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8

2004.04.01

한국경제 나침반 ‘이헌재 파워’

탄핵정국 발빠른 대응 시장 안정 견인 … 역대 최강 경제부총리 향후 행보 주목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4-03-24 18: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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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경제 나침반 ‘이헌재 파워’
    ”무디스는 부정적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피치는 탄핵안이 국가신인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지만 이미 정치적 불안정은 반영돼 있어 투자활동에 미치는 영향이 없으면 조정은 없을 거라고 밝혔다. S&P는 아직 공식반응이 없다.” 3월12일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의 성명.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의결된 3월12일 연거푸 성명을 발표하며 금융시장에 ‘영향을 미쳤다’. 금융계의 한 인사는 “시장이 빠르게 안정을 되찾은 것의 절반은 ‘이헌재 효과’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부총리는 탄핵안이 가결된 직후 금융시장 특히 국내 주식시장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외국자본의 움직임에 주목하면서 ‘세련된 관치’로 금융시장 안정을 이끌었다.

    이부총리는 탄핵안이 통과되자마자 금융기관장 간담회, 금융정책협의회 등을 통해 금융기관에 내놓고 ‘협조 요청’을 했다. 표현이 협조였을 뿐 금융계 지도자들은 이부총리의 발언을 토씨까지 꼼꼼하게 받아 적었다고 한다. 사실상의 시장 개입이었던 것. 그는 금융계 인사들에게 “단기적으로 대응하거나 손절매가 없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금융기관들이 주식 매입에 관심을 가질 것” “이상이 없을 것”이라는 이부총리의 자신감 가득한 발언은 협조 요청 이후에 나온 것이다.

    경제정책 중심 재경부로 이동

    더하여 경제장관회의를 ‘공개’로 열어 “괜찮다”고 강조한 것이나 거푸 기자간담회를 자청한 것은 모두 시장 플레이어들의 심리적 위축을 줄여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한 고도의 언론플레이였다는 게 재정경제부(이하 재경부) 관계자의 설명이다. 금융시장이 예상보다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자 시장 일각에선 거꾸로 반발 매수세로 인한 ‘주가 폭등’과 ‘환율 급락’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고 한다. 대통령 직무정지 직후 수일은 ‘위기에 강한 관료’라는 이부총리에 대한 평가가 다시 한번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헌재 효과’는 경제 전반에서 회자된다. 이부총리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를 듣다 보면 한국경제가 저절로 좋아질 것 같은 ‘착각’까지 들 정도다. 노대통령 탄핵 이후 독립성까지 확보하면서 ‘1980년대 이후 최강의 경제부총리’라는 과장 섞인 얘기도 들린다. 그에게 맞설 만한 견제 세력이 없다는 우려까지 나올 정도. 시장 역시 이부총리에게 일단 신뢰를 보내는 눈치다. LG경제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전임 부총리와는 경험의 수준과 중량감, 국제적 인지도에서 격이 다르다. 단기적이겠지만 청와대와 정치권으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날개까지 달았다”고 말했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주요 경제정책은 청와대 정책실이 주도해왔다는 게 정설이다. 정책실이 브레인 역할을 맡고 재경부는 집행을 담당했다는 것. 그런데 이부총리 취임 이후 이러한 양상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경제정책의 중심이 정책실에서 재경부로 빠르게 이동했다는 것. 대통령 직무정지 후 정책실의 입김은 더욱 약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박봉흠 대통령정책실장은 이부총리의 까마득한 행정고시 후배다. 전윤철 감사원장으로 대표되는 옛 경제기획원 멤버들도 힘을 쓰지 못하는 인상이다.

    언론의 주목을 받는 걸 좋아한다는 평을 듣는 한국은행 박승 총재의 ‘침묵’은 이부총리의 힘을 짐작케 한다. 이부총리는 2월20일 경제장관 간담회에 박총재를 대신해 참석한 이성태 부총재에게 “한은 총재는 앞으로 경제장관 간담회에 참석하지 말라”고 전했다. 박총재로선 기분이 상했을 수도 있는 일. 그러나 한국은행이 금리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데 박총재보다 이부총리의 영향력이 더 클 것이라는 게 일반적 관측이다. 금융통화위원회 위원들의 과반수 이상이 이부총리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것. 물러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던 이정재 금융감독위원장이 최근 목소리를 높이며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도 이부총리의 후광 덕택이라는 분석이다.

    야인 시절 현 정부에 대해 종종 쓴소리를 내뱉었던 이부총리는 입각 과정에서 경제정책에선 정치적 스펙트럼과 달리 실용주의적 노선을 나타낸 노무현 정부와 코드를 맞춘 것으로 보인다. 언론에 민감한, 말 한마디도 신중하게 내어놓는다는 이부총리가 탄핵안 가결 직후 “제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일어나 개탄스럽다”고 발언한 것은 이 같은 관측에 힘을 실어준다. 이부총리는 경제장관회의에서 “지난 1년 동안 만들어온 참여정부의 정책 로드맵이 혹시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감을 잠재울 수 있도록 장관들이 앞장서 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한국경제 나침반 ‘이헌재 파워’

    3월18일 정부대전청사에서 열린 ‘2004년도 제1회 전국 세관장회의’에 참석한 이헌재 경제부총리.

    이부총리는 성장론자에 가깝다. 분배를 중요시하는 참여정부와는 태생적으로 대척점에 서 있는 셈이다. ‘선거용’으로 이부총리가 기용됐다는 일각의 의견도 있지만 “노대통령이 시행착오를 거치며 경제정책에선 실용주의적 노선으로 변했다”(LG경제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게 일반적 분석이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김상조 소장은 “대학 시절부터 봐온 이부총리는 성장주의자이자 기본적으로 관치주의자”라고 평가했다. 분배론자들이 복지정책의 약화를 우려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부총리는 또 사모펀드를 통해 외국자본을 견제하겠다는 취지로 조성하려 한 ‘이헌재 펀드’ 시절의 주장을 실현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부총리는 “산업자본의 금융지배 허용과 은행의 동일인 소유 한도를 늘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조하면서도 “재계와 금융기관이 공동으로 사모펀드를 조성해서 외국기업이나 펀드들의 국내기업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대응해달라”고 주문하는 등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황영기 전 삼성증권 사장이 우리금융지주 회장에 취임하게 된 것은 이부총리의 ‘토종자본’에 대한 애착을 미뤄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삼성증권 사장 시절 그는 “사모펀드 조성에 나서겠다”면서 우리금융지주 등의 인수에 관심을 나타냈다. ‘이헌재 펀드’와 사실상 한배를 탔던 것. 이부총리는 취임 직후 이헌재 펀드의 실무팀에 삼일회계법인, 모건스탠리, 김&장, 삼성그룹(삼성증권)이 참여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한 투신사 사장은 “황영기씨가 우리금융지주로 간 것은 토종자본을 육성하겠다는 이부총리의 의지가 가장 큰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삼성 출신인 그의 취임에 대해 시민단체 일각에선 “삼성이 토종펀드를 구실로 은행까지 노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어쨌든 △신용불량자 문제 해결을 위한 배드뱅크 △영세·지방 상공인 지원책 △한국투자증권·대한투자증권 매각 등 경제 현안에서 ‘이헌재 효과’의 결과에 따라 한국경제의 미래가 영향을 받을 것은 자명하다. 사모펀드를 통한 해법 등엔 우려의 시각 또한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경제가 바닥을 친 지금, 해외에서 인정받고 있으며 역대 어느 경제부총리에 뒤지지 않는 힘과 독립성을 가진 이부총리의 향후 행보가 주목받는 것은 그의 어깨에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진퇴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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