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65

2004.12.23

“밖에선 의인,안에선 밀고자 멍에”

오염혈액 유출 폭로한 적십자사 4인 … 각종 수상 영예에도 회사에서 조직적 왕따 ‘고통’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입력2004-12-16 15: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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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밖에선 의인,안에선   밀고자 멍에”

    올해 시민단체에서 주는 의인상을 휩쓸고 있는 대한적십자사 공익 제보자들. 왼쪽부터 이강우, 김용환, 임재광, 최덕수씨.

    12월9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타에서 반부패국민연대로부터 ‘투명사회 기여상’을 받은 대한적십자사 공익 제보자들.

    유엔(UN)이 정한 ‘국제 반부패의 날’인 12월9일 오전 11시 서울 한국프레스센타 20층 프레스 클럽. 유엔 산하 비정부기구(NGO)인 국제투명성기구(TI)는 대한적십자사(이하 적십자사) 혈액사업본부 소속 직원 4명에게 ‘올해의 투명사회 기여상’을 수상하고 ‘올해의 의인’이란 칭호를 붙여줬다. 투명사회 기여상은 국제투명성기구 한국본부인 반부패국민연대가 사회 각 부문에서 부패 없는 세상을 위해 노력해온 개인이나 단체에 주는 상.

    그로부터 5일 전인 12월4일 1% 나눔 운동으로 잘 알려진 아름다운재단은 이들에게 ‘빛과 소금상’을 수여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이름을 선사했다. 빛과 소금상은 우리 사회에서 사회 병폐와 부조리를 고발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으로 ‘풍요롭되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자’는 아름다운재단의 설립 취지가 담겨 있다.

    이들 제보 계기로 혈액 관리 대대적 수술

    이들은 2003년 9월부터 1년여간 적십자사 혈액사업본부가 에이즈와 B·C형 간염, 말라리아 바이러스에 감염된 혈액을 환자 수혈용과 의약품 제조용으로 공공연하게 유통한 사실을 주간동아를 비롯한 각 언론과 부패방지위원회에 폭로한 주인공들. 그동안 이른바 ‘적십자 내부 제보자’로 알려졌을 뿐, 이름을 전혀 공개하지 않았던 이들은 이번 수상을 계기로 전격적으로 자신들의 얼굴과 이름을 사회에 알렸다.



    적십자사 혈액사업본부 중앙혈액원 운영과 김용환씨(46), 동부혈액원 운영과 임재광씨(39), 남부혈액원 검사과 이강우씨(43·임상병리사), 중앙혈액원 총무과 최덕수씨(45)가 바로 그 주인공. 이들이 오염혈액 유통 비리를 폭로하게 된 계기는 2003년 6월 모 방송국의 시사프로그램이 진행한 ‘혈액관리 부실 실태’ 취재에 우연하게 참가하면서부터였다. 이들은 적십자사의 방만한 혈액 관리 실태를 바라보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다.

    “오염된 혈액이 공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이를 모른 체한다는 것이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다가왔습니다. 남의 일이라고 여겨지던 것이 바로 내 일로 생각되는 순간, 내 아들 딸이 수혈받는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이들은 곧바로 내부 혈액전산 시스템을 뒤져 과거 혈액 검사에서 에이즈와 간염 말라리아 매독 검사에서 양성반응을 보인 혈액이 시중에 유출된 사례를 찾기 시작했고, 방대한 양의 자료를 모으는 데 성공했다. 그러고는 언론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이번엔 언론이 그들을 외면했다. 아무도 그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은 것. 심지어 적십자사의 혈액사업을 관리, 감독하는 보건복지부 출입 기자들도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그들의 말에 유일하게 귀를 기울인 언론사가 바로 주간동아와 YTN 기동취재팀이었고, 부패방지위원회는 그들의 든든한 지원자가 됐다.

    “밖에선 의인,안에선   밀고자 멍에”

    12월9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타에서 반부패국민연대로부터 ‘투명사회 기여상’을 받은 대한적십자사 공익 제보자들.

    주간동아와 YTN의 지속적인 보도에도, 적십자사의 오염혈액 유출과 수혈 감염에 대해 외면으로 일관하던 언론은 부패방지위원회가 적십자사의 이런 행위를 ‘부패 행위’로 간주하고 감사원에 감사를 의뢰하면서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언론이 연일 적십자사 오염혈액 문제를 보도하기 시작했고, 적십자사와 보건복지부는 그때서야 비로소 자체 내부 조사에 들어갔다.

    감사원 감사와 내부 조사 결과 오염된 혈액에 의해 에이즈에 감염된 사람은 6명, 간염을 얻은 사람은 10명, 말라리아에 감염된 사람도 4명이 확인됐다. 매독 균에 감염된 혈액도 유통된 사실이 적발됐다. 적십자사는 이런 조사 결과도 숨겨오다 결국 주간동아가 이런 사실을 단독 입수해 발표하면서 수혈사고 사실을 모두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게시판에 비방 글 도배 … 노조는 해임 건의 연판장 돌려

    이로 인해 적십자사는 2003년 12월 서영훈 총재와 사무총장, 혈액사업 본부장, 수혈연구원장 등 관련 인사들이 사직하거나 해임됐고 관련 직원 12명이 징계 처분을 받았다. 이와 관련, 12월 말 건강세상네트워크와 환자단체 등 시민단체들은 오염혈액 유통에 대한 책임이 있는 당시 김화중 보건복지부 장관과 질병관리본부장 등 16명을 검찰에 고발했지만 결국 일선 직원들만 처벌을 받았다. 올 4월 검찰의 수사는 27명을 불구속 기소하는 등 용두사미로 끝이 났다.

    비록 자신들의 공익 제보로 국무총리실 산하에 혈액안전관리개선기획단이 설치되었고, 보건복지부에 혈액안전관리 전담 부서인 혈액정책과가 신설되는 등 혈액 안전관리에 진전이 있었지만, 이들은 지금 절망에 빠져 있다. 적십자사의 직원들과 노조는 이들을 ‘내부의 적’ 또는 ‘불순세력’으로 몰아붙이며 ‘집단따돌림’을 하고 있기 때문.

    심지어 이들이 유엔 산하기관으로부터 ‘의인’ 칭호를 받은 다음날인 12월10일 적십자사 내부 직원용 홈페이지에는 “이들 4명의 직원이 ‘투명사회 기여상’을 받았다면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에게도 이 상을 줘야 한다”는 내용의 게시물이 등장했다. 즉 이들 공익 제보자가 살인마 유영철보다도 더 나쁜 사람들이라는 의미. 더욱이 이 게시물을 올린 사람은 바로 이들 직원과 같은 혈액사업본부 소속 직원이었다. 밖에서는 칭찬을 받고 있는 인물들이 조직 내부에서는 연쇄살인범과 같은 취급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그동안 적십자사와 적십자사 노조가 이들에게 가한 집단적 압력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적십자사는 2003년 12월엔 에이즈와 관련된 정보를 유출했다며 이들을 고발해 그중 김용환씨는 서울 중부경찰서에 긴급 체포돼 48시간 동안 갇혀 있다가 무혐의로 풀려나왔다. 이들 공익 제보자를 보호해야 할 노조는 오히려 이들의 해임을 건의하는 연판장을 끊임없이 올려 적십자사를 압박했다.

    심지어 제보자들을 해직하지 않으면 자신들을 해임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더욱이 오염혈액 유통과 관련 재판에 회부된 27명을 위한 모금 운동을 펴 변호사 비용을 대는 한편, 이들에겐 ‘조직의 밀고자’란 멍에를 씌웠다. 자체 진급시험에는 ‘내부 제보자에 대해 논하라’는 문제가 나오기도 했다. 이런 압박과 어려움 속에 김용환씨는 척추질환을 얻어 현재 산업재해 판정을 기다리고 있으며, 임재광씨는 최근 지병인 당뇨 때문에 쓰러져 한동안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더 이상 공익 제보로 상을 타는 사람들이 없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우리의 노력이 깨끗한 혈액을 공급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으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계속되는 적십자사와 노조, 그리고 직원들의 압력과 비난에도 신상을 공개한 공익 제보자들은 맑은 혈액을 공급하기 위한 파수꾼 구실을 더욱 충실히 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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