 특진한 뒤 93년 2월 김영삼 대통령 당선 후 1급 직위인 지방부서장(인천지부장)으로 영전했다.

    그러고는 94년 2월 또 한 번 파격적인 인사를 기록했다. 국내 부서의 핵심 요직인 대공정책실장으로 부임한 것. 다시 1년 후인 95년 차관급인 차장으로 승진했고, 96년 12월 보훈처 장관으로 영전했다. 공직사회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매년 진급’이라는 이 진기록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오 씨는 인사와 관련 여러 가지 일화를 갖고 있다. 94년 말경 황창평 당시 차장이 보훈처장관으로 나가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차장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 씨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때 오 씨는 “다른 사람들은 안 되지만 정형근 기획판단국장(현 한나라당 의원)이 차장을 하겠다면 양보하겠다”고 말했다. 당시 기획판단국(1국)은 대공정책실(2국)보다 선임국이긴 했지만 경쟁관계였던 정 씨에게 오 씨가 양보 의사를 비친 것은 의외로 받아들여진다. 정 씨의 업무능력을 인정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지만 초고속 출세 가도를 달리는 자신에게 주위의 눈길이 몰리고 있음을 의식, 숨 고르기를 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95년 안기부 1차장으로 승진한 오 씨는 이원종 전 정무수석 등과 함께 96년 15대 총선 대책을 세웠다. 당시 총선은 야당의 압승 분위기였음에도 현철 씨가 가동한 광화문팀의 분석과 공천에 힘입어 여당이 이긴 선거였다. 당시 현철 씨 캠프에 있었던 한 인사는 “오 씨의 정보와 과학적인 분석 등이 총선 승리의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그의 이런 독주는 많은 적을 만들었다. 김광일 전 대통령비서실장도 오 씨의 역할과 정보기관의 역기능을 주시한 인물. 김 전 비서실장은 김 대통령의 오랜 친구인 김윤도 변호사에게 지원을 요청, 이 전 수석도 모르게 오 씨를 안기부에서 빼내 국가보훈처 장관으로 보냈다고 후일 토로했다. 이 인사를 통해 오 씨의 YS 정부 해결사 역할은 끝이 났다.

    검찰은 지금 오 씨에게 도청 정국을 풀 열쇠를 기대한다. 그러나 오 씨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오 씨를 조사했던 국정원 측은 “오 씨가 원을 퇴직하면서 신분증을 반납하는 순간 모든 것을 묻어버렸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오 씨의 한 지인은 “얼마 전 만났더니 무덤까지 안고 가겠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오 씨의 침묵은 두 가지 노림수로 분석된다. ‘직무상 취득한 비밀은 무덤까지 가지고 간다’는 정보기관원 특유의 생리일 수도 있지만, 윗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일 가능성이 더 많다. 의혹을 받고 있는 김현철 씨나 이원종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보호대상이다. 그와 단짝을 이뤘던 김기섭 전 운영차장도 안기부 대선자금 지원 문제가 불거졌을 때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며 입을 열지 않았다.

    오 씨의 침묵은 역으로 국정원을 압박하는 수단으로도 작용한다. 국정원은 그의 입에 대해 매우 예민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느냐에 따라 도청 정국의 충격과 파괴력은 배가된다. 오 씨는 도청 대상과 범위, 도청 내용 등 도청의 시작과 끝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특히 오 씨의 입이 무서운 것은 그가 도청자료의 사용처도 대부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을 국정원이 놓칠 리 없다. 국정원 한 관계자의 설명이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느냐에 따라 국정원의 진로가 달라진다. 만약 그가 모든 것을 털고 새로 시작하자며 양심선언이라도 한다고 치자. 그 경우 국정원은 반 토막 날 수밖에 없다. 그럼 국정원은 뭐가 되느냐. 털고 가더라도 그 주체는 국정원이어야 한다. 때문에 오 씨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국정원으로서는 선뜻 오 씨와의 고리를 자르기도, 그렇다고 안고 가기도 난감한 지경이다. 오 씨는 이미 1997년 대검 중수부가 김영삼 전 대통령 차남 현철 씨 비리를 수사할 때 조사받은 경험이 있다. 당시 그의 혐의는 안기부 핵심정보를 현철 씨에게 누설했다는 국정원법 위반으로 이번 도청사건 혐의와 비슷하다. 그는 당시 보훈처 장관 직책에서는 경질됐으나, 사법처리는 면했다.

    그의 친교 스타일은 깊고 넓다. 한번 사귀면 뿌리를 뽑는 스타일이다. 그가 최근 문제가 된 행담도 개발 김재복 사장과 양아버지-양아들 관계라는 점도 그의 인맥과 동선을 읽게 해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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