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89

2005.06.14

IOC 위원 용퇴 줄게 ‘가석방’ 다오!

김운용 전 의원 5월 말 자진 사퇴 … 8·15 사면설 정치권에서 이름 거론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5-06-09 16: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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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 의왕시 포일동 서울구치소. 비리 혐의로 구속된 정치권 인사들이 형집행정지와 가석방 등으로 풀려나면서, “‘범털’들은 다 풀려나오고, ‘개털’들만 구치소에 남았다”(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 유력 인사들이 석방되는 걸 부러워하면서, 외로이 남아 서울구치소를 지키는 범털이 있다.

    수인번호 2351번, 김운용 전 의원(전 IOC 부위원장)에게 구치소 측이 제공한 공간은 2.17평. 그는 여전히 화장실(좌변기)과 세면대, 잠자리와 식당이 공존하는 2.17평 독방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

    공금횡령 혐의 등으로 징역 2년에 추징금 7억8800만원을 선고받은 김 전 의원은 1년 4개월 동안의 수감생활로 건강이 많이 나빠졌다고 한다. 그를 더욱 옥죄는 건 남아 있는 형기. 형기는 가석방되거나 사면받지 못하면 2006년 4월22일 끝난다. 가족들은 “병원에라도 나와 있으면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이라며 ‘태권도 10단’의 건강을 걱정한다.

    “동계 오륜 유치 노력” 석방 탄원

    그가 누구인가.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전 위원장 시절 IOC의 부동의 2인자로 통했고, 2001년엔 IOC 위원장직을 놓고 자크 로게와 접전을 벌였던 세계 스포츠계의 거물 아닌가. 그가 한국에 준 큰 선물은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와 태권도의 세계화다. 특히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태권도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데는 그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그는 야누스적이다. 한국 스포츠의 위상을 높인 거목이라는 평가 뒤엔 늘 부도덕한 인사라는 비아냥거림이 따라붙는다. 국제 스포츠계 거물 인사들과의 금전적인 유착설, 태권도협회와 관련된 비리에 휘말렸고, IOC 부위원장에 당선되기 위해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방해했다는 의혹까지 받았다. 이렇듯 심심찮게 구설에 오르면서도 낙마하지 않은 건 IOC 위원이라는 지위 때문이다.

    김 전 의원은 최근까지 각종 의혹에서 방패가 되어온 ‘IOC 위원’이라는 ‘자리’에 매달렸다. 얼마 전까지도 가족을 통해 “정부가 사면, 형집행정지 등으로 석방해주면 7월 싱가포르 IOC 총회에 참석해 제명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동계올림픽을 유치하고, 태권도 올림픽 정식 종목 유지에 노력하겠다”는 뜻을 내비치면서 “국익 차원에서 나를 석방해달라”고 탄원한 것.

    그런 그가 5월 말 IOC 위원직에서 물러났다. 스스로 무장 해제한 것이다. 면회를 다녀온 인사들은 “김 전 의원이 마음을 비운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훗날 역사가 인정해줄 것”이라며 “출소하면 야인으로 돌아가 책이나 쓰고, 불러주는 데가 있으면 강의나 해야겠다”는 바람을 밝혔다고 한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5월 초까지도 결백을 주장하며 명예회복을 노리던 그가 ‘용퇴’를 선언했을까.

    정치권의 체육계 통로인 한 여권 인사는 “김 전 의원이 어려운 결단을 내려줬다”면서 “김 전 의원의 개인적 이해관계와 국익이 일치됐다”고 설명했다. ‘개인적 이해’는 가석방·사면 등 김 전 의원의 바람을 뜻하고, ‘국익’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 이후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 종목 유지 및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와 관련한 한국의 처지를 말한다.

    여권과 체육계는 그의 용퇴로 큰 부담을 덜었다. 그가 끝까지 버티다 퇴출되면 IOC에서 한국이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된다는 우려가 팽배했다.

    태권도의 올림픽 퇴출은 스포츠 외교력의 부재를 탓하는 여론의 뭇매를 맞게 된다는 점에서 여권에 악재다.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는 2007년 7월 과테말라에서 열리는 IOC 총회에서 결정된다. 평창이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되면 노무현 정부는 대선을 코앞에 두고 큰 치적을 세우게 된다.

    7월6일부터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IOC 총회에선 태권도의 올림픽 종목 퇴출 여부를 가리는 투표가 이뤄진다. 김 전 의원이 자진 사퇴하지 않았다면 싱가포르 총회에서 제명 여부 또한 투표에 부쳐질 예정이었다. 태권도의 퇴출을 막으려는 한국으로선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될 뻔한 것이다.

    김 전 의원과 로게 위원장의 껄끄러운 관계가 부담스러웠던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이하 유치위)는 싱가포르 총회에 공식 파견단을 보내지 않을 계획이었다. 김 전 의원 제명투표와 맞물리면서 동계올림픽 유치에 오히려 손해가 될 수 있다는 우려 탓이었다. 유치위는 김 전 의원이 자진 사퇴한 뒤 대표단을 싱가포르로 파견하는 걸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나섰다.

    로게 위원장을 비롯한 로게파(派) IOC 위원들이 정적(政敵)이던 김 전 의원을 보는 눈은 싸늘하다. 여권과 체육계로선 2014년 동계올림픽을 유치하고 태권도를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지켜내는 데 걸림돌이 제거된 셈이다. 로게 위원장 역시 “김운용 부위원장이 자진 사퇴한 것은 바람직한 일로 환영한다”고 화답했다.

    체육계 인사들은 최악의 상황을 피했다면서 한숨을 내쉰다. 세계태권도연맹(WTF) 조정원 총재는 “태권도의 미래를 위해 힘들고 큰 결정을 한 셈이다. 한국 태권도가 IOC 총회에 대한 부담을 덜었다. 나는 늘 ‘우물론’을 얘기하는데, 우물에서 물을 마실 때 우물 판 사람을 생각하라는 뜻이다. 김 전 의원의 용단을 보고 그 생각이 들었다”고 밝힌다.

    광복절보다 이른 시기 나올 수도?

    김 전 의원과 여권의 줄다리기는 한동안 이어졌다.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인 김정길 대한체육회장은 3월 김 전 의원을 면회했다. 김 회장은, 김 전 의원이 자진 사퇴라는 결단을 내릴지 모른다는 기대를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명예회복에 대한 의지는 단호했다. 그는 태권도를 지켜내려면 총회에 참석해 IOC 위원 제명을 막아야 한다며 배수진을 쳤다.

    “정부가 풀어준다면 싱가포르 총회에서 제명되지 않을 수 있다.”

    그는 형집행정지에 집착하기도 했다. 형집행정지는 ‘형 집행으로 인해 현저히 건강을 해치거나 생명을 보전하기 어려울 염려가 있을 때 형 집행을 일시정지하고 석방하는 제도’다. 그는 가족을 통해 법무부에 형집행정지를 요청하는 탄원서를 보냈고, 5월 초엔 김 전 의원 가족이 문재인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을 만나 담판을 지을 거라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문 수석은 그러나 ‘주간동아’와의 전화통화에서 “김 전 의원 측과 만날 계획이 없다”고 해명했다.

    연세대 출신인 김 전 의원의 명예회복 의지는 김우식 대통령비서실장을 비롯한 여권 내 ‘연세대 인맥’에도 전해졌다. 그러나 여권의 뜻 또한 단호했다. “먼저 용퇴하는 게 가장 좋은 해법”이라는 정치권의 의사는 요로를 통해 그에게 전달됐다.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김 전 의원에게 공식적으로 용퇴를 요청할 요량이었는데, 김 전 의원이 먼저 결심을 내려줬다”고 전했다. ‘석방’이라는 김 전 의원의 바람과 국익을 생각해달라는 여권의 요구가 빅딜을 이뤄낸 셈이다.

    김 전 의원은 “내가 해결할 수 있다. 나를 석방해주면 퇴출 위기에 빠진 태권도 구제에 앞장서고 동계올림픽 유치에 나서겠다”는 주장을 관철하지 못하면서, 차선으로 IOC 위원이라는 기득권을 버리는 ‘사퇴 카드’를 선택한 셈이다. 하지만 김 전 의원의 가족은 “빨리 나오셨으면 좋겠다”면서도 “용퇴에 다른 정치적 의미는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에게 공인으로서 마지막 소망이 있다면 악화된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선처다. 공교롭게도 8·15 대사면설에 그의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광복 60주년을 맞는 8월15일 대대적인 사면으로 국민통합의 일대 전기를 마련하자는 주장이 정치권에서 제기된다. 여권의 한 인사는 “김 전 의원은 가석방을 받고 싶어한다”면서 “광복절보다 이른 시기에 선물이 주어질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전망했다.

    ‘공(功)의 크기’와 ‘과(過)의 깊이’를 저울로 잴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후계자를 용납하지 않은 ‘1인 왕국’을 만들었다는 건 큰 허물이다. 전문가들은 그가 2인자, 더 좁혀서 측근조차 제대로 키우지 않은 탓에 적어도 5년, 길게는 10년 동안 한국 스포츠 외교가 허우적거리게 됐다고 지적한다. 스포츠계의 ‘거목’에서 ‘계륵’으로 추락한 김운용 전 의원. 그는 쓸쓸하게 역사의 뒤꼍으로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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