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89

2005.06.14

푸른 물결 바람에 출렁 수몰민 한과 눈물 알고 있나

옥거리·태고정 등 명소 즐비 … 2000년 수몰되면서 옛 정취 간 곳 없어

  • 글·사진=신정일/ 황토현문화연구소장 hwangtoh@paran.com

    입력2005-06-09 18: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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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 물결 바람에 출렁 수몰민 한과 눈물 알고 있나

    용담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망향의 동산.

    가버린 세월을 어느 누가 붙잡을 수 있고, 어느 누가 되돌릴 수 있으랴. 한때는 그 일대를 호령하며 나라가 좁다고 큰소리치던 사람들도 세월의 흐름 속에 묻혀 찾아보기 어려운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어떤 지역을 찾아가서 허공을 바라보면 문득 되살아나는 얼굴이 있다. 반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곳도 있는데, 안동댐에 수몰된 안동의 예안이 그렇고 금강 상류에 건설된 용담댐에 잠겨버린 전북 진안의 용담이 그렇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용담현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동쪽으로 금산군의 경계까지 29리, 북쪽으로 금산군의 경계까지 22리, 남쪽으로 장수현의 경계까지 31리, 서쪽으로 고산현의 경계까지 36리, 그리고 서울에서 557리 떨어져 있다. 본래는 백제의 물거현이었는데 신라 경덕왕이 청거로 개명하여 진례현에 예속시켰다. 그 후 고려 충선왕 5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현령을 두었고 본조(本朝)에서도 이에 따랐다.”

    조선 말까지만 해도 독립된 현이었다가 군이 된 용담은 1914년 군·면 통폐합에 따라 용담군 군내면과 일북면의 일부를 병합, 용담면이 되어 진안군에 편입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용담은 땅이 메마르며 기후가 일찍부터 춥다”고 했다.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정도전과 함께 조선 창업공신의 한 사람인 윤소종은 시 첫머리에서 “용담 백성들은 소박하고 꾸밈이 없다. 또 좁고 맑은 물이 여러 겹 창벽 간에 흐른다”고 했다. 또 주기(州記)에서는 “땅은 궁벽하고 하늘은 깊으며, 바위는 기이하고 나무는 노후하다. 구름다리가 산에 걸리고, 돌길은 시내에 연해 있다. 동구 문은 깊숙하며, 백성들은 드문드문하다”고 했다. 용담현의 중심지였던 옥거리는 용담군 군내면 지역으로, 마을 앞으로 흐르는 내가 옥처럼 맑았다 하여 옥거 또는 옥거리라고 불렀다. 지금 옥거리에는 물이 넘실거리고, 용담댐 순환도로 옆에 있는 몇 채의 집들이 옥거리의 명성을 지켜나가고 있다.

    유적 한곳에 모아놓은 용담댐 ‘망향의 동산’

    용담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객사 터도 고을 원님이 부임하거나 이임할 때 백성들이 나와서 환영 또는 환송하던 곳이다. 마을에서 5리쯤 떨어져 있었다는 오리정도, 소나무와 참나무가 서 있었다는 숲거리도 개울 위에 작은 다리를 놓았는데, 모양이 구름 같아서 ‘하느개’라고 지었던 그 다리도 사라진 지 오래다.

    푸른 물결 너머 멀리 산 위에 정자 하나가 보인다. 용담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망향의 동산에는 팔각정과 태고정, 그리고 용담 땅을 다녀간 현령들의 영세불망비가 서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태고정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봉우리가 빼어나고 시내가 있으며 송백이 울창하다.”

    푸른 물결 바람에 출렁 수몰민 한과 눈물 알고 있나

    용담향교, 태고정, 영세불망비, 선바위 모습(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태고정은 본래 상거 북쪽에 있는 정자로 현령 조정이 정자를 짓고 이락정 또는 만송정이라고 불렀다. 그 후 현령 홍석인이 이락정 터에 다시 정자를 만들고 태고정이라 고쳐 불렀다.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고, 시냇물이 수백 그루의 소나무를 에워싸고 흐르는 곳에 자리잡은 태고정은 태고청풍(太古淸風)이라 하여 용담팔경 중 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용담호에 둘러싸여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용담현에는 산천도 많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고 기록한 주줄산은 지금의 운장산이다. 구봉산과 더불어 사람들이 즐겨 찾는 산인데, 원래의 이름이 주줄산인 만큼 하루빨리 주줄산으로 바꿔야 할 것이다.

    사라지고 변해버린 게 어디 그뿐일까. 용담향교는 현의 북쪽 2리에 있다. 고려 공양왕 때 현령 최자비가 중건했으며, 이색의 시에 ‘성도와 왕화가 원근에 고루 퍼지니, 학사(學舍)는 천산만산 중이 있도다. 묻노니, 독서의 목적은 무엇인고, 효제 충신 바로 이것이로다’라고 기록돼 있다. 용담향교는 용담댐으로 인해 진안군 동향면 대량리로 옮겨졌다. 동향면에는 동향소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또한 구리향천이라는 냇가에 이름만 남아 있다. 구리향천과 금강이 만나는 곳에 자리잡은 죽도는 선조 때 1000여명이 희생당한 기축옥사의 한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기만 하다.

    가만히 앉아서 바라보는 용담댐은 푸르고 또 푸르다. 물이 넘실거리는 그곳에 금산으로 가는 795번 지방도로와 안천으로 가는 796번 도로가 나뉘는 안천대교가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다.

    2만1000여명 정든 고향 떠나… 새 면 소재지는 송풍리

    용담댐이 처음 계획되었던 것은 1930년대 일제에 의해서다. 광복 전까지 측량과 수몰지역 내의 용지 매수까지 완료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패망하며 용담댐은 중단된다. 50년에 매수했던 토지는 무상 반환되었다. 66년 건설부에서 용담댐 일대를 재조사하여 수몰지역민의 이주대책까지 세웠지만 계획으로 그쳤다.

    용담댐 건설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서해안 개발이 본격화된 80년대 중반부터였다. 88년 8월에 전주권 2단계 지역개발사업 타당성 조사가 시행되었고 90년 12월에는 설계에 들어갔다. 92년 10월29일에 용담댐 공사가 착공되었고 96년 10월에는 총 8억t의 저수량을 확보하게 될 축조가 개시되었다. 97년 12월10일에는 용담에서 고산까지 이어지는 길이 21.9km, 지름 3.2m의 도수터널이 관통되고, 용담은 2000년에 수몰되면서 송풍리에 새로운 면 소재지가 만들어졌다.

    용담댐의 유역 면적은 930km2이고, 수몰지의 이주인구는 2864가구(2만1616명)였다.

    수많은 수몰민들의 한과 눈물, 그리고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만든 댐 안의 물은 값어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귀하다. 물 쓰듯 쓰는 그 물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 한 방울도 늘지 않았기 때문에 물이 부족하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지구촌은 이미 생존을 위한 ‘물 전쟁’이 시작되었다. 20세기 자원 전쟁이 ‘석유’ 때문이었다면, 21세기는 ‘물이 재앙의 씨앗’이 될 것이다.

    인구증가와 산업화 등으로 수자원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물을 물 쓰듯 하는 습관을 버리지 않는 우리들도 물 부족에 시달릴 것이 뻔하다. “산과 물을 잘 다스려야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는 동양의 오랜 지혜를 가슴에 새겨야 할 시점이 아닐 수 없다.

    고려 때의 문장가인 김극기는 용담을 두고 “땅은 궁벽하고 물과 구름의 고을이로다”라고 노래했고, 성임은 “다리는 시내 굽이에 비낀 것이 어여쁘고, 집은 수풀 사이에 향해 있는 것이 사랑스럽다. 다만 궁벽한 곳에 와서 노는 것이 좋을 따름이니, 지나온 길이 험하였음을 탄식하지 말라” 하였는데 그 아름다웠던 풍경은 어디로 갔는지 헤아릴 길이 없고 푸른 물결만 바람에 출렁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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