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85

2005.05.17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등정

여성 산악인들 男다른 도전정신과 승부욕 … 고산 등반 이어 스포츠 클라이밍서도 주목

  •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입력2005-05-12 10: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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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등정

    1993년 5월10일 오전 10시40분 한국 여성으로는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지현옥, 김순주 씨와 셰르파. 사진은 함께 등정한 최옥순 씨가 찍었다.

    다른 여러 분야와 마찬가지로, 등반에서도 여성은 아직 소수자집단에 속한다. 전국의 유명 산악회 중에는 여성 회원을 아예 받지 않거나 있어도 두세 명에 불과한 곳이 많다. 여성 스스로 산악인이 되길 꺼리는 면도 있겠지만, ‘산사나이’가 고유명사처럼 사용될 만큼 사람들의 머릿속엔 등반이 남성적인 스포츠로 자리 잡고 있는 점도 한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신체적·사회적 악조건 속에서도 남다른 도전정신과 승부욕으로 우리나라 등반사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긴 여성 등반가들이 있다. 그 첫머리에 등장할 만한 이들이 1982년 봄 우리나라 여성 최초로 히말라야 원정에 나섰던 선경여자산악회 회원들이다. 모두 선경그룹(현 SK그룹) 여직원들로서 네팔 히말라야의 람중히말(6986m) 등정에 성공해 큰 화제를 모았다.

    특기할 만한 일은 원정대 정길순 대장과 등정자인 기영희 부대장, 윤현옥 대원 등이 모두 한국등산학교 졸업생이라는 점이다. 74년 개교한 한국등산학교는 이후로도 유력한 여성 등반가를 여럿 배출했다. 84년 12월 안나푸르나(8091m) 동계 초(初)등정에 성공한 김영자 씨, 85년 2월8일 여성 최초로 국내 최대 빙폭인 설악산 토왕성 빙폭을 등정한 조희덕(53) 씨도 이 학교 출신이다.

    조 씨는 88년, 여성 원정대를 이끌고 한국 여성 최초로 북미 최고봉인 매킨리(6194m) 등정에 성공했다. 대한산악연맹 배경미(41) 상임이사는 “79년 고상돈(77년 우리나라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산악인) 씨가 그곳에서 추락사한 뒤 매킨리는 일종의 ‘금단의 땅’처럼 인식돼 있었다. 그런데 조 씨 팀이 등정에 성공하자 ‘여자들도 하는데 우리가 못하겠느냐’며 남성 산악인들이 앞다투어 도전장을 내는 바람에 한동안 ‘매킨리 붐’이 일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등정

    7대륙 최고봉 완등의 대기록을 세운 여성산악인 오은선 씨.

    1982년 첫 히말라야 원정 … 93년엔 에베레스트 등정



    이렇듯 뛰어난 등반가였음에도 조희덕 씨는 한동안 “토왕성 빙폭 등정은 남성과 함께 한 것이기 때문에 엄밀히 따져 초등정이 아니다”는 비난과 질시에 시달려야 했다. 91년 2월25일, 역시 한국등산학교 출신인 남난희 씨와 이현옥 씨가 한 팀이 돼 11시간50분 만에 토왕성 빙폭 등반에 성공함으로써, 여성들만의 팀워크로도 고난도 빙벽 정복이 가능함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남난희(48) 씨는 우리나라 1세대 여성 산악인의 대표 격이다. 84년 76일 동안의 백두대간 겨울철 단독 종주에 성공했고, 86년 여성으로선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강가푸르나봉(7455m)에 올랐다. 그가 쓴 백두대간 종주기 ‘하얀 능선에 서면’(수문출판사)은 등반 서적으론 드물게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등정

    2004년 12월19일 남극대륙 최고봉인 빈슨매시프 정상에 선 오은선(오른쪽), 김영미 씨.

    그러나 남 씨는 93년 결혼과 함께 돌연 등반계를 떠났고, 얼마 후부터 지리산에 자리 잡고 살며 강원 정선자연학교 교장을 지내는 등 말 그대로 초야에 묻혔다. 지난해에는 지리산 생활을 담은 에세이집 ‘낮은 산이 낫다’(학고재)를 펴내기도 했다. 남 씨는 “산을 버려 산을 얻었다”며 “예전에는 등산(登山)을 했다면, 지금은 입산(入山)을 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 서구 알피니즘(alpinism)이 추구하는, 또 그 자신이 청춘을 바쳐 추구해온 등정주의(登頂主義)를 미련 없이 버린 것이다.

    남 씨가 고산 등반을 관두기로 한 93년, 우리나라 여성 등반사에 한 획을 긋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대한산악연맹 여성원정대가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것이다. 원정은 전국에서 모여든 내로라하는 여성 산악인 50여명 중 14명을 선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장장 4개월의 합숙훈련 끝에 히말라야로 떠나 지현옥, 최오순, 김순주 씨가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음으로써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백두대간 종주 남난희 … 안타깝게 목숨 잃은 지현옥

    14명의 원정대원 중 한 명이었던 대한산악연맹 곽명옥(43) 이사는 “그때만 해도 ‘여자들끼리 뭘 하겠느냐’며 원정대장만은 남성 산악인이 맡아야 한다는 등 온갖 우려와 요구가 줄기차게 이어져 애를 많이 먹었다”고 했다.

    당시 등반대장을 맡은 지현옥 씨는 9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 산악인이었다. 에베레스트 등정에 이어 98년에는 세계 최초로 무산소 8000m 고산(히말라야 가셔브룸Ⅱ·8035m) 등정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99년 4월 안나푸르나 등정 후 하산하다 목숨을 잃고 말았다. 서른아홉 살의 아까운 나이였다.

    김순주(35) 씨의 경우 97년 매킨리와 킬리만자로(아프리카 최고봉·5895m)를 등정하는 등 꾸준히 활동하다 산악인인 하찬수 씨와 결혼하면서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2004년 해외 원정을 재개, 유럽 최고봉인 엘부르즈(5642m) 정상을 밟았다.

    14명의 에베레스트 원정대원 중에는 오은선(38) 씨도 끼여 있었다. 오 씨는 현재 대한민국 최고의 여성 등반가로 꼽힌다. 14명 대원 중 유일하게 전문 산악인으로 남은 사람이기도 하다. 2004년 5월20일 국내 여성 최초로 에베레스트 단독 등정에 성공했으며, 같은 해 12월19일 남극대륙 최고봉인 빈슨매시프(4897m) 등정을 끝으로 7대륙 최고봉을 완등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아시아 여성 산악인으로서는 세 번째 기록이며, 한국인으로서도 허영호·박영석 씨에 이어 세 번째다.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등정

    1993년 5월10일 오전 10시40분 한국 여성으로는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지현옥, 김순주 씨와 셰르파. 사진은 함께 등정한 최옥순 씨가 찍었다.

    오 씨가 7대륙 최고봉 등정에 걸린 시간은 2년 6개월. 2004년에만 다섯 곳의 봉우리를 올랐다. 오 씨는 “이름 없는 여성 산악인을 어떤 기업이 후원해주겠나. 박영석 씨의 8000m 이상 14좌 완등 도전에 동행하는 등 그나마 약간의 지명도라도 있을 때 빨리 해내야 한다는 조바심이 있었다”고 말했다.

    오 씨는 초등학생 시절 인수봉을 오르는 클라이머(climber)들을 보며 산악인의 꿈을 갖게 됐다고 한다. 85년 수원대에 입학하자마자 산악부원이 됐고, 93년 에베레스트 원정 때는 공무원이라는 안정된 신분마저 포기한 채 배낭을 짊어졌다. 이후 학습지 교사, 식당 운영 등의 일을 하며 줄기차게 산에 매달렸다.

    오 씨는 “내게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산에 대한 열망과 열정이 유난히 컸을 뿐”이라고 말했다. 또 “여자라 해서 남자들만큼 산을 타지 못할 이유가 없다”며 “힘이 달린다 하나 제 먹을 식량, 필요한 물건을 지고 가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다. 균형감이나 순발력은 오히려 나을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오은선 씨의 뒤를 잇는 여성 산악인으로는 덕성여대 산악부 출신인 김인경(31) 씨, 오 씨와 빈슨매시프를 함께 오른 김영미(26) 씨 등이 꼽힌다. 오 씨와 같은 연배인 박경희(38) 씨 또한 초등학교 교사에 두 아이를 둔 주부임에도 꾸준한 활동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고산 등반은 아니지만 스포츠 클라이밍 분야에서 큰 주목을 받는 여성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암벽타기 세계 5위, 아시아대회 6회 석권, 국내 대회 9회 우승의 경력을 자랑하는 고미영(38) 씨가 대표적이다. 2004년 10월 아시아스포츠클라이밍선수권대회 난이도 경기에서 1위를 차지한 김자인(17·일산동고 2년) 양도 유망주다.

    유난히 보수적인 등반계 … 여성 산악인 꾸준한 증가

    여성 산악인들은 “여성이 산을 포기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출산”이라고 했다. “남편의 적극적 외조가 있더라도 아이가 생기면 책임감으로 인해 목숨 건 산행에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소 보수적인 등반계 분위기, 아직은 소수라 해외 원정 등에서 ‘홍일점’이 되기 일쑤인 것도 부담스러운 점이다. 오은선 씨는 “스폰서 구하기도 쉽지 않다”고 했다. 인맥이 약한 데다 경력이 일천하고, 무엇보다 아직 여성 산악인에 대한 인식이 낮기 때문이다.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등정

    올 3월, 대한산악연맹 최초 여성 이사에 선임된 곽명옥(왼쪽), 배경미 씨.

    그럼에도 여성 산악인은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한국등산학교 측은 “입학생의 30% 이상이 여성”이라 밝혔다. 대학산악연맹 재학생 회원 회장 또한 여성이다. 올해는 대한산악연맹 최초로 여성 이사가 한꺼번에 두 명이나 탄생했다. 곽명옥, 배경미 이사가 그들이다.

    곽 이사는 “산에선 성별이라는 게 없다. 스물한 살 처음 인수봉을 오르던 그때부터 남성 산악인보다 못하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고 했다. 세 번의 매킨리 등정 경험을 갖고 있는 배 이사 또한 “학술정보위원회 위원장으로도 일하게 됐는데, 이 역시 대한산악연맹에선 처음 있는 일”이라며 “우리 등반계에서 여성의 지위가 날로 향상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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