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64

2004.12.16

범죄피해자구조금 ‘있으나마나’

금액 적은 데다 요건도 까다로워 … 수사·재판과정서 사생활 침해·명예훼손 등 2차 피해도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입력2004-12-09 18: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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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죄피해자구조금 ‘있으나마나’

    숨진 채 발견된 포천 여중생 엄모양의 빈소를 찾아 울부짖는 어머니(왼쪽).

    지난해 발생한 살인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A씨는 10월 말 범죄피해자구조금(이하 구조금) 신청서를 냈다. 최근에야 비로소 범죄로 인한 사망자 유족에게 국가가 지급하는 구조금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건 이후 A씨는 두 자녀와 시부모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지만, 급작스런 남편의 죽음이 가져다준 충격에 시장에서 생활 잡화를 팔던 일조차 그만둬 생활고를 겪어왔다. 그러나 A씨가 구조금을 받기 위해서는 2005년 5월까지 기다려야 하는 형편이다. 구조금 지급을 결정하는 범죄피해구조심의회가 내년 5월에나 열리기 때문이다.

    사망한 유족 1000만원, 부상자에겐 최고 600만원



    우리나라는 1987년부터 범죄피해자 구조정책의 일환으로 구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그러나 A씨의 사례에서 보듯이 구조금은 범죄 피해자들에게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신속하게 지급이 이뤄지지 않는 데다 △금액도 매우 적고 △요건이 까다롭기 때문. 현행 제도는 사망한 유족에겐 1000만원, 부상자에겐 300만∼600만원만 지급하고 있어 실질적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다. 또 사망한 유족에 대해서는 생계유지가 곤란할 경우에만, 부상자에 대해서는 3급 이상의 장애 판정을 받았을 경우에만 지급하고 있다. 또 해마다 5월과 10월 두 차례만 열리는 범죄피해구조심의회를 통해 일괄 처리하기 때문에 당장 급한 병원비나 생활비를 구조금으로 충당하려는 것은 불가능한 형편이다.

    범죄 피해자의 권리 보장이나 지원 정책에서도 우리나라는 후진국 수준이다. 피해자가 연락을 전혀 받지 못한 상태에서 재판이 종결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남은 물론,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명예훼손이나 사생활 침해, 정신적 충격 등 2차 피해를 보고 있다. 구조금은 앞서 언급한 대로 실효성이 미미한 형편. 법무부 김덕재 인권과장은 “이러한 이유로 ‘범죄 사실을 신고해도 소용없다’ ‘수사나 재판으로는 망신만 당한다’ ‘어차피 원상회복은 안 된다’라는 불신이 팽배한 형편”이라고 지적했다.



    범죄피해자구조금 ‘있으나마나’

    포천 여중생 엄모양을 찾기 위해 전국에 뿌려졌던 전단지.

    형사사법 절차에서 피해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문제뿐 아니라, 피해자가 겪는 정신적 충격과 극심한 스트레스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전무한 형편이다. 조용범 임상심리학 박사는 “유영철 연쇄살인사건 유족 중 한 명이 자살한 사건에서 보듯 범죄 피해자들이 겪는 후유증은 심각한 수준이지만, 이런 범죄 피해자의 고통 치료에 대한 사회적 지원은 전무한 형편”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후진적인 범죄 피해자 지원제도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각계에서 나타나고 있다. 최근 경찰청은 수사국 산하에 범죄피해자대책실을 마련하고 일선 경찰관들에게 수사 단계에서부터 피해자를 배려하도록 교육·홍보 활동을 하고 있다. 범죄피해자대책실 윤승영 경정은 “일선서 형사·강력반마다 피해자 지원 담당자를 정해 피해자에게 각종 지원책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게 하고, 담당자를 통해서만 수사 목적으로 피해자를 만나게 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검찰청은 10월1일부터 각 지방검찰청에 피해자 지원 담당관을 배치하고 형사 절차에 관한 정보 제공, 각종 문의에 대한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총무부 전강진 검사는 “과거에는 고소·고발 사건에서만 형사절차 진행에 관해 통지했는데, 살인 강력 교통 산업재해 등 주요 사건에 대해서도 피해자가 원할 경우 통지하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범죄피해자구조금 ‘있으나마나’

    범죄피해자 지원 시설의 상담 장면.

    민간 차원서 피해자 지원 시도 … 재원 마련엔 ‘어려움’



    한편 민간 영역에서도 범죄 피해자 지원에 관한 노력이 시도되고 있다. 12월 한 달 시범운영을 한 뒤 2005년 1월부터 본격 활동을 시작하는 한국범죄피해자지원중앙센터(KCVC)가 그것. 중앙센터는 범죄 피해자에게 심리, 의료, 법률적 지원을 제공하는 비영리 민간단체. 법과학연구소 범죄분석실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최해현 사무처장은 “상담전문가들과 자원봉사자, 그리고 심리·의료·법률 지원을 해줄 수 있는 전문기관과 연계해 피해자를 지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중앙센터와 같은 피해자지원센터는 선진국에서는 이미 보편화된 시민사회 활동 영역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04년 9월 경북 구미와 김천에 설립된 피해자지원센터(www.victim.or.kr)가 첫 사례로 피해자지원센터는 현재까지 약 850명의 피해자에게 법률·심리·의료적 지원을 제공해왔다. 살인사건으로 가족을 잃고 정신적 충격에 휩싸인 유족과 경찰서, 검찰청, 법원에 동행하고 정신과 치료도 지원하거나 지속적인 범죄 노출 위험이 있는 피해자에게는 쉼터를 제공하는 것 등이 주요 활동사항.

    박광배 교수(충북대 심리학과)는 “살인사건 유족들의 정신적 충격을 치료하기 위한 심리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것도 유용한 지원 방법”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가 입회한 가운데 살인범과 유족을 만나게 해 뉘우침과 용서를 도모하거나, 유족들의 모임을 주선하여 서로의 아픔을 달래줄 수 있게 하는 것 등이 가능한 프로그램. 이 같은 심리 프로그램은 실제 선진국에서 시행되고 있다.

    한편 이 같은 범죄 피해자 지원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재원 마련도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이미 미국, 일본, 프랑스 등 선진국에서는 피해자구조기금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일본은 81년 재단법인 범죄피해구원기금을 창설하고 범죄 피해자의 자녀들 중 경제적 곤란을 겪는 이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범죄 피해자 구원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스위스의 경우 벌금 등을 피해자 손해를 회복하는 목적으로 사용해야 함을 형법에 명시하고 있다. 이에 김덕재 인권과장은 “우리나라도 벌금이나 몰수금, 추징금 일부를 귀속시키거나 기부금 수수를 허용하는 등 재원 조달을 통해 피해자구조기금 설립 방안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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