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8

2004.04.01

서민들 “고속철, 반갑지 않다”

값싼 통일호 퇴출, 다른 열차도 운행 횟수 축소 … 간이역 이용자들 시간·비용 추가 부담 불가피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입력2004-03-24 15: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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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민들 “고속철, 반갑지 않다”

    4월1일 고속철도 개통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질 통일호.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에 사는 김무남 할머니(66)는 요즘 고속철도 이야기만 나오면 짜증부터 낸다. 이야기만 들었을 뿐 직접 본 적도 없는 고속철도가 당장 자신의 생계비 부담을 늘리고, 여행의 즐거움을 앗아갔기 때문. 2000년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고 며느리마저 집을 나간 뒤 할머니는 단칸 셋방에서 손자를 키우며 일주일에 한 번씩 고향인 경북 안동시 길안면을 왕래해왔다. 비록 5시간30분이나 걸리지만 새벽 6시50분 청량리발 부전행(부산) 통일호는 단돈 2700원(경로할인 50%)만 있으면 할머니를 어김없이 고향에 데려다주었고, 할머니는 그곳에서 고향 친구와 친지들의 위로를 받으며 자식 잃은 설움과 울적함을 달랠 수 있었다. 또 시골에서 이런저런 물건을 팔아 생긴 수익은 할머니와 손자의 생활비에 큰 보탬이 됐다.

    새마을·무궁화호, 시간은 더 걸리고 요금은 그대로

    하지만 할머니는 지난주 역 직원한테서 고속철도가 개통되는 4월1일부터 안동으로 가는 통일호가 없어진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이에 따라 할머니는 고향 가는 차비를 4배나 더 물게 됐다. 안동까지 무궁화호 운임은 경로할인 혜택(30%)을 받아도 1만원을 훌쩍 넘어서기 때문. 게다가 무궁화호는 고향인 마사역(안동시 길안면 마사리 소재)에서는 정차하지 않아 안동 시내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30분을 거꾸로 돌아와야 하는 번거로움도 보태졌다. 결국 정든 기차를 버리고 무정차 시외버스를 타기로 했지만 서울서 안동까지 운임만 1만5000원, 생활보호대상자인 할머니에겐 비싼 요금이다. 할머니는 할 수 없이 4월부터 고향 방문을 두 달에 한 번으로 줄이기로 했다.

    고속철도 시대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라지만 통일호 운행 중단은 하루벌이 서민들에게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2000년 역사 속으로 사라진 비둘기호는 운행 중단 당시 통일호와 운행시간, 운임면에서 별 차이가 없었다는 점에서 제 임무를 훌륭히 마친 ‘아름다운 퇴역’에 비유됐다. 하지만 통일호의 경우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운임이 무궁화호의 절반도 안 되고 이름 없는 모든 간이역에서 정차했다는 점에서 통일호는 농촌 주민과 도시빈민, 통학생들에게 너무나 좋은 대중교통수단이었다. 그런 통일호가 사라진다고 하니 하루벌이 서민들의 반발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 당장 통일호를 이용해 단거리 출퇴근을 하던 노동자나 학생, 농민 등 간이역 사이를 옮겨다니던 승객들은 운행 횟수의 감소와 2~4배 이상 올라간 교통비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통일호에 목을 맨 일부 서민들 외에도 고속철도 개통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은 적지 않다. 경부선이나 호남선 등 고속철도 운행노선에서 기존 새마을호나 무궁화호를 정기적으로 타고 다니는 사람들 중 천안, 아산, 대전에서 출퇴근하는 승객(정기승차권 할인 60%)을 빼고 일주일에 2회 미만 고속철도를 이용하는 대부분의 승객들은 교통비의 추가 지출을 줄일 방법이 없다.



    이는 철도청이 4월1일 고속철도 개통과 함께 경부선의 경우 새마을호는 하루 63편에서 26편, 무궁화호는 97편에서 22편, 호남선은 56편에서 30편으로 줄이는 등 일반열차를 최고 70% 이상 줄였기 때문이다. 철도청은 일반열차가 줄어든 자리에 고속열차를 투입했다(경부선 112편, 호남선 22편). 하지만 살아남은 새마을호와 무궁화호도 정차역이 늘어나면서 종착역(부산, 목포, 광주) 기준으로 기존 운행보다 시간이 30~40분 이상 늘어났다. 즉 새마을호는 무궁화호로, 무궁화호는 통일호로 단계가 낮아진 셈이다. 이런데도 운임은 전혀 내려가지 않았다.

    서민들 “고속철, 반갑지 않다”

    고속철도의 등장으로 운행 횟수가 50~60% 가량 줄어들며 예전의 무궁화호 수준으로 전락하게 될 새마을호(위). 간이역 사이를 오가며 학생과 직장인들의 출퇴근용 열차 역할을 했던 통일호, 일명 꽃기차.

    하루에 10회 이상 운행되던 기차가 2~3회로 줄어들고, 운임은 그대로면서 시간은 30~40분이나 더 걸린다면 누가 일반열차를 이용하겠는가. 결국 철도청의 태도는 군말 없이 고속철도를 이용하라는 이야기와 같다. 철도노조 한 관계자는 “고속철도가 현재 전용노선이 아니라 기존 선로를 함께 쓰는 만큼 무리하게 46편성의 고속철도를 하루 세 번씩 돌리지 말고, 새마을호 편수를 매년 점차적으로 줄여나가면서 고속철도의 편수를 상대적으로 늘려가는 방법으로 소비자의 심리를 고속철도 요금에 연착륙시켜야 했다”며 “현재 철도청의 고속철도 운행 방식은 18조원에 달하는 고속철도 부채를 되도록 빨리 줄이기 위해 서민에게 부채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가장 많은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고속철도가 정차하지 않는 지역 사이를 오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 시외버스와 일반철도, 고속철도를 두세 번 이상 번갈아 타야 하는 불편을 겪지만 운임과 시간은 장거리 일반열차를 한 번 탈 때보다 훨씬 더 드는 경우가 많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업 때문에 수원에서 김천을 2주일에 한 번씩 오가는 김상수씨(37)의 경우를 보자. 김씨는 지금까지 하루 9회씩 있는 새마을호를 타거나, 매 시간마다 있는 무궁화호를 타고 김천까지 곧바로 내려갈 수 있었다. 어느 쪽을 이용해도 시간은 2시간10분(새마을호)에서 2시간30분(무궁화호)을 넘어가지 않았고, 요금은 무궁화호가 1만1900원, 새마을호가 1만7700원이었다.

    그런데 고속철도가 개통됨으로써 김씨는 이제 수원에서 좌석버스나 공항버스를 타고 광명역까지 가 그곳에서 고속철도를 탄 뒤 대전에서 내려 다시 김천으로 가는 일반열차를 갈아타야 한다. 세 번이나 환승을 하는 셈. 소요 시간을 계산하면 수원에서 좌석버스를 타고 광명역까지 가는 데 최소 40분, 광명에서 고속철도를 타고 대전까지 50분, 대전역 환승 대기시간 10분, 김천까지 일반열차 운행시간 1시간(새마을호)~1시간10분(무궁화호) 등 총 2시간40분에서 2시간50분이 걸린다. 최소한으로 시간을 잡았지만 기존 새마을호를 이용했을 때보다 30분, 무궁화호를 이용할 때보다 20분이 더 소요되는 셈이다.

    비용면에서도 광명에서 대전까지의 고속철도 요금 1만8000원 외에 수원-광명 간 좌석버스 요금 최하 1000원(직통버스 5000원 이상), 대전에서 김천까지 환승할인(30%) 열차요금 3000원(무궁화)~5000원(새마을)을 모두 합해 최소 2만2000원에서 최대 2만8000원까지가 소요된다.

    결국 일반열차를 이용할 때보다 고속열차를 이용할 때가 시간은 20분에서 40분, 비용은 2배 가까이 더 든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래서 이 구간은 기존 철도 고객들이 고속버스로 옮겨갈 것으로 예상된다. 철도청은 고속철도를 도입함으로써 오히려 기존 철도 승객을 잃은 셈이다.

    철도청 고속철도사업본부의 한 관계자는 “이 모두가 기존선을 함께 이용하면서 고속철도를 최대한 사용하려다 보니 벌어지는 일”이라며 “불합리한 부분들은 신축적인 할인제도를 통해 고쳐나가고, 경부선의 경우 2010년 고속철도 전용선이 완성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서민들의 불만을 줄이기 위해 일반열차의 최저운임 거리를 30~50% 단축해 가까운 곳을 이동하는 사람의 부담을 많이 줄였다”고 덧붙였다.

    철도청은 지난해 고속철도가 일반철도를 대체하는 ‘서민철도’임을 내세워 재정경제부의 고속철도 운임에 대한 부가가치세 부과안을 무산시켰다. 당시 재경부는 고속철도를 물가 상승요인을 안은 ‘고급철도’로 지목했다. 과연 고속철도는 철도청의 주장대로 서민철도로 정착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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