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92

2005.07.05

열심히 일한 당신, ‘9일간의 자유’ 즐겨라!

주5일제 시행으로 토·일 합쳐 9일 휴가 시대… 직장인들 ‘8박9일’ 꽉 채운 휴가 계획 만들기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5-06-30 14: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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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심히 일한 당신,  ‘9일간의 자유’ 즐겨라!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안나푸르나 트레킹 모습과 산봉우리들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푼힐 전망대, 시드니의 해안(왼쪽부터).

    직장생활 12년차에 들어선 김종희(39) 씨는 올해 봄부터 바빴다. 영어회화를 배운다든가, 다들 열심히 매달리고 있는 주식투자 때문이 아니다. 주5일 근무제가 시행되고 처음 맞는 여름휴가 때문이다.

    김 씨는 요즘 회사 분위기에서 어렵잖게 찾을 수 있다는 바로 그 ‘휴가에 목숨 건’ 샐러리맨이다. 그는 토요일 아침에 시작하여 그 다음 주 일요일에 끝나는 8박9일의 여름휴가 대장정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이미 4월부터 여름휴가 계획을 짰다.

    미술관 순례, 명산 등반 등 테마별 여행 인기

    주5일 근무로 가능해진 8박9일의 여름휴가는 사실 김 씨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래 처음 떠나는 긴 여행이 될 것이다.

    그는 8월 하순 아내와 여덟 살인 딸과 함께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 오를 계획이다. 일찌감치 계획을 세운 덕분에 자신의 비행기 좌석은 마일리지로 확보했다.



    그는 요즘 시간만 나면 인터넷에서 여행 후기를 읽거나 네팔에서 머물기로 한 숙소 ‘빌라 에베레스트’(www. villaeverest.co.kr)의 홈페이지를 뒤진다. ‘빌라 에베레스트’는 박영석 씨-얼마 전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우리나라 산악인-가 운영을 하다 얼마 전부터 현지인인 앙드로지라는 셀파가 운영하는 곳이다. 그는 이곳에 가면 ‘휴가에 미친’ 사람이 자신뿐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김 씨는 8박9일 동안 온 가족이 히말라야까지 다녀오면 아무리 아껴 쓴들 경비가 만만찮아 가을, 겨울 내내 쪼들릴 것이 뻔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여행이 지금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등 대형서점 여행서적 특설 매장에도 점심시간이 되면 이런 이들이 하나 둘씩 모여든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여성 직장인들이 특히 많다.

    “스페인을 넣어서 8일 동안 파리까지 돕시다.”

    “비행기 값 부담이 크니까 숙소는 가장 싼 데로 가기로 해요.”

    “스위스 알프스에 가고 싶은데, 같이 갈 사람이 없어요.”

    “인터넷에 사정을 올리면, 비행기표 공구(공동구매)하고 현지까지 같이할 사람들 쉽게 찾아요.”

    열심히 일한 당신,  ‘9일간의 자유’ 즐겨라!

    여름 휴가철이 시작되면서 인천공항을 통해 출국하는 해외여행객들이 크게 늘었다.

    배낭여행자들의 복음서 ‘론리플래닛’과 최근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저스트고’ 너머로 오가는 8박9일 ‘여행병자’들의 대화에서 3박5일의 동남아 패키지 여행안 같은 건 아예 찾아볼 수도 없다. 이들의 대화는 ‘저스트고’가 저렴한 정보에서부터 꽤 ‘럭셔리’한 정보까지 모두 포함해 유용하다거나 지도가 ‘길치’도 볼 수 있을 만큼 보기 편하다거나, 그래도 ‘론리플래닛’의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정보가 실제 상황에선 유용하다는 등 여행서적 분석이 수준급에 이른다.

    또한 뮤지컬이나 미술관을 샅샅이 훑겠다든가, 등반을 하겠다는 식으로 원하는 것도 분명하다. 미술관에서 미식(美食), 예술 카페까지 테마별 여행 서적이 많아진 것도 이 같은 추세를 반영한다.

    외국계 회사는 9박10일, 10박11일 휴가도 일반화

    광화문 지역 한 금융회사에서 일하는 한 여성 직원은 “회사 분위기가 썩 좋진 않지만, 올해는 일단 떠나기로 했다”며 “점심시간마다 고등학교 친구를 서점에서 만나 여행 계획을 짜는 게 요즘 최고의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여기 모인 또 다른 직장인은 “8박9일 동안 떠난다고 생각하면, 마치 사표 낸 기분이 이렇지 않을까 싶다”며 즐거워했다.

    그는 “싱글인 여성 직원들이 8박9일 여행을 선호하는 편이고, 한창 공부하는 나이의 자녀를 둔 남자 직원들이 가장 몸이 ‘무거운 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국적 기업에서 외국인들과 함께 일하는 한 임원급 직원은 “휴가를 짧게 가서 회사에 충성한다는 국내 회사 분위기와는 좀 다르다. 외국인들이 보기에 여름휴가를 얼마나 ‘모험적’으로 가는지도 에너지와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에 대개 9박10일이나 10박11일로 미국이나 호주 횡단 같은 휴가 계획을 짠다”고 말했다. 그는 올여름 모터홈을 직접 운전하여 가족과 함께 호주의 동부 해안을 따라 종단한다는 휴가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인터넷을 검색하는 중이다.

    여행 관련 인터넷 카페엔 ‘떠나자’ 주장·권유 가득

    민족사관고 교사인 강문근 씨 등 직업을 가진 ‘중증’ 여행전문가들이 모여 만든 여행정보 사이트 ‘트래블게릴라’의 편집장 김슬기 씨는 “30대 직장인 중 1년에 두 번 가는 휴가에 목숨 건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아직 초기 단계지만 주5일 근무의 영향으로 증가세는 더욱 분명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90년대 여행자유화 시대 이후 대학을 다닌 30대 직장인들 중 주5일 근무에 따른 ‘8박9일’ 휴가를 제대로 즐기려는 이들이 많다. 이들은 월급을 모아 휴가에 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단체 패키지여행은 한 번 경험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트래블게릴라’나 수없이 많은 배낭여행객들의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면 ‘떠나자’는 주장과 권유가 거의 혁명적(?)인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여행을 꿈꾸는 이들이 한 줄씩 남긴 ‘나에게 여행이란’이라는 짧은 글들, ‘루트에서 자유로워지자’는 등의 주장들은 현실을 떠나본 이들의 절절한 체험에서 나온 것이라서 선동적이기까지 하다.

    인터넷 다음의 배낭여행가이드 카페(cafe.daum.net/bpguide)도 그중 하나로 마흔 나이를 훌쩍 넘겨 최근 방글라데시 배낭여행을 다녀왔다는 아이디 ‘험프리’의 여행 후기엔 ‘멋지다’ ‘역시 여행지에선 웃음도 여유 있어 보인다’는 뜨거운 응원의 답글들이 줄줄이 달려 있다.

    마니아들만 찾던 네팔·티베트에 일반 직장인 발길 늘어

    ‘(사회적) 위치와 일 때문에 여가를 낼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착각이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 구도자는 아니더라도 여행은 내게 삶을 돌아보는 기회가 된다.’

    늘 혼자 여행을 다닌다는 아이디 ‘유령’도 ‘그래서 내 사진은 모두 현지인들이 찍어준 것이다. 사진사는 동네 아이들에서 할머니까지 다양하다. 하나하나 개성이 있다’는 글을 올려 동료 여행객들을 전율하게 한다.

    올해 6월 한 리크루팅 업체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여전히 직장인 10명 중 4명은 4일 동안의 짧은 휴가를 떠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극심한 불경기인데도 여름휴가에 해외여행을 떠나기로 한 직장인들도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탑항공사의 박준원 과장은 “몇 년 전까지 동남아시아가 대표적인 해외 여행지였지만, 최근엔 대표지가 사라졌다. 대신 여행 마니아들의 코스라고 여겨졌던 중동, 네팔, 티베트 등에 일반 직장인들의 출국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고 말한다.

    주5일 근무제가 시행된 첫해, 사표도 내지 않고 8박9일을 꽉 채워 현실을 떠나려는 이들이 ‘철없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당장 떠나지 않으면 영원히 떠나지 못할 것’이란 팀 캐힐 (‘나를 유혹한 낭만적인 곳들’의 저자)의 말에 누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서울 무교동에서 등산, 트레킹용품 매장을 운영하는 산악인 정광식 씨는 이 같은 직장인들의 심리에 묘한 웃음을 짓는다. 그의 가게엔 늘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 여행용품을 사서 떠났던 직장인들이 인도나 네팔에서 ‘완전히’ 달라져 돌아오는 걸 자주 봅니다. 그래서 난 세상엔 두 가지 부류의 인간들이 살고 있다고 말하지요. ‘그곳’에 다녀온 사람과 다녀오지 않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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