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39

2004.06.17

철저한 관리, 가혹한 처벌 ‘30년 원칙’

60만 이주노동자 완벽 통제로 불법체류 최소화 … 일부 인권침해 시비 속 모범 운영 ‘찬사’

  • 싱가포르=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입력2004-06-11 14: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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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저한 관리, 가혹한 처벌 ‘30년 원칙’

    동남아 각지에서 온 건설노동자의 모습.

    싱가포르의 국가 브랜드는 편안한 생활과 행복한 가정, 그리고 기업 활동하기 좋은 나라입니다.”(리콴유 전 총리)

    서울보다 조금 큰 땅(683만㎢)에 400여만명이 살고 있는 도시국가 싱가포르는 ‘아시아의 경제 모범생’이란 찬사가 늘 따라다닌다. 범죄 없는 깨끗한 환경, 2만 달러가 넘는 소득수준에 청렴한 정부까지…. 이러한 싱가포르는 한국인들에게 한때 동경의 대상이었다.

    철저한 관리, 가혹한 처벌 ‘30년 원칙’
    그러나 빛이 강하면 그림자 역시 짙게 드리우는 법. 도시국가 싱가포르는 선택의 여지 없이 ‘자본 중심’ 국가로 살아남아야 했고, 이를 위해 줄곧 국가 주도의 경제정책을 시행해야 했다. 이는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고 ‘국부(國富)’를 창출하기 위한, 리콴유 전 총리의 ‘아시아적 가치’ 추구 전략인 ‘양심적 독재’로 귀결됐다.

    불가피한 전략이었지만, 이는 싱가포르의 ‘노동권’이 그만큼 불리한 여건에 처했음을 의미한다. 즉 사회안전과 기업활동에 초점이 맞춰진 싱가포르 노동정책은 ‘시민권자 및 고급인력 우대’ ‘이주노동자 및 단순기능 노동자 홀대’ 정책으로 요약되기 때문이다.

    올해 초 세계적 항공사인 싱가포르항공에서는 대규모의 파업이 일어났다. 항공교통 의존율이 높은 싱가포르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먼저 고촉통 총리가 직접 나서 노조 지도부와 머리를 맞대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협상테이블에 앉은 정부는 뒤로 노조원들의 약점을 캐기 시작했다. 결국 노조 지도자인 한 기장이 말레이시아 국적을 지닌 싱가포르 영주권자라는 사실을 알아내곤 그의 영주권을 박탈하고 국외 추방을 결정했다. 지도자를 잃은 파업은 이내 잠잠해지고 말았다.



    고급인력 우대, 단순기능 노동자는 홀대

    이 사건은 두 가지 사실을 보여준다. 노동력이 부족한 싱가포르에서 외국인력 수입은 보편적이라는 점과 정부의 정책에 반하는 행동은 가차없이 처벌받는다는 점이 그것이다. 일개 기업의 노사분규에 일국의 총리까지 나서는 모습, 더구나 합법적인 외국인노동자를 그것도 비싼 돈을 들여 스카우트해온 고급인력마저 국외로 추방하는 모습은 대단히 낯선 풍경이지만, 싱가포르에서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철저한 관리, 가혹한 처벌 ‘30년 원칙’

    자신의 고용허가증을 꺼내 보이는 태국 출신 이주노동자.

    “싱가포르는 하나의 거대한 ‘기업(corporate)’이지요. 정부와 기업, 그리고 국민이 법과 제도라는 톱니바퀴 속에서 ‘효율성’을 찾아 움직입니다. 물론 주도권은 철저하게 정부에 있습니다. 싱가포르에 시민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싱가포르 국립대 사회학과 힝아이윤 교수)

    동남아시아의 부국인 싱가포르가 이웃 국가에서 들어오는 이주노동자를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정치상황을 짚어봐야 한다.

    리콴유 전 총리가 30년 철권통치를 해온 싱가포르는 길거리에 껌 하나 버리는 행동도 용납하지 않는 철저한 법 집행으로 유명하다. 게다가 84명의 국회의원 가운데 82명이 PAP(인민행동당) 소속일 정도로 정권교체를 용납하지 않는 일당독재를 지속해왔다.

    이처럼 선진국에 어울리지 않는 기묘한 정치체제가 굳어진 까닭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지정학적, 인종적 환경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원래 말레이시아의 영토였다. 그런데 영국이 약 2세기 전(1819년) 이 땅을 동남아시아 개척을 위한 전진기지로 삼고, 1959년까지 식민통치를 지속했다. 문제는 영국이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말레이시아인이 아닌 중국인과 인도인을 데려오면서 시작됐다. 말레이시아 영토에 영국인이 지배하고 중국인이 대다수를 이루는 특수한 사회는 언제든지 사회갈등이 폭발할 위험성을 안게 된 것이다. 결국 리콴유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서 정치와 행정은 엘리트에게 귀속시키고, 국민은 오로지 경제발전에 매진하는 독특한 사회구조를 만들어냈다.

    철저한 관리, 가혹한 처벌 ‘30년 원칙’

    싱가포르 시민권자 대부분은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3D업종은 이주노동자가 맡는다.

    “싱가포르에는 독립적인 노조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판적 언론과 야당은커녕, 고교 동문회나 아파트 부녀회조차 만들 수 없는 극단적인 ‘탈정치화’한 사회입니다.”

    한 학자는 “이 땅의 지배정서는 공포(fear)이며 시민들은 소비주의(consumerism)만을 학습했다”는 자조 섞인 푸념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정치는 후진국이지만 법률과 행정 시스템은 세계 최고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발달해 있다. 최고 엘리트 공무원이 끊임없이 개선을 거듭해온 30년 역사의 이주노동자 관리시스템 또한 모범적인 제도로 다른 국가의 모방 대상으로 부각됐으며, 한국 노동부도 싱가포르 제도를 적잖이 답습하고 있다.

    산업별 수급계획 따라 필요 인력만 수입

    싱가포르는 전체 노동인구의 약 30%인 60만명가량이 이주노동자이기 때문에 노동담당 부서인 인력부는 적잖은 행정력을 이들에게 집중한다. 우선 싱가포르 이주노동자 정책의 핵심은 WP(Work Permitㆍ고용허가)/EP(Employ- ment Passㆍ취업패스) 정책으로 요약된다.

    철저한 관리, 가혹한 처벌 ‘30년 원칙’

    싱가포르에서 1년째 일하고 있는 필리핀 출신 피오나씨(30)

    “전문기술 인력이 받는 취업패스는 약 9만명, 단순기능 인력이 받는 고용허가증은 약 50만명에 달합니다. 그리고 이중 외국인 가정부가 약 15만명입니다.”(싱가포르 인력부 텐이퉁 국장)

    철저한 계획경제를 지향하는 싱가포르는 노동력 수입문제 역시 철저한 수급계획을 통한 분배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한 해 동안 필요한 인력을 기술자격증을 지닌 숙련공과 단순노무직으로 나눠 각 산업에 배분하는 절차를 거치는 것. 연초에 A건설회사가 WP 50명, EP 10명을 요청했다면 정부는 A회사의 실적과 여타 산업의 수요, 그리고 사업계획을 정밀검토해 꼭 필요한 인력만을 승인하는 방식이다.

    여기에 전제되는 조건은 두 가지다. 첫째, 인력배분에 공무원의 비리가 개입되면 부패방지위원회를 통해 가차없이 처벌한다는 것. 둘째, 기업은 정부에 의해 승인된 노동력만 사용하고 계약기간이 만료된 노동자는 반드시 출국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때때로 건설현장을 물샐 틈 없이 둘러싸고 일제단속을 펴곤 합니다. WP 노동자는 잠자는 곳을 이탈해도 안 되고 반드시 신분증을 소지해야 합니다.”(K건설회사 수킨카우르 소장)

    정부의 규칙을 어기는 회사에 대해서는 가혹한 처벌이 뒤따른다. 특히 불법체류자를 고용했을 경우 회사는 앞으로 값싼 노동력을 사용할 수 없다. 정부는 이 같은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이주노동자 한 명당 350만원에 달하는 고용안정채권(출국시 반환)을 할당하고, 이주노동자가 싱가포르에 체류하는 동안 이들의 숙식을 책임지는 관리업체(일종의 감시업체)를 지정한다. 심지어 싱가포르의 모든 집주인은 집을 세놓을 때 사용자가 불법체류자인지를 확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얼마 전 한 목사가 자신의 집에 세 든 사람이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만으로 3년형을 선고받아 사회적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합법적인 이주노동자에게는 확실한 의료서비스와 신분보장이란 혜택이 뒤따른다.

    철저한 관리, 가혹한 처벌 ‘30년 원칙’

    다인종 국가인 싱가포르의 모든 표지판에는 적어도 4개 국어(영어, 중국어, 말레이어, 타밀어)가 사용된다.

    이 같은 엄격한 관리가 가능한 배경에는 ‘싱가포르 안에서는 도망갈 곳이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문제가 생기면 국가가 관리한다’는 완벽한 관료제도가 뒷받침됐다. 술 담배에 대한 이례적인 높은 세금(담뱃값 8000원)은 물론 매매춘 문제를 공창제(公娼制)를 통해 관리하는 사례는 싱가포르란 나라의 특징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가정부 임신하면 계약 따라 즉각 추방

    싱가포르의 이주노동자 정책은 ‘메이드(가정부)’ 대목에서 절정에 이른다.

    노동력이 절대 부족한 싱가포르는 여성 노동력의 활용이 세계 최고 수준에 달한다. 이 때문에 외국인 가정부를 채용해 육아와 가사 문제를 해결해왔다. 외국인 가정부는 식민시대의 전통으로 자연스럽게 정착됐다. 현재 중류층 이상의 싱가포르 시민들은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지에서 건너온 젊은 여성들에게 1인당 한 달에 60만~80만원(세금 비용 포함)을 주고 집안일을 맡기고 있다.

    문제는 젊은 여성이 국경을 넘는 일인 만큼 그에 따르는 사회문제에 대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여기에 또다시 싱가포르의 냉혹한 관료주의가 빛을 발한다.

    우선 가정부 수입은 정부 허가를 받은 에이전트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관례가 아닌 철저한 계약서에 의해 권리와 의무가 강제되며,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싱가포르에서는 절대로 임신을 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다. 싱가포르 정부는 외국인 가정부들의 출산을 방지하기 위해 6개월에 한 번씩 건강검진을 의무화했다. 임신한 사실이 발각되면 계약에 의해 즉각 추방되고, 몰래 아이를 낳더라도 싱가포르 시민권자와 결혼하지 못할 경우 아이와 함께 강제 추방된다.

    게다가 사용자는 이들이 계약조건을 이행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줄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후진국 출신이기 때문에 생기는 문화적 격차와 언어소통 문제, 노동조건으로 인한 갈등까지 모든 책임을 약자가 떠안는 불리한 계약인 셈이다.

    희망자 많다 보니 송출비리 근절 안 돼

    이 같은 싱가포르의 강경정책은 외교적인 문제로 확대되기도 한다. 필리핀 출신 가정부가 싱가포르인 고용주를 살해한 사건을 놓고 책임공방이 벌어진 것. 결국 싱가포르가 외국인 가정부에 대한 인권침해에 강력하게 대응해나가면서 어느 정도 균형이 이뤄지고 있다.

    주목할 점은 완벽한 고용허가제 아래서도 송출비리가 근절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하고 싶은 노동자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송출국의 에이전트가 챙기는 과도한 소개료와 선불금을 충당하기 전에는 싱가포르를 떠날 수 없기 때문에 준노예 상태로 일해야 하는 악순환은 싱가포르에서도 재연되고 있다. 더구나 이주노동자의 여권을 빼앗아 고용주가 보관하는 인권유린이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현실은 싱가포르에 만연한 비민주성을 말해준다.

    선진국인 싱가포르는 이미 주변 후진국의 값싼 노동력 없이는 홀로 존재할 수 없는 나라가 됐다. 석유를 전량 수입하듯 단순노무직에 대한 의존 역시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대신 완벽한 관리가 가능하다고 믿는 싱가포르는 이 같은 정책을 계속 밀고 나갈 것으로 보인다. 한 교포 사업가는 싱가포르의 현 노동정책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싱가포르의 고용허가제는 작은 나라에서 가능한 완벽에 가까운 관리의 묘미를 보여주고 있지만 문제점이 제대로 공론화된 적이 없어 아직 성과를 논할 순 없다. 한국에 싱가포르의 사례를 직접 적용하기는 힘들겠지만, 만들어진 법을 정확히 준수하며 끊임없이 개선책을 만들어가는 싱가포르 공무원들의 태도만큼은 꼭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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