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49

2004.08.26

너희가 상추쌈과 된장 맛을 알아

야영장서 만난 체코 친구와 한식 만찬 … 프라하 떠난 지 5일 만에 추억 싣고 국경 넘어

  • 글·사진=행창/ 승려 haengchang17@yahoo.co.kr

    입력2004-08-20 18: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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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가 상추쌈과 된장 맛을 알아

    집에서 키운 농산물을 내다 파는 체코 시골마을 주민 모습. 체코 프라하와 폴란드 브로츠와프 국경 근처 E67번 국도 풍경. 아직도 중세의 정취가 남아 있는 체코의 한 중소도시. (위부터)

    자명종 소리에 눈을 떠보니 새벽 4시다. 출발 준비에 두 시간가량 소요되는 걸 감안해 시계를 맞춰놓았다. 그런데 구릉지대로 이어진 체코 북부지역을 달려온 어제 첫날 여정이 무리였는지 몸이 일어나고 싶어하질 않는다. 여정 초반에 육체적으로 무리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다. ‘그래, 하루 쉬었다 가지’ 하며 다시 누웠다.

    텐트 앞에서 “킴!” 하고 부르는 소리에 일어나 시계를 보니 정오가 가까운 시간이다. 어제저녁 늦게까지 수영장 잔디밭에서 대화를 나눈 현지 친구들이다. 혹시 하루 더 머무르고 있지 않나 해서 들러보았단다. 함께 점심식사 하러 가지 않겠느냐는 그들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덩치가 내 두 배만한 사람들인데 상업주의와 개인주의에 물들지 않은 탓인지 모두들 성품이 소년 소녀처럼 순진하고 부드럽다.

    퇴색된 도시 풍경에 친근감 … 사람들은 부드럽고 순진

    20여년에 걸쳐 거듭되고 있는 나의 여행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서로 느낌을 공유하고자 하는 여정이다. 그래서 나는 그 어떤 만남에서도 ‘No!(거절)’라는 단어를 꺼내질 않는다. 그들이 내가 준비하는 한국식 저녁식사에 응하는 조건으로 점심을 함께 하기로 했다.

    체코는 물론, 사회주의에서 체제가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은 동유럽 나라들을 여행하다 보면 시장경제의 물질만능 풍조나 이기적인 성향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폐쇄 정책으로 인한 정보 부족으로 외국인, 특히 유색인종에 대한 인종차별 의식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호의를 가지고 다가오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기꺼이 만나곤 한다.



    고도로 산업화된 현대의 물질만능사회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병폐는 대부분 만남과 대화의 부족이 원인이다. 인간들이 인종과 종교, 국적과 민족의 차이를 넘어 이해를 통한 공유의 길을 모색하지 않는 한 불신과 침략전쟁, 그로 인해 누적되는 증오는 결코 해결될 수가 없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 말이 유사 이래 명언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대화와 이해, 그리고 공감과 공유라는 단계가 무시된 갈등들이 역사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내일이라는 역사 속의 희생양이 되고자 하지 않는다면 국제정치에서는 물론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도 임기응변식의 얄팍한 처세술이 아닌, 정도에 입각한 일관된 철학으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본다.

    강줄기가 내려다보이는 조그만 레스토랑에서 체코 전통음식을 먹고 친구들의 안내로 아직 중세풍의 여운이 남아 있는 구시가지 일대를 돌아보았다. 서유럽 도시들과 다른 점을 찾는다면 경제적 여유가 없기 때문에 도시 전체가 상당히 퇴색된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월이 느껴지는 작은 성의 커다란 소나무 그늘 아래서 평화롭게 거닐고 있는 공작새들을 뒤로 하고 야영장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너희가 상추쌈과 된장 맛을 알아

    체코의 전형적인 농가 모습. 체코-폴란드 국경에서 프라하말로 '히치하이킹'이라고 쓴 종이를 들고 지나는 차를 잡기 위해 서 있는 학생. 아름다운 프라하 거리를 스케치하고 있는 학생들. 자전거 여행 도중 들판에서 비스킷으로 점심을 때우고 있는 필자.(위부터 시계방향)

    돌아오는 길에 가게에 들러 찌갯거리와 상추를 준비했다. 한국식 음식으로 저녁을 함께 하자고는 했지만 쌀과 된장, 김과 조미료, 그리고 수저 한 벌에 일인용 코펠이 내가 가진 요리재료와 취사장비의 전부다. 여행 준비를 할 때 마음 같아서는 고추장 한 통을 더 넣고 싶었지만 무게 때문에 욕심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에게 야채 자르고 상추 씻는 일을 부탁하고 밥과 찌개 준비에 들어갔다. 자취 경력이 20여년이기에 간단한 요리를 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작은 냄비 두 개에 된장만으로는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무게와 부피를 줄이기 위해 직접 제작한 등잔불을 밝히고, 이름만 한국식인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나를 포함해 모두 다섯 명. 수저 한 벌에 밥그릇은 없다. 상추 한 잎씩을 손바닥에 펼치게 하고는 젓가락으로 밥을 떠놓고 그 위에 된장을 조금씩 올렸다.

    그러고는 된장에 야채를 듬뿍 넣어 끓인 찌개 한 수저씩을 떠넣은 뒤 상추를 보쌈 싸듯 하여 먹는 방법을 선택했다. 일견 한국음식에 대한 ‘최후의 발악’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생존을 위한 ‘최고의 지혜’쯤으로 생각하는 게 좋겠다.

    호반의 도시 체스카 스칼리체 캠핑족 북적 ‘삶의 여유’

    입을 크게 벌린 뒤 뜨거운 쌈밥(?)을 한 입에 삼키고 나자 모두들 “정말 맛있다!”며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인다. 사교나 예의로 하는 말이길 바랐지만, 그게 아니다. 한두 번 먹는 방법을 익힌 뒤에는 차례를 기다리지 못하고 젓가락질까지 직접 하겠다고 나섰다.

    문제는 된장이다. 생명을 연명시켜주는 약처럼 먹을 생각으로 1kg짜리 한 통을 준비해왔는데, 된장 맛이 일품이라며 한 수저씩 듬뿍듬뿍. 결국 한 끼 저녁에 된장 반 통을 비우고 말았다. 상추 한 잎, 밥 한 톨, 국물 한 방울 안 남기는 굉장한 만찬을 한 것이다. 하지만 처음 먹어보는 한국음식이 맛있다고 프라하에 있는 한국 음식점 위치까지 묻는 그들을 보면서 절반으로 줄어든 된장이 오히려 고맙게 느껴졌다.

    여행하거나 외국생활을 하면서 만난 외국인들 가운데 한국음식을 먹어본 뒤 그 맛을 절찬하지 않는 이를 본 적이 없다.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 바, 여행 중에 출혈이 심하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늘 ‘한국음식 파티’를 열어 화려한 추억을 공유하곤 한다.

    좋은 만남에는 항상 아쉬운 이별이란 게 고리처럼 달려 있다. 며칠 더 머무르면 안 되겠느냐는 친구들에게 아직 여정이 많이 남아 있으니 다음을 기약하자며 작별을 고했다. 약속된 인연이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지만, 나선 길이기에 걸음을 재촉해야 한다. 마치 바람이 지닌 속성 같은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게 길을 찾아 나선 이의 숙명이다. 때로는 힘겹게 다가서는 만남과 헤어짐의 인연들. 주어진 길이라면 되돌아갈 텐데, 내가 선택했기에 돌아설 수 없다.

    다시 E67번 국도에 올랐다. 하루를 쉰 덕분인지 페달이 가볍게 느껴진다. 동쪽으로 이어지던 도로가 방향을 바꿔 북쪽으로 뻗어 있다. 이제부터 북상이다. 국경까지 하루 남짓 거리. 체코-폴란드 국경이 산맥을 따라 동서로 그어져 있다.

    어차피 한 번은 넘어야 하는 산맥이자 국경이다. 저 멀리 완만한 경사가 끝도 없이 하늘 닿는 곳까지 이어져 있는 게 보인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바라본다고 해서 짧아질 거리도, 낮아질 경사도 아니다. 먼 곳을 볼수록 경사의 굴곡은 더 심하게 느껴지는 법이고, 길 또한 끝도 없어 보인다. 핸들 앞 1m 지점은 항상 평면으로 다가오기에, 주어진 공간을 처리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자 거리를 좁히는 최선의 방법이다.

    얼마간의 내리막도 있지만 반가워할 일이 아니다. 내리막이 영원할 수 없는 게 지형이고, 또 반드시 오르막이 뒤따라오는 게 대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석양이 왼쪽 볼을 비출 때쯤 하루 거리로 예정한 국경 앞 15km 지점에 위치한 호반의 도시 체스카 스칼리체(Ceska Skalice)라는 곳에 도착했다. 호숫가에 위치한 야영장에는 휴가철을 맞아 떠나온 사람들의 캠핑차와 텐트들이 가득하다. 삶의 여유가 느껴지는 풍경이다. 바다가 없는 나라여서 체코 사람들은 여름철이면 산과 호수, 그리고 수정같이 아름다운 아드리아해를 따라 길게 이어진 나라 크로아티아로 휴가를 떠난다.

    프라하를 떠나온 지 5일째 되는 날 오전, 좋은 여행이길 기원해주는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의 배웅을 뒤로 하고 체코-폴란드 국경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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