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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미국 대선 1차 TV토론 관전기 | 힐러리는 웃었고 트럼프는 하소연했다

딱 30분 매너 지킨 트럼프, 후반전 힐러리 반격에 무너져

미국 대선 1차 TV토론 관전기 | 힐러리는 웃었고 트럼프는 하소연했다

“클린턴 국무부 장관님! (호칭이) 괜찮은가요? 맘에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9월 26일 저녁 9시(현지시각)부터 미국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대통령선거(대선) 후보와 첫 TV토론에 나선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대선후보는 토론 초반 힐러리를 다정하게 쳐다보며 이렇게 물었다. 평소 클린턴을 ‘사기꾼(crooked) 힐러리’라 부르고 ‘면전에서 모욕 주기’가 주특기인 트럼프의 변신에 힐러리는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트럼프는 변신의 귀재구나. 아니면 참모들과 고민을 아주 많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클린턴 장관님’ 호칭에는 두 가지 포석이 깔려 있었다. 클린턴이 버락 오바마 행정부 1기 국무부 장관으로서 ‘실정(失政)’에 책임이 있다는 점을 부각하는 동시에 ‘매너 있는 남자’로 유권자로부터 점수를 따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 뉴욕 주 헴프스테드 호프스트라대에서 열린 이번 TV토론의 초반, 적어도 30분까지 트럼프는 자신의 전공 분야인 경제 이슈에서 전과 다른 정중한 매너로 힐러리와 막상막하 설전을 벌였다. 미국 언론들은 “적어도 20~30분까지는 트럼프가 우세했다”고 입을 모아 평가했다.

토론이 열리기 바로 전날 종합편성채널 채널A 시사 프로그램은 경력과 말주변에서 힐러리에게 달리는 트럼프가 이기는 데 필요한 비결을 제시했다. 핵심은 두 가지. 경선 전부터 ‘막말 이미지’가 굳어진 트럼프가 돌연 ‘매너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실물경제 외 정무 경험이나 외교안보에 대한 이해가 없는 그가 돌연 ‘열심히 공부한 흔적’을 보여준다면 이 또한 유권자의 환심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토론 초반까지 트럼프는 이 조언을 아주 충실하게 따랐다.



“휴, 잘 들었습니다” 여유만만한 힐러리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클린턴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찬성 경력을 지적하며 공세를 벌이던 트럼프는 클린턴이 납세 기록 제출 누락 등 그와 관련한 의혹들을 제기하자 조금씩 무너졌다. 클린턴은 “당신이 말해온 만큼 부자가 아니거나, 주장해온 만큼 자선 활동을 하지 않았거나, 사업상 뭔가 감춰야 할 게 있어서 그런 것 아니냐”고 일격을 날렸다.

트럼프는 납세 기록을 아직 제출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현재 감사가 진행 중이다. 언제든 공개할 수 있다. 클린턴이 개인 서버로 주고받은, 아직 공개하지 않은 3만3000건의 개인 e메일을 공개하면 나도 당장 납세 자료를 공개하겠다”며 네거티브 공방에 불을 지폈다. 하지만 클린턴은 “트럼프가 또 한 번 미끼상품(bait and switch)을 판매하고 있다”고 받아친 뒤 “개인 e메일 계정을 사용한 것은 실수였다”고 거듭 유감을 표명했다. 트럼프는 말을 자르며 “실수가 아니라 고의로 한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이때부터 트럼프는 매너를 지켜야 한다는 전략과 ‘막말 본능’이 내적으로 충돌하는 듯한 신호를 보이기 시작했다. 물을 잇달아 마시고 연신 코를 훌쩍거렸다. 오른손 검지를 치켜들고 흔드는 특유의 동작을 연달아 선보이며 이전의 트럼프로 되돌아갔다. 특히 클린턴의 발언에 끼어들면서 반복적으로 “틀렸다(Wrong)” “거짓말이다(It’s lies)”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일 오전 CNN이 방송한 ‘첫 TV토론에서 보게 될 트럼프의 토론 기술 6가지’가 현실화한 것이다. 6가지란 ①면전에서 모욕 주기
②대상과 주제를 가리지 않고 공격하기 ③상대 발언 깎아내리기 ④발언 잘라먹기 ⑤자신의 화제 발언 재탕하기 ⑥궁지에 몰리면 “이게 다 언론 탓”이라며 언론인 공격하기 등이다.

이에 비해 클린턴은 경제 분야 토론이 끝나고 자신의 전공 분야인 국내 문제와 안보 문제로 들어서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느낀 듯 트럼프를 공격하며 안정감 있게 토론을 주도했다. 토론 후반 트럼프가 자신은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지지하지 않았다며 지루하게 변명을 늘어놓자 “휴, 잘 들었습니다(Whew, OK)”라고 큰 소리로 말한 뒤 퍼스트레이디와 상원의원, 국무부 장관을 내리 역임하며 미국과 전 세계를 경험하면서 쌓은 전문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토론 내내 물을 마신 트럼프와 달리 클린턴은 물도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자주 가벼운 웃음을 지어 보이며 지지자들에게 ‘건강하다’는 이미지를 주려 애썼다.

트럼프는 마치 ‘공부 안 한 수험생’처럼 토론 내용면에서도 클린턴에게 뒤졌다. 자신의 전공 분야인 경제 문제에서도 사실(fact)을 틀렸고, 언론들은 실시간 ‘팩트 체커’ 코너를 통해 포화를 퍼부었다. 트럼프는 “포드 자동차가 떠나가고 있다. 일자리 수천 개가 미시간과 오하이오 주에서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뉴욕타임스’ 등 언론들은 “포드가 소형차 생산공장을 멕시코로 옮긴 것은 맞다. 하지만 지난해 오하이오와 미시간에서는 각각 7만8300개와 7만5800개 새 일자리가 생겼다. 8월 실업률도 각각 4.9%, 4.8%로 전국 평균과 비슷한 수준”이라며 ‘거짓’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트럼프는 “우리는 한 해 8000억 달러(약 878조4000억 원) 정도의 무역적자를 보고 있다”고 했는데 지난해 미국 무역적자는 5000억 달러(약 546조9500억 원) 규모였다.



팩트 자주 틀려 ‘공부 안 한 수험생’ 조롱

힐러리가 트럼프에게 날린 결정적 ‘한 방’은 토론이 끝날 무렵 나왔다. 트럼프는 사회자인 NBC 앵커 레스터 홀트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주요 정당에서 첫 여성 대선후보가 나왔다. 이달 초 당신은 클린턴 국무부 장관이 ‘대통령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했는데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경제와 국내, 안보 이슈 토론을 마친 사회자가 토론 종료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질문으로 보였다. 하지만 트럼프는 대뜸 “힐러리는 대통령직을 수행할 스태미나가 없다.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등과 협상을 벌여야 하는데 그럴 만한 스태미나가 없다는 말”이라며 클린턴의 아킬레스건 같은 건강 문제를 건드렸다.

물론 클린턴도 가만있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 “나에게 스태미나가 없다고 말한 저 사람은 여자를 돼지, 개, 뚱보로 비유했다”고 쏘아붙였다. 클린턴은 “트럼프가 (내가 국무부 장관직을 수행할 때처럼) 비행기를 타고 112개국을 순방하고 의회 상임위원회에서 11시간 증언한 뒤에야 나와 스태미나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받아치며 트럼프의 여성혐오 발언을 공격했다. 이어 “미인대회를 좋아하는 트럼프는 대회에 참가한 여성을 ‘미스 돼지(Miss Piggy)’라고 부르더니, 라틴계 여성에게는 ‘미스 가정부(Miss Housekeeping)’라고 했으며, 임신한 여성은 고용자에게 짐이라고도 했다”고 조목조목 지적했다.

역습을 당한 트럼프는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또 “힐러리와 그 가족에게 정말 독한 말을 하려 했지만 적절치 않아 도저히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힐러리는 나에 대한 네거티브 광고에 수백만 달러를 사용했다”고 하소연하듯 말했다. 하지만 토론 시간이 끝나면서 트럼프는 억울한 표정으로 단상을 내려와야 했다.

미국 주류 언론은 대체로 클린턴의 승리를 선언했다. 토론회가 끝나고 떠나기 전 트럼프는 방송 인터뷰에서 “클린턴은 나를 부당하게 공격했다”고 하소연했다. 그와 부인 멜라니아 트럼프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반면 남편 빌 클린턴의 손을 잡은 힐러리는 밝은 표정으로 언론 인터뷰 없이 행사장을 총총 떠났다. 




입력 2016-09-30 17:14:36

  • 신석호 동아일보 기자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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