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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봉이 만난 영화, 영화인|‘섬’과 ‘녹색의자’ 서정

인스턴트 배역 NO … 진실 묻어나는 연기

인스턴트 배역 NO … 진실 묻어나는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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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와 사진 속의 인물이, 그리고 사진마다의 인상이 매우 다른 배우 서정. 그녀는 김기덕, 송일곤, 박철수 등 작가주의 감독들과 영화를 만들어왔다.

광화문 사거리에 있는 일민미술관(옛 동아일보사 건물)에 들어서면서 나는 추억에 잠긴다. 1979년 겨울, 비상계엄 중에 신춘문예 응모 작품을 들고 이 건물 계단을 올라 4층 문화부에 갔다. 그리고 며칠 후 12·12쿠테타가 일어났고, 세상은 숨 가쁘게 돌아갔다. 12월24일 아침, 집에서 막 나가려는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신춘문예 당선 통보였다. 지금 이 건물 1층에는 미술관과 카페가 들어서 있다. 바로 그곳에서 배우 서정을 만나기로 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나왔지만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50cc 혼다 재즈 오토바이는, 겉모양은 할리 데이비슨 축소판이지만 최고 시속은 60km밖에 안 되는 샐러리맨 출퇴근용이다. 10분쯤 지나니 영화사 홍보팀과 그녀가 들어왔다. 그녀와 단 둘이 마주 앉아 노트북을 켜자, 그녀는 경찰서에서 취조당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나는 노트북 모니터 너머로 그녀를 바라본다.

배우라는 멀고 먼 길 실감 안 나는 배우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에서 설경구와 섹스를 하는 가구점 미스 리, 송일곤 감독의 ‘거미숲’에서 과거의 상처와 비밀을 쥐고 있는 1인 2역의 신비스러운 캐릭터, 박철수 감독의 ‘녹색의자’에서는 10대 소년과 격정적 섹스를 하는 서른두 살의 유부녀 김문희 역을 맡았지만, 아직까지도 서정은 김기덕 감독의 출세작인 ‘섬’의 희진이가 강하다. ‘섬’은 서정에게 판타스포르토국제영화제와 씨네마닐라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고 국내에서는 백상예술대상과 황금촬영상, 신인연기상을 받았다.

그러나 내 앞에 있는 이 배우는 ‘섬’의 상처 많고 사연 많은 희진이 아니었다. 맨발에 연녹색 치마를 입고 나룻배를 저어 저수지에 떠 있는 방갈로로 향하던 희진은, 좋아하는 남자에게서 버림받자 수족관에 있는 물고기를 꺼낸 뒤 배터리에 연결된 전선으로 전기고문을 한다. 그리고 그 남자가 떠나가자 낚싯바늘을 자신의 질 속으로 삽입한 뒤 낚싯줄을 힘껏 잡아당긴다.

서정은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다. 정말 이 여자가 희진이었나? 서정의 사진들을 보면 같은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얼굴이 보인다. 여배우들을 실제로 만나보면 화면 속 모습과 상당히 다른 경우가 많다. 특히 선이 부드럽고 둥근 형의 얼굴은 카메라 속에서는 대부분 실제보다 얼굴이 커 보인다. 서정이 그랬다. 카메라 밖 그녀의 얼굴은 CD 한 장으로 가려질 만큼 작다. 그녀는 서른세 살이다. ‘섬’으로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게 2000년이었다. 그렇다면 스물여덟 살까지 그녀는 뭐 했나?

“처음에 독립영화 하는 친구들 만나 어울리면서 영화라는 것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 전에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꿔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도 내가 배우라는 멀고 먼 길을 가고 있다는 게 실감이 안 난다. 길을 생각하면 머리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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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자’

서정은 96년 ‘탈순정시대’라는 단편을 찍었다. 그리고 임창제 감독의 ‘눈물’ ‘아퀴아 레퀴엠’ 등에 출연했다. 그러나 단편영화 시절, 그녀를 기만한 작품들도 있었다. 시나리오는 괜찮았지만 연출력이 형편없어서 나중에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게 부끄러울 정도의 작품이 나온 경우도 있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 생채기를 남긴 그런 영화들을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

“영화에 대한 접근을 하기 이전에 예술에 대한 접근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작가 감독들하고만 작업하게 됐다. 지금은 내가 가는 길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배우라는 것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그녀는 어디에서 예술적 영감을 받을까? 오에 겐자부로의 ‘위대한 사고’, 가오싱 젠의 ‘영혼의 산’ 같은 책도 목록에 들어 있지만, 의외로 건축이었다.

“건축에서 가장 많은 매력 느끼고 영감 받아”

“난 건축에서 가장 많은 매력을 느끼고 영감을 받는다. 영화 작업을 하지 않을 때는 좋은 건물을 찾아보며 위안을 얻는다. 공간이 주는 힘은 굉장하다. 긴 세월을 관통하며 살아남은 위대한 건축물 안에서, 사람을 포용하는 것, 너그러워지는 것도 체험한다.”

도시적이며 세련된 이미지의 배우 서정이 찾는 공간이라면 W호텔이나 청담동의 어느 건물일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종묘다. 형부가 만해박물관을 건축 설계한 김개천 교수다. 형부와의 일대일 강의를 통해서 종묘 건축의 진가를 알게 되었다. 종묘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공간이다. 외롭고 고될 때 혼자 천천히 걸어다니면서 새로운 세계와 만난다. 종로에서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인데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그것은 매우 경이로운 체험이다.”

그녀는 무엇에서 상처를 받을까? 나는 내가 기르던 개 이야기를 했다. 어린 시절 기르던 개가 죽은 뒤 수십 년 동안 개 가까이에도 가지 못했던 경험을 말하자, 그녀도 개 이야기를 했다. 예전에 홍대 앞 클럽을 다닐 때는 용팔이(용감하고 팔팔하라고 해서 이렇게 이름 붙인 잡종개)를 데리고 갔다. 나는 캔맥주 하나 마시고 용팔이는 대구포를 뜯어먹으며 30분 정도 놀다가 왔다. 용팔이는 ‘섬’ 찍을 때 시골에 맡겼는데 그때 농약을 먹고 죽었다.

“얼마 전 일인데, 집에서 갑자기 울음이 터지면서 너무너무 심하게 운 적이 있다. 왜 이렇게 슬플까. 내 슬픔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태어나기 전부터 슬펐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지금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왜 이 인터뷰를 하고 있고, 왜 이 코코아를 마시고 있지? 존재 자체가 나를 슬프게 만든다. 나는 마음의 평안, 영혼의 평안을 추구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을 얻기까지는 너무 힘들다. 그런 데서 오는 외로움 같은 것이 상처로 작용한다. 이런 고민을 하는 나라는 존재가 형성되기까지 30년 넘는 세월이 걸렸다. 그 시간이 나를 만들었을 것이고, 그 안에는 많은 일이 엉켜 있을 것이다. 사실 상처라는 게 피하거나 부정할수록 자신을 더 피폐해지게 만든다. 너의 상처를 인정해라. 받아들여라. 피하지 말라. 그렇게 말하고 싶다. 그래야만 치유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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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을 깊이 각인시킨 영화 ‘섬’.

특히 ‘섬’ 때 너무 힘들었다. 대부분 상처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려 하는데 ‘섬’ 때는 그것을 끄집어내서 발산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너무 괴로웠다. 정신과 의사들이 치료할 때 환자를 과거로 들어가게 해 치유하는데, 영화가 때로는 혹독하게 상처를 줄 때도 있다. 그에 못지않게 치유를 경험하기도 한다. 과거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거미숲’의 여인 역은 영화를 찍는 과정이 내 상처의 치유 과정이었다. 김지숙 씨와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한 연극 ‘두 여자’도 한 많은 여자의 삶을 다루고 있는데 그때도 많은 치유가 됐다. 무대에서 상처를 보여주고 코앞에 있는 관객에게 나의 적나라함을 보여주면서, 여자로서 피부가 고와지는 것을 체험했다. 그만큼 영혼이 정화되었다. 카메라나 무대를 통해 자신의 아픔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상처를 다루고 있어도 표현하는 방법이 달라서 ‘섬’과 ‘거미숲’은 그녀에게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왔다. 상처를 드러내던 ‘섬’을 찍고는 상처가 더 증폭되었다. 반면 ‘거미숲’에서 그녀는 혼란·괴로움·고통·분노를 끌어안는 여자였는데, 상처를 속으로 더 깊이 넣으면서 그것을 정제되고 절제된 모습으로 표현해내는 법을 연구했다. 그게 개인적으로도 상처를 치유해주었다.

그녀가 함께 작업해온 감독들은 모두 한국의 대표적 작가주의 감독들이다.

“김기덕, 박철수 감독은 굉장히 빨리 찍고 현장에서 1인 10역을 하며 영감이나 노련함이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송일곤 감독은 느리고 말이 없지만 비범했다. 특히 배우들과 소통하면서 항상 토론하고, 현장에서 영감을 주고받으면서 한컷 한컷 마음을 열고 진실하게 다가가는 작업 분위기가 좋았다. 하지만 박철수 감독은 고집도 강하고 자기 색깔도 강해서 배우들과 소통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편안하고 백지장 같은 모습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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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자’ 역시 그녀의 영화 이력에 독특한 방점을 찍게 될 것이다.

‘녹색의자’를 찍으면서 서정은 고집스럽게 감독에게 저항했다. 감독이 시키는 대로만 연기할 수 없었다. 왜 이런 동작을 해야 하느냐고 이유를 물었더니, 박 감독은 “나 참, 이거 미치겠네”라면서도 배역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배우의 주장을 높이 샀다. 박 감독은 나중에 스태프들 앞에서 “서정은 참 경이로운 배우다”며 늘 예의 없이 ‘들이대던’ 그녀를 감싸안아 눈물이 핑 돌게 만들었다.

‘녹색의자’는 2년 전 두 달 동안 대전에서 찍었다. 그녀가 맡은 역은 서른두 살의 주부 김문희. 역원조교제 파문이 일었던 실화에서 모티브를 따와 영화화한 것이다. 그러나 제작사와 문제가 생겨 창고에 처박혀 있던 필름이 우여곡절 끝에 올 1월 선댄스영화제에 출품되었고, 이번에 극장 개봉하게 되었다.

만약 서정 본인이 연하의 남자와 그렇게 사랑에 빠졌다면 어떨까라는 질문에, 그녀는 강한 부정부터 했다.

“나는 결코 그 여자처럼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열아홉 살의 남자가 나를 흔들어놓을 정도라면 그는 상당히 매력적일 것이다. 나는 굉장히 몽롱한 상태로 살아갈 것 같다. 그게 정말 사랑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혼미한 상태에서라도 이 남자를 받아들일 것 같고 그런 만큼 책임이 주어질 것이다. 사회라는 틀 안에서 오는 시선들, 남편, 친구들, 주위 사람들에게서 혹독하게 치러야 할 부분이 있다. 나는 사랑에 빠졌을 뿐인데, 여러 가지 상황이 우스운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통제가 안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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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숲’에서 감우성(오른쪽)과 연기 호흡을 맞춘 서정. 영화에서 그녀는 있는 듯 없는 듯 환상처럼 존재한다.

서정의 행운은 찍는 영화마다 지방에서 로케이션을 했다는 것이다. 서울이 아닌 곳에 내려가면 영화가 끝날 때까지 올라오지 않는다. 가족들과 같이 있으면 그 캐릭터가 무너진다. 그래서 크랭크인되기 전까지가 가장 긴장된다. 일단 촬영에 들어가면 촬영장에서 그냥 자기가 맡은 배역으로 살아간다. 목소리까지 바뀐다. 대사 한 마디 없던 ‘섬’을 찍을 때는 두 달 동안 실제로 말을 안 했다. ‘거미숲’에서는 촬영이 없을 때도 늘 배역의 옷을 입고 숲 속을 거닐었다. 카메라 앞에서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혹독한 것이다.

‘녹색의자’는 남편에게 모욕을 당하고 열아홉 살 어린 소년과 사랑에 빠진 모습이 서정 자신과 너무나 거리가 있었다. 상대 역을 맡은 심지호에게 연기는 미숙해도 된다, 대사 못해도 된다, 너와 나의 관계를 보며 관객들이 진실된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녹색의자’의 첫 장면은 주인공이 출소하는 것이다. 그 장면을 위해 교도소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젊은 여자가 교도소에서 몇 달간 지내고 나왔을 때의 모습을 진실되게 그리고 싶어서 대전교도소장에게 사흘만 살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전교도소는 전과 3범 이상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다.

이렇게 완벽하게 준비하는 그녀가 TV 드라마 ‘로펌’은 어떻게 했을까.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다. 그날 아침 대본 보고, 찍고, 그날 방송 나가는 공장 같은 시스템이었다. 3회가 방송됐을 때 작가와 방송사 사이에 소송이 벌어졌다. 대본이 없어서 모든 스태프와 배우들이 현장에서 기다렸다. 노련한 사람들은 적응했지만, 나는 힘들었다.”

촬영을 하지 않을 때는 형부를 따라 부석사 등 옛날 건축물을 찾아다니며 사진 찍기도 하지만, 요즘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 다양하게 즐기려고 노력한다. 옛날에는 타르코프스키에 미쳤지만, 지금은 ‘매트릭스’가 더 좋다. 그 안에서 스스로 발견하면 되니까. 한번 빠지면 너무 깊이 들어가는 성격이어서 책도 멀리하려고 한다.

“연기자로서 가장 큰 스승은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적인 작가들이 인간 심리를 해부해놓은 것을 보면 전율한다. 배우들이 문학에 대해 잘 알아야 하는데…. 거기서 벗어나려고 한다는 것은 지금 내가 배우로서 어떤 현실적인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지숙 씨가 ‘30년 동안 후배를 훈련시켜 보았지만 너 같은 사람은 처음 본다. 누구보다 정열적인데 청교도 정신 같은 것으로 스스로를 얽어매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편안하고 백지장 같은 모습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비운다고 하는데, 나는 그게 이해가 안 된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 무엇을 비운다는 것인가. 나는 많은 것을 채우려고 했다. 그게 나를 너무 힘들게 하니까 이제 벗어나려는 것이다. 제발 나를 편안하게 놔두자. 오히려 가볍고 일차원적인 데 시선을 돌리는 게 좋다. 뭐든지 단순한 게 좋다.”

최고의 삶은 단순해지는 것이다. 진정한 단순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복잡하게 헝클어진 실타래를 얼마나 풀어야만 하는가. 서정은 집중력이 매우 강한 배우다. 그럴듯하게 포장된 연기가 아니라, 배역 그 자체의 삶을 살려고 하는 이 배우는 이제 탄력성과 유연성까지 획득해가고 있었다. 더 넓은 시야로 삶의 비밀을 드러내주기 바란다.

주간동아 2005.06.14 489호 (p5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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