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55

2004.10.14

'눈엔 쏙 혀엔 착’ 감기는 요리 작품

  • chjparis@hanmail.net

    입력2004-10-08 1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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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엔 쏙 혀엔 착’ 감기는 요리 작품

    껍질을 바삭하게 구운 닭 가슴살 구이. 속까지 퍽퍽하게 익기 전의 타이밍을 잡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1990년대 전까지만 하더라도 프렌치 레스토랑은 특급호텔 전유물이었다.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한 독립된 프렌치 레스토랑은 이제 규모가 크고 이국적이며 중후한 곳에서부터 아담하지만 포근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내는 곳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또한 고급 프렌치 요리를 내놓는 레스토랑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대중적인 음식을 선보이는 비스트로나 브라쓰리 형태의 식당도 등장하면서 프렌치 요리를 다양하게 맛볼 수 있다. 최근에는 규모는 작지만 끊임없이 전문성을 키워나가는 독립 레스토랑들의 약진이 두드러져 보인다.

    ‘라뜰리에’에 들어서면 아담하고 밝은 공간이 눈에 확 들어온다. 어쩌면 프렌치 요리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안도감을 준다고 할까. 너무 화려하거나 무거운 분위기는 때로 주눅 들게 해서 음식을 맛있게 먹게 하기보다는 음식 외적인 형식에 신경 쓰게 한다. 그런 면에서 라뜰리에는 편안하고 포근하다.

    라뜰리에 메뉴판에는 일품요리들만 있고 정찬요리가 없다. 정찬요리는 작은 칠판에 날마다 새로이 적힌다. 그날그날 신선한 재료를 준비하고 그 재료에 따라 정찬요리가 정해진다. 이 요리 저 요리를 맛보겠다는 욕심에 몇 가지 전채요리와 주 요리를 주문했다. 전채요리가 나오기 전에 입맛을 돋우기 위해 ‘아뮤즈 부시’(‘입을 즐겁게 한다’는 뜻으로 식욕을 돋우는 요리)로 얇게 썬 바게트에 푸아그라 테린과 간 사과 졸임이 얹어져 나온다. 손으로 들어 입에 넣으니 바게트 빵과 어우러져 입속에 녹아내리는 푸아그라의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 말 그대로 입을 즐겁게 한다.

    호사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주문한 전채요리 ‘캐비어를 곁들인 게살 샐러드’에서는 간결하게 어우러진 식재료 간의 색 조화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접시 바닥 전체에 토마토 소스가 깔려 있고 가운데 곱게 간 아보카도와 게살, 그리고 캐비어가 층층이 쌓여 있는데, 이를 한꺼번에 떠서 먹으니 맛에서도 깔끔한 조화가 혀를 타고 들어온다. 이어 나온 전채요리 ‘단호박 라비올리’는 아스파라거스 소스와 시금치로 색을 낸 만두피가 잔잔한 녹색 톤을 연출하듯이 부드럽다. 앞선 요리 때문에 조금 욕심이 생겼는지 3개의 만두피 색깔과 내용물이 서로 달랐으면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욕심을 접고 주 요리로 넘어가자.

    '눈엔 쏙 혀엔 착’ 감기는 요리 작품

    입 속에서 녹아내리는 푸아그라 테린과 샐러드. 프랑스에서도 고급요리다.

    ‘오늘의 해산물과 생선’은 해산물 모듬요리다. 붉은 큰 새우와 껍질을 바싹 구워 짙은 회색에 갈색 기운이 도는 농어, 그리고 키조개 관자가 푸른 껍질콩과 함께 곁들어져 나왔다. 방금 전의 욕심을 채워주고도 남는다. 바삭하면서도 촉촉한 농어와 센 불에서 버터로 살짝 익혀낸 조개 관자, 새우가 크림 소스와 어우러지면서 해산물의 싱그러움이 입 안에 그윽하게 감돈다.



    ‘오리가슴살 구이’는 껍질 부분은 바삭하고 살은 붉은색이 감돌게 잘 익혀져 있다. 사실 많은 이들이 오리나 닭과 같은 가금류는 완전히 익혀 먹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너무 익히면 육즙이 다 빠져나가 퍽퍽해져 맛이 없다. 하지만 완전히 익기 직전의 타이밍을 잡아내는 쿠킹이야말로 가금류의 맛을 제대로 느끼게 한다. ‘양갈비 구이’도 센 불에서 육즙을 잘 보존해 고기의 맛을 살리고 있다. 인심 좋게 넉넉히 두른 소스가 고기의 맛을 지배할까 하는 우려와는 달리 어울림이 좋다.

    군더더기와 같은 장식 없이 식재료만의 색채 조화는 시각적 즐거움을 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요리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식재료의 맛을 최대한 살리려는 조리법일 것이다. 라뜰리에는 요리의 가장 중요한 기초를 다시금 일깨워준다.

    '눈엔 쏙 혀엔 착’ 감기는 요리 작품

    작아서 편안한 분위기의 라뜰리에 내부.

    프렌치 요리를 맛볼 때 빠져서 안 될 것이 와인이다. 비싼 와인이 아니더라도 항상 와인을 곁들여 음식 맛을 살리는 프랑스 식탁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음식과 잘 어울리는 와인을 만나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라뜰리에에는 요리에 어울리는 부담 가지 않는 가격의 와인들이 있지만 와인 목록이 길지는 않다. 이제 출발한 지 얼마 안 된 이곳에 앞으로 와인 목록이 연륜처럼 충실히 쌓일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라뜰리에는 이름처럼 요리의 ‘작업실’이다. 오랫동안 특급호텔과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경륜을 쌓은 남편과 파리 코르동블루에서 프렌치 요리를 전공하고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일한 아내가 각자 요리하다 만나서 차린 ‘부부 요리 작업실’의 훌륭한 작품을 기대해도 좋겠다.



    '눈엔 쏙 혀엔 착’ 감기는 요리 작품
    라뜰리에

    위치 : 서울 방배역 사거리에서

    남부순환도로 방향. 임광아파트 근처.

    연락처 : 02-587-9621

    가격 : 일품요리 3만5000원부터, 정찬요리 6만원부터. *주차 가능, 신용카드 가능.

    주간동아를 위해 새로운 미식 탐험에 나서는 필자 정한진씨는 현재 서울 신사동의 작지만 고집 있는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다. 서울대 미학과와 동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6년간 미학 강의를 하다 프랑스로 가 미술 공부를 하던 중 파리 유학생들을 감동시킨 뛰어난 요리 실력으로 인해 진로를 바꿨다. 파리 코르동블루에서 요리, 제과, 와인 과정을 이수했으며 ‘운이 좋아’ 수석으로 졸업한 뒤 세계 최고 권위의 레스토랑 비평지 미슐랭 가이드에서 별 2개를 받은 프렌치 레스토랑 ‘라쎄르’와 루이 뷔통 그룹에서 운영하는 ‘라 그렁드 에피스리’에서 근무한 뒤 귀국했다. 요리사라기보다 여전히 학자처럼 보이는 그의 목표는 화려한 장식이나 복잡한 요리 방법보다 식재료의 맛을 최대한 살린 음식을 사람들의 식탁에 올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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