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간동아 로고

  • Magazine dongA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커버스토리 | 위대한 한국 산악인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 진정한 영웅이여!

선의의 경쟁하며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 … 수많은 실패 딛고 목표 달성 인간 승리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 진정한 영웅이여!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 진정한 영웅이여!

세계 등반과 탐험의 역사를 다시 쓴 한국의 산악인 박영석, 엄홍길, 한왕용 씨(왼쪽부터).

벌써 5년 전 일이다. 2000년 여름, 산악인 엄홍길 씨가 K2를 끝으로 히말라야 8000m급 자이언트 봉 14개를 모두 등정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듬해엔 산악인 박영석 씨가 같은 기록을 세우고, 2003년에는 또 한 명의 산사나이 한왕용 씨가 세 번째로 14좌를 완등했다. 순식간에 한국은 8000m 봉 완등자를 세 명이나 보유한 세계 유일의 산악 국가가 된 것이다.

8000m가 넘는 고봉을 하나 등정하는 것은 훈련받은 산악인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14개의 8000m 봉을 한 사람이 모두 등정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14좌 완등은 함께 고통을 나눈 가족과 동료 산악인, 현지 주민, 그리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등산장비 업체, 끝까지 격려해준 후원자들이 있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 뒤안길에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동료들의 아픔도 함께하고 있다.

근대적 의미의 등산은 1786년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을 등정하면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까지는 등산이 아닌 삶의 한 방편으로 산을 올랐다. 순수 등반을 목적으로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 산맥을 찾은 것은 19세기 말경이었다. 이후 숱한 실패를 거듭한 끝에, 1950년 프랑스 등반대가 안나푸르나(8091m)를 등반함으로써 드디어 8000m급 등반 시대가 열렸고, 14년이 지난 64년에야 비로소 14개의 자이언트 봉이 모두 초등(初登)되었다.

그 후 히말라야 등반은 양적·질적으로 많은 발전을 거듭해, 86년 이탈리아의 등반 영웅 라인홀트 메스너에 의해 한 사람이 14개의 8000m 봉을 모두 등정하는 대기록이 달성되었다. 이후 11명의 14좌 완등자가 나왔다.

나라별로 살펴보면 한국이 3명으로 가장 많고, 이탈리아(라인홀트 메스너, 세르지오 마르티니)와 폴란드(예지 쿠쿠츠카, 크리스토프 비엘리스키), 스페인(후아니토 오이알자발, 알베르토 이누라테귀)이 각각 2명이고, 스위스(에라르 로레탕)와 멕시코(카르로스 카르소리오)가 1명씩 배출했다. 11명의 완등자 중 폴란드의 예지 쿠쿠츠카는 완등 2년 후인 89년에 로체 남벽을 등반하다가 고인이 되었다.

한 국가에서 3명 보유 세계 산악계 ‘경악’

흥미로운 것은 산악 강국이기도 한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단 한 명의 완등자도 배출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를 보면 14좌 완등이라는 대기록은 돈을 쏟아붓는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국가가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서 가능해지는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유럽 출신의 14좌 완등자들은 알프스나 피레네 산맥의 산악지방 출신이다. 이들에게는 4000m가 넘는 산들이 동네 뒷산이었다. 멕시코 또한 5000m가 넘는 산들이 도처에 흩어져 있다. 반면 한국은 어떤 나라인가. 최고봉은 1950m(한라산)에 불과하다. 히말라야에 진출한 역사도 이제 겨우 40년 남짓이다. 그야말로 ‘고요한 아침의 나라’인데 세상이 깜짝 놀랄 만한 대업을 이루어낸 것이다.

우리의 삼총사는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엄홍길(1960년생), 박영석(63년생), 한왕용(66년생) 씨는 세 살 터울이다. 세 사람은 산악계 일각에선 본의 아니게 라이벌로 알려져 있다. 한동안 이들은 14개 고봉을 향해 선의의 경쟁을 벌였으니 이를 부인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들의 경쟁은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주위 사람들이 확대해놓은 경향이 있다.

엄홍길 씨는 일반산악회(거봉산악회)에서 자란 산악인이다. 그리고 일반산악회를 거쳐 현재는 대학산악부(한국외대산악회)에 몸담고 있다. 박영석은 대학산악부(동국대산악회) 출신이다. 한왕용은 대학산악부(전주우석대산악회)에서 자라 일반산악회(개척산악회)에 몸담았다. 엄홍길 씨는 해군 출신이고 박영석은 공군, 한왕용은 육군 출신이다.

세 사람의 등반 스타일은 조금씩 다르다. ‘탱크’라는 별명을 가진 엄홍길 씨는 혼자서라도 과감히 밀어붙이는 스타일이고, 박영석은 보스 기질이 있는 등반 리더로 후배들을 잘 이끈다. 비교적 차분하고 겸손한 성격의 한왕용 씨는 두 선배의 장단점을 잘 파악해 그때그때 자신에게 맞게 활용하고 있다.

엄홍길 씨는 비교적 어렵게 히말라야를 찾은 악우(岳友)다. 그는 광야에서 모진 비바람을 견뎌내며 자란 잡초 같다. 히말라야에 보내준다면 어느 팀과도 잘 어울릴 줄 알았고, 수없이 실패도 했다. 86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시작으로 무려 15년간 온 청춘을 불태우며 28번 도전해 14개봉을 등정했다. 50%의 성공률을 기록하는 동안 10명의 동지를 잃었다.

박영석 씨는 엄홍길 씨보다 쉽게 원정을 꾸렸으나 역시 숱한 고생을 감내해야 했다. 91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도전한 이래 11년 만에 완등을 기록했고, 그 과정에서 7명의 동료를 잃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93년에는 에베레스트(8850m)를 무산소로 등정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97년엔 8000m 봉을 4개, 2000년엔 3개를 오르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 바 있다.

한왕용 씨는 두 선배보다 더 쉽게 히말라야 원정에 참여했다. 93년에 에베레스트 남동릉을 시작으로 11년 만에 완등자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엄홍길 선배와는 세 번, 박영석 선배와는 네 번 정상에 함께 올랐다. 95년 에베레스트 등정 후 내려올 때는 정상 직하에서 뒤처진 다른 팀 대원을 무려 5시간15분을 기다려 만난 뒤 기진맥진한 그를 부축해 하산하는 초인적인 휴머니즘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한왕용 씨는 단 한 명의 동료도 잃지 않았다.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 진정한 영웅이여!
성격 비슷하지만 등반 스타일 조금씩 달라

세 산사나이에겐 공통점이 적지 않다. 일단 매우 낙천적이다. 표정이 밝고 늘 잘 웃는 편이다. 단순·명료함을 좋아하며, 건장한 체력에 매우 부지런하다. 두주불사의 술 실력도 빠지지 않으며 산사나이의 의리도 매우 중히 여긴다. 웬만해선 포기하지 않는, 굽힐 줄 모르는 성격도 똑 닮았다. 요리 솜씨가 좋은 것도 공통점이다. 승부에서는 불같은 열정을 숨기지 않지만, 돌아서면 겸손한 이들이기에 ‘신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14좌 완등을 이뤘는지도 모른다.

흥미로운 것은 8000m 봉 완등으로 세계적인 고산 등반가가 된 뒤 세 영웅이 추구하는 방향이 서로 아주 달랐다는 점이다. 엄홍길 씨는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대기록을 달성했기에 미국 등 여러 선진국의 산악계로부터 로체(8516m)와 시샤팡마(8046m) 등정에 의문점이 있다는 시비를 받았다. 그러자 다음해인 2001년에 두 봉을 모두 재등정해 이들의 의문을 일축해버렸다.

그러고 나서 8000m 고봉 도전을 계속해, 에베레스트에는 세 번 오르는 등 총 19번이나 8000m 봉을 등정했다. 캉첸중가 바로 서쪽에 알룽캉(8505m)이라고 하는 봉우리가 있는데, 혹자들은 알룽캉을 15좌로 거론하기도 한다. 엄홍길 씨는 2004년 알룽캉을 등정해 세계 최초로 8000m 15개봉을 등정하는 기록을 세웠다.

박영석 씨는 다른 방향을 잡았다. 14좌 완등 이듬해인 2002년 그는 세계 7대륙 최고봉 등정에 도전해 모두 성공했다. 그리고 양대 극 지점 도보 도전에 나서 2003년 남극점에 도달했고, 올해 5월1일에는 북극점에 당도했다. 탐험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것이다. 이 기록 또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위업이다. 박영석 씨는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등반가이자 탐험가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한왕용 씨는 두 선배가 가지 않은 참신한 길을 택했다. 그동안 자신을 포함, 많은 산악인들이 등반한 8000m 봉의 ‘청소원정(clean climbing)’을 시작했다. 완등한 지 얼마 안 된 2003년 가을, 그는 곧바로 에베레스트 청소원정을 감행하고 2004년엔 세계 제2의 고봉인 K2와 마나슬루(8156m) 봉 청소를 시도했다.

그가 K2 청소 등반을 펼쳤을 때 현지에서는 마침 K2 초등 50주년 기념행사가 대대적으로 열리고 있었다. 이러한 때 캠프 2까지 올라간 한왕용 등반대가 쓰레기를 들고 베이스캠프로 내려와 소각했으니 어떤 평가를 받았겠는가. 현재 한왕용 씨가 이끄는 청소원정대는 다울라기리(8167m) 봉을 향해 가고 있다.

엄홍길 씨와 박영석, 한왕용 씨는 성공 이상으로 많은 실패를 겪은 사나이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에 좌절하지 않았다. 생사를 건 싸움에서 때로는 동료의 죽음을 겪으면서까지 그들은 악착같이 산을 올랐다. 10여년이 걸리는 긴 완등 기간에 그들은 ‘실패의 바다 속’에서 ‘가느다란 완등의 희망 줄’을 잡고 오르고 또 올랐다. 세 영웅의 처절하고 지독한 인간 승리를 향해 아낌없는 박수와 찬사를 보낸다.

엄홍길(嚴弘吉)

1986년 첫 원정 … 안나푸르나 ‘4전5기’

1960년 경남 고성군 영현면 봉발리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부모님을 따라 의정부시의 도봉산 원도봉 계곡으로 이사했다. 부모님은 등산객들을 상대로 음식장사를 했는데, 그 덕에 그는 도봉산을 놀이터 삼아 뛰놀았다.

본격적인 암벽 등반은 고등학교 시절 등산가들을 사귀면서 시작했다. 79년 고교를 졸업한 뒤 넓은 세상으로 가고 싶어서 설악산 희운각대피소에 들어가 ‘산사람’이 되었다. 1년 넘게 그곳에서 머물며 대피소에서 팔 물건을 지어 나르고 조난당한 사람들을 구조하면서, 설악산 곳곳의 암릉과 계곡을 누볐다.

81년 해군에 입대한 그는 수중폭파반인 UDT에 지원했다. 제대할 때까지 계속된 혹독한 훈련과 바다 세계의 체험을 통해 그는 강철 같은 몸을 갖게 되었다.

그의 첫 해외원정은 86년 겨울에 이뤄졌다. 라인홀트 메스너가 인류 최초로 8000m 14개봉에 완등할 무렵 히말라야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그러나 첫 원정으로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택한 것은 무리였다. 그는 여러 번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떠돌다 등정에 실패하고 살아서 돌아왔다. 그때 그는 히말라야는 정말로 무시무시한 곳임을 절감했다고 한다.

88년 대한산악연맹의 에베레스트 원정대원에 선발돼 정상에 올랐다. 하지만 93년 초오유(8201m)와 시샤팡마를 연속 등정하기까지 그는 일곱 번이나 고산 등정에 실패를 거듭했다. 그런 그에게 결정적인 가능성을 실어준 사람은 바로 스페인 바스크족 산악인인 후아니토 오이아르자발이었다. 후아니토는 영락없는 스페인판 엄홍길이다. 나이는 네 살 위지만 생긴 모습도 덩치도 등반 스타일도, 그리고 낙천적인 성격까지도 판에 박은 듯하다.

호흡이 맞은 두 사람은 95년에 마칼루·브로드피크·로체의 3봉을 연속해서 오르고, 97년엔 가셔브룸Ⅰ(8068m)봉도 함께 올랐다. 후아니토 오이아르자발의 마지막 8000m 도전인 99년 안나푸르나 도전 때 엄홍길은 기꺼이 참가했다. 이 등반에서 성공해 후아니토는 세계에서 6번째 완등자가 되었고, 스페인에서는 최고의 산악 영웅이 되었다. 안나푸르나는 엄홍길에게 가장 많은 고통을 준 봉우리였다. 바로 이때 엄홍길도 4전5기 만에 안나푸르나 정상을 밟게 되었다. 그리고 2000년 여름 K2를 끝으로 8000m 14개봉을 모두 등정하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박영석(朴英碩)

고상돈 보며 꿈 키워 … 11년 만에 놀라운 기록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 진정한 영웅이여!
1963년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에서 2남4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힘이 좋았다. 소년시절 그의 우상은 고상돈이란 산사나이였다. 중2 때 신문에서 에베레스트 정상에 우뚝 선 고상돈의 모습을 본 뒤 그 사진이 들어간 책받침만을 사용했다. 그리고 고2 때는 마나슬루원정대의 서울 시내 카 퍼레이드 모습을 보고, 동국대에 들어가 산악회원이 되겠다는 뜻을 굳혔다. 재수 끝에 꿈에 그리던 동국대 체육교육학과에 수석 합격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등산 활동을 시작했다. 첫 해외원정은 2학년 말인 85년 초 일본 북알프스 종주등반이었다. 그때 그는 높은 산에는 눈이 어마어마하게 내리고 쌓인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군대를 마치고 복학한 88년 봄 유럽 알프스 3대 북벽에 도전했으나 좋아하던 허종행 선배을 잃고 돌아왔다. 이것이 그의 역마살 낀 해외원정의 시작이었다.

89년 봄에는 꿈에 그리던 네팔 히말라야로 떠난다. 랑시사리(6415m)에 도전한 그는 돈이 부족해 시계와 옷을 팔아 간신히 귀국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 후배 2명만 데리고 랑시사리 정상에서 보았던 랑탕리(7205m)를 향했다. 역시 돈이 부족해 비행기표만 구해서 간 것인데, 이 산의 동계(冬季) 초등을 이루었다. 두 차례의 원정을 통해 그는 히말라야 원정에는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90년 여름 코무니즘 봉을 등정하고, 91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찾았다. 캠프 3으로 오르던 중 표고 100m를 낙하하는 대형사고로 중상을 입지만, 그해 겨울 다시 에베레스트에 도전해 사우스필라로 남봉 바로 밑(8700m)까지 올랐다. 93년 봄, 남서벽의 옐로 밴드(8500m)까지 오르고, 이어 코스를 바꿔 드디어 남동릉을 통해 무산소로 등정했다. 세계 최고봉을 무산소 등정한 국내 산악인은 박영석뿐이다.

이로써 그의 8000m 봉 레이스가 시작됐으나 당시 그는 전혀 이를 의식하지 못했다고 한다. 94년 가을 초오유를 등정하고, 95년 다시 에베레스트 북동릉에 도전하여 8700m까지 오른 뒤 뒤늦게 14좌 완등을 의식했다. 그리하여 97년 4개봉, 2000년 3개봉을 오르고 2001년 여름 K2를 끝으로 11년 만에 14개봉을 완등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그의 등반 스타일은 독특하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하면 캠프와 캠프 사이를 오르내리며 고소 순응을 한다. 그리고 날씨가 좋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알파인 스타일로 벼락 치듯 단숨에 등반한다. 1990년 고1 때부터 사귀어온 동갑내기 홍경희 씨와 결혼해 성우(14)와 성민(10) 두 아들을 두었다.

한왕용(韓王龍)

대학 때 체계적 등산 … 무모한 산행 안해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 진정한 영웅이여!

한왕용 씨(아래 사진 가운데가 14좌 완등 후 생태 등반으로서 히말라야를 깨끗하게 하는 ‘청소원정’에 나서고 있다.

1966년 9월 전북 옥구에서 3남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동네 뒷산은 그의 놀이터였다. 중학교 시절엔 축구부, 고교 시절에는 야구부 활동을 했고 대학 시절 산악부에 가입해 체계적으로 등산을 배웠다. 첫 해외원정은 제대 후 복학생이던 92년 초 전북학생산악연맹에서 시행한 일본 북알프스 동계등반이었다. 그해 여름 칸텡그리(7010m) 원정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으나 6500m쯤에서 고소병으로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구조대가 급히 올라와 베이스캠프로 그를 옮겼고, 며칠 후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도전에 나서 결국 정상을 밟았다.

93년에는 전북산악연맹의 에베레스트 원정대원으로 선발되었다. 그러나 등반 중 수분 섭취를 소홀히 한 탓인지 폐수종 증상이 나타나 7300m에서 내려왔다. 귀국 후 개척산악회에 가입한 그는 94년 이 산악회의 초오유 및 시샤팡마 원정대에 참여했다.

95년 에베레스트 북동릉을 등반했을 땐 같은 코스로 올라와 30분 늦게 정상에 선 고대산악회 대원 1명과 셀파 1명이 하산 중 내려오지 않자 세컨드 스텝 부근에서 무려 5시간15분을 기다려, 기진맥진해서 내려오는 대원을 부축해 8300m 지점에 있는 제5 캠프에 밤 11시가 넘어 도착했다(셀파는 추락사했다).

96년에는 우석대산악회와 포베다(7439m), 박영석 팀과 아마다블람(6812m) 정상에 올랐다. 97년이 되자 다시 자이언트 봉을 찾았다. 이해에 그는 동국대팀과 다울라기리, 한국대학산악연맹과 가셔브룸Ⅰ봉, 개척산악회팀의 로체봉 도전에 참여해 성공했으나 겨울의 마나슬루 도전에는 실패했다. 자이언트급에선 비교적 쉬운 편이라는 마나슬루의 노멀 루트가 그에겐 유독 어려웠다. 날씨 운이 없었기 때문인데 3전4기 만에 성공했다.

98년 엄홍길 팀에 참여하여 안나푸르나에 오르면서 막연하게나마 8000m 봉 완등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귀국 후 바로 짐을 꾸려 나관주와 함께 낭가파르밧(8125m) 도전에 나서 성공했다. 단 둘이 오른 이 등반을 그는 생애에서 가장 멋진 등반이라고 기억한다.

2000년 K2 등정 때는 산소통이 고장 난 선배에게 자신의 산소통을 양보하고 무산소로 올랐다. 그러나 그 후유증으로 귀국 후 네 차례나 뇌혈관수술을 받았다.

그는 언제나 겸손하고 낙천적이다. 전형적인 극지법을 선호해 무모한 산행은 피한다. 안전에 유의하며 서두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그 자신은 눈사태를 두 번 당하고, 여섯 번이나 크레바스에 빠졌지만 단 한 번도 동료를 잃은 적이 없다. 현재 에델바이스 홍보팀장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아내와 대성(6)·대산(5) 두 아들이 있다.

주간동아 2005.05.17 485호 (p16~19)

  • 김병준/ 대한산악연맹 전무이사 k2kimbj@yahoo.co.kr
다른호 더보기 목록 닫기
1159

제 1159호

2018.10.12

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