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55

2004.10.14

인권 짓밟는 무차별 전과자 조회

경찰 외 국가 기관도 요청 한 해 1000만명 … 평범한 삶 꿈꾸는 전과자들 피해 속출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4-10-08 12: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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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 짓밟는 무차별 전과자 조회

    경찰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피의자.

    서울에서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는 유모씨(32)는 얼마 전 황당한 일을 당했다. 부동산 구입을 계약했던 이가 다음날 갑자기 사무실로 찾아와 “알고 보니 전과자더라. 내 돈 떼먹으려고 부동산 차린 거 아니냐”며 계약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는 유씨가 결혼 전 폭행 시비에 휘말렸던 일, 음주 운전 사고를 냈던 일 등 세세한 전과를 거론하며 기어이 계약금을 돌려받아 갔다.

    결혼 전 3차례 전과가 있었지만 공인중개사 자격을 취득한 뒤 결혼해 평범한 삶을 살고 있던 유씨의 일상은 이 일로 파괴돼버렸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아내와 아들, 사무실 식구들까지 유씨의 ‘과거’를 알게 된 것. 유씨는 자신의 전과기록을 임의로 조회하고 유출한 이를 찾아내 책임을 묻기 위한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개인의 전과기록이 광범위하게 무차별 조회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2001년부터 올 8월 말까지 경찰이 전과기록을 조회한 건수가 5711만여건에 이르는 등 1년에 1000만건 이상씩 전과기록 조회가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청이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에게 국정감사 자료로 제출한 ‘연도별 지역별 전과 조회 현황’에 따르면, 경찰청의 전과기록 조회 건수는 △2001년 1189만여건 △2002년 1914만여건 △2003년 1591만여건, 올해는 8월 말까지 1015만여건에 이른다.

    이 안에는 국가 기관이 전과기록 조회를 요청한 사항도 포함돼 있는데, 감사원의 경우 8월1일 공무원 8961명의 전과기록 조회를 비롯해 2001년 이후 모두 16차례에 걸쳐 8만4000여명에 대한 전과기록 조회를 요청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가보훈처도 16만6000여명의 국가유공자들의 범죄 경력을 1년에 두 번씩 조회하는 등 이 기간 모두 255만4000여건의 전과기록 조회를 요청했다.



    최종면접서 번번이 탈락

    무차별 전과기록 조회는 경찰만 하는 게 아니다. 2001년부터 2004년 8월 사이에 국군기무사령부 270만3000여건, 검찰청 223만9000여건, 국가정보원이 100만8000여건의 전과기록을 각각 조회하는 등 경찰을 제외한 다른 기관의 자체 전과기록 조회 건수도 적지 않다.

    인권 짓밟는 무차별 전과자 조회

    수배전단.

    이 때문에 광범위한 전과기록 조회가 심각한 인권 침해를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유씨는 “계약자가 검찰에 근무하는 자신의 고모부에게 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주고 전과기록 조회를 부탁했다고 말했다”며 “해마다 1000만건씩 전과기록 조회가 이뤄지는 상황에서 궁금한 사람 이름 한두 명 끼워넣는 것이 대수겠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인터넷 비공개 커뮤니티 ‘전과자 쉼터’의 운영자 한모씨도 “대부분의 전과자들은 자신의 전과기록이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최종면접 과정에서 번번이 떨어지고, 간신히 취업해도 얼마 뒤면 ‘당신 전과자인데 그만 나가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는 상황에서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느냐”며 “전과기록 노출은 평범한 삶을 꿈꾸는 전과자를 또 다른 범죄에 빠지게 만드는 주범”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로 부산에 사는 천모씨는 “몇 년 전 쌍방 폭행 사건에 연루돼 즉심에서 28만원의 벌금형을 받았다가 여기에 불복, 정식으로 검찰 수사를 요구해 기소 유예된 적이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입사 지원을 했다가 최종면접에서 떨어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회사 관계자가 그 사건 이야기를 꺼내더라”며 “이래서야 앞으로 내 삶에 희망이 있겠느냐”고 허탈해했다. 상당수 전과자들이 전과기록 공개에 따른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국가 기관이 일반인에 대해 일괄적으로 전과기록 조회를 실시하는 데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감사원이 금융감독원(이하 금감원)에 대한 ‘신용카드 특별감사’ 과정에서 금감원 직원 전원의 전과를 조회한 사실이 8월 밝혀진 후, 금감원 노조가 감사원장에 대한 고소 의사를 밝히는 등 논란이 일기도 했다.

    전윤철 감사원장은 8월24일 국회법제사법위원회에 출석해 “금감원 직원 중 비위 사실이 있는 사람이 채용됐는지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전과기록을 조회했던 것”이라며 “금감원도 금융감독 차원에서 해당 은행 직원들에 대해 전과 조회를 하고 있으며, 행정자치부 등도 전부 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노회찬 의원은 “전과기록 조회에 대해 규정한 ‘형의 실효 등에 관한 법률’ 어디를 봐도 모든 직원을 상대로 전과기록을 조회하라는 내용은 없다. 감사원의 행위는 국가인권위원회 제소감”이라고 주장했다.

    평범한 시민들 보호되고 있나

    현행 ‘형의 실효 등에 관한 법률’은 본인이 전과기록 조회를 신청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범죄수사 또는 재판에 필요한 경우 △형의 집행, 사회봉사·수강명령의 집행을 위해 필요한 경우 △보호감호·치료감호·보호관찰 등 보호처분 또는 보안관찰 업무의 수행을 위해 필요한 경우 △다른 법률에 범죄경력 조회 및 수사경력 조회와 그 회보를 하도록 규정되어 있는 경우 △국가 안전보장이나 공공의 안녕·질서유지 또는 공무수행을 위해 불가피하다고 인정되는 경우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경우 등에 한해 조회 목적에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로만 전과기록을 조회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인권 짓밟는 무차별 전과자 조회

    경찰청이 민노당 노회찬의원에게 제출한 연도별,지역별 전과 조회현황.

    김정진 변호사는 “이 법의 기본 정신은 전과기록이 알려질 경우 국민의 사회생활과 프라이버시 보호에 치명적인 피해가 발생할 수 있으니 최대한 전과기록 조회를 줄이자는 것”이라며 “경찰에서 해마다 1000만건씩 전과기록을 조회하고 있는 상황에서 검찰과 국정원이 또 상당수의 전과기록을 조회하는 것은 수사상 필요를 넘어서는 것으로 인권침해 소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김변호사는 해마다 국가유공자 전원의 전과기록을 조회하고 있는 국가보훈처에 대해서도 “‘보상을 정지하거나 이 법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고자 하는 경우 범죄 경력의 확인을 요구할 수 있다’고 규정한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 제79조의 정신을 넘어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 같은 논란에 대해 해당 부서 측은 전과 조회는 반드시 필요한 경우 최소한만 허용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형의 실효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전과기록을 조회할 때는 반드시 용도, 작성자 및 조회자의 성명과 기타 필요한 사항을 명시하도록 되어 있고, 전과기록을 누설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받는데 누가 함부로 전과기록을 조회하고 공개할 수 있겠느냐”며 “전과기록 조회는 범죄 용의자를 수사하거나 상습범을 가려내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을 뿐, 평범한 시민들의 기록은 철저히 보호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해 현직 경찰관이 과거에 사귀었던 여인에게 새 남자친구의 전과기록을 알려주었다가 징계를 받는 등, 전과기록 공개에 대한 불안은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에 대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참여연대 등 7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프라이버시법 제정을 위한 연석회의’의 이은우 변호사는 “전과기록 조회 남용 문제는 기본적으로 국가와 사회 구성원들의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의식이 제고돼야 해결될 수 있다”며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전담 독립기구를 설치하는 등 프라이버시 존중을 명문화하는 법적,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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