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84

2005.05.10

해학과 풍자 … 한국 만화史 큰 별

故 고우영 화백 탁월한 인물 창조 … 어려운 시절 수많은 사람들 위안

  • 박인하/만화평론가·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입력2005-05-04 12: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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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학과 풍자 … 한국 만화史 큰 별
    고우영 선생님.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개인적으로 선생님의 작품을 통해 선생님과 만난 사이가 아니던가요. 세대마다, 사람마다 선생님과 마주한 경험이 다 다를 것입니다. 나이 지긋한 50대는 추동성이라는 이름으로 선생님이 연재한 ‘짱구박사’로 선생님을 기억할 것이고, 40대는 ‘일간스포츠’의 고전극화들로, 30대는 클로버문고의 추억이 서린 ‘대야망’이나 ‘80일간의 세계일주’, ‘너와 나’로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20대는 새롭게 복간된 ‘삼국지’와 ‘일지매’, ‘십팔사략’ 같은 만화로 선생님을 기억하겠죠.

    30대 중반인 저에게는 70~80년대의 어린이 만화로 기억됩니다. ‘대야망’을 보며 최배달의 호연지기를 배웠고, ‘거북바위’에서는 물과 바람과 불을 다스리는 도술의 아기자기함이 나를 사로잡았으며, 욕심을 버리지 못한 풍갈의 슬픈 최후를 통해 삶을 배웠습니다. ‘팔비당’에서는 고유한 무술의 우월함을 배웠고,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는 쥘 베른의 원작이나 영화보다 더 재미있는 고우영식 유머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숨겨진 보물 ‘성인극화’ 배꼽 잡는 재미

    그뿐이 아니었네요. 함께 살았던 삼촌의 책장에 꽂혀 있던 고우영 성인극화는 그야말로 어린이 만화에서 맛볼 수 없던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숨겨진 보물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임꺽정’, ‘삼국지’, ‘수호지’, ‘꽃네별네’, ‘초한지’, ‘서유기’, ‘일지매’를 보았습니다. 진중하게 전개되는 서사의 재미는 물론이고 감초처럼 끼어드는 작자의 내레이션까지.



    한 시리즈, 한 시리즈를 넘나들며 어느덧 선생님의 극화는 다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고우영류’를 만들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뒤로 선생님이 보여준 ‘고우영류’를 계승한 후배가 없다는 점이죠. 춤추듯 유장한 필치와 정확하게 분할된 칸, 군더더기 없는 이야기의 매력, 게다가 당대의 삶과 숨 가쁘게 교차되는 유머를 더는 만날 수 없다는 게 참 안타깝습니다.

    선생님은 1939년 만주 번시후(本溪湖)에서 태어나셨죠. 언젠가 선생님이 쓰신 글에서 만주에서 풍족하게 자라 다양한 경험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경험이 중원을 무대로 한 고전극화의 깊은 뿌리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해방이 된 뒤 평양으로 돌아와 1946년 서울로 월남하고, 6·25전쟁이 터진 부산에서 첫 데뷔작 ‘쥐돌이’를 발표했습니다. 1952년이니까 불과 15세 어린 나이에 데뷔하신 셈이네요. 그 후 고등학교 시절, 두 형님과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가 차례로 세상을 등지자 졸지에 가장이 되었고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만화학생’에 입사해 본격적으로 만화를 그리기 시작하셨습니다.

    1960년대에서 70년대까지는 ‘짱구박사’로 기억되는 아동만화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72년 1월1일, ‘일간스포츠’ 지면을 통해 한국 만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고전이지만 고전이 아닌, 사극이지만 사극이 아닌 고우영류 사극을 발표한 것이죠. ‘임꺽정’으로 시작한 선생님의 만화는 ‘수호지’, ‘삼국지’, ‘일지매’, ‘초한지’, ‘서유기’ 등으로 이어지며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참 서글픈 것이 그 어려웠던 시절 선생님의 만화들이 모두 참혹하게 난도질당했다는 점입니다. 대사가 지워지고, 그림이 지워지고, 심지어 칸이 빠지기도 했습니다. 출판사 마음대로 칸을 늘리고 줄이기도 했더군요. 자식 같은 만화가 그렇게 다치고 병들어 있는 모습을 보는 선생님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가슴이 아픕니다.

    과거를 통해 현재 재구성하는 힘

    해학과 풍자 … 한국 만화史 큰 별
    선생님, 오규원 씨가 선생님 만화에 대해 한 말을 기억하세요?

    “우리가 고우영의 만화를 즐겨 찾는 까닭은 그의 뛰어난 유머 감각과 기지에 찬 붓장난이나 말장난을 보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앞에서 한 이야기로 짐작할 수 있듯이, 그가 결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베껴 먹는 작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대상을 적절히 재구성하여 과거를 현실 속에서 다시 읽어내고, 그것을 통해서 희화(戱畵)화한 고전을 만화로 읽는 재미 말고도 과거를 현재와 함께 바라보는 방법을 일깨워준다.”(오규원, ‘한국만화의 현실’, 열화당, 1981)

    어려웠던 70~80년대 선생님의 만화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재구성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모두 알고 있었고요.

    영화감독도 하셨죠? 아마 1991년쯤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93년에는 중국 전역을 빠짐없이 돌아다닌 뒤 중국 역사를 집대성한 ‘십팔사략’을 발표하시기도 했습니다.

    2002년 대장암 수술을 받으신 뒤 건강을 회복하시고 붓과 펜을 드셨다는 소식을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2005년 4월25일 66세, 더 많은 작품을 남기실 수 있는 때 결국 선생님은 우리 곁을 떠나셨군요.

    선생님, 평안하세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 작품인 ‘일지매’에서 사랑하던 월희가 스스로 폭포에 몸을 던진 것을 본 일지매의 애처로운 심정을 노래한 시를 선생님께 다시 바칩니다.

    한 가닥/ 매화꽃 가지에/ 청풍을 물리네/ 시리도록 그리운/ 마음속 언약이/ 보이지도 않는/ 먼 산 너머에 있어/ 내 그걸 애스러워한다네/ 그래, 꽃가지 들어/ 청풍을 바르지/ 금구슬 영글듯하게/ 매실은 없어도/ 푸른 넋이야 익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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