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5

2004.03.11

日 기상학자 와다유지 ‘측우기’ 세계에 소개

  • 박성래 한국외국어대 과학사 교수/ parkstar@unitel.co.kr

    입력2004-03-04 16: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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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꼭 100년 전 이맘때(2월8일)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이미 그 10년 전 청나라와 벌인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지만 서양의 강국이자 강력한 흑해함대를 지닌 러시아가 한 수 위라는 것이 당시 세계 여론이었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보란 듯이 승리한 일본은 이후 세계 열강의 한 자리를 차지한다.

    우리나라 근대 기상학과 러일전쟁이 연관돼 있다면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1세기 전 제국주의 침략의 욕심을 드러낸 일본군이 처음으로 해외에 진출한 곳은 다름 아닌 우리나라 제물포(지금의 인천)였다. 전쟁을 위해서라도 일본은 인천에서 전쟁의 필수정보인 기상관측을 철저히 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의 기상관측소 격인 인천측후소는 일본의 대륙 진출을 위한 부산물이었다. 한국의 근대 기상 100년은 이렇게 러일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시작된 셈이다.

    인천측후소 첫 책임자는 일본 근대 기상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와다유지(和田雄治·1859~1918)다.

    일본 후쿠시마(福島) 출신인 그는 1870년 11살 때 도쿄로 진학했다. 프랑스어를 공부하면서 근대과학에 흥미를 느껴 79년 도쿄대 이학부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그는 메이지(明治) 정부의 내무성 지리국 측량과에서 기상관측과 해양조사 등을 담당했고, 82년에는 독일인 기상학자 크니핑(1844~1922)을 도와 일본에 폭풍경보·천기예보 등을 도입하기도 했다. 일본은 외국에 문호를 열면서 각국의 서양 과학자들을 초빙해 근대과학을 배우고 대학에서 가르치게 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



    와다유지는 이 같은 경험을 갖고 1904년 7월, 45살의 나이에 인천측후소장으로 부임해 왔다. 그는 그 후 15년 3월 말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실질적으로 이 땅의 초기 기상관측을 주도한 인물이다.

    깜짝 놀랄 만한 사실도 있다. 그는 조선에 부임하기 전 일본 중앙기상대의 예보과장 자격으로 프랑스에서 2년간 유학한 일이 있는데, 1910년 프랑스에 조선시대 측우기에 대해 소개했고 그 글이 ‘네이처’에 실리면서 측우기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한국의 측우기를 세계가 주목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와다유지인 것. 그는 첨성대에 대한 글도 썼고, 우리나라의 고대 기상기록에 대한 책을 내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는 한국 과학사를 개척한 선구자인 셈이다.

    물론 그의 전공 분야인 기상학에 대한 업적도 뚜렷했을 것이다. 그는 10년 남짓 조선에서 일하면서 기상학의 이론과 실제를 전수했다. 그래서 일제시대 때는 그의 동상이 기상대에 세워진 일도 있다. 물론 해방과 함께 그 동상은 자연스레 종적을 감췄다.

    당연히 그의 지도 아래 조선인 기상학자들이 훈련을 받아 기상업무를 담당했겠지만, 와다유지가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아직 연구되어 공개된 일이 없다. 또 그의 제자라고 자신을 밝히고 나선 한국인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일은 한국 모든 분야의 공통된 현상이다. 누구도 일본인이 자신의 스승이었다고 떳떳하게 밝히기 힘들어 한다. 자칫하다가는 일제 잔재 또는 친일파로 몰려 지탄의 대상이 되리라는 우려 때문일 것이다.

    그러는 사이 우리 근대 과학사는 아득하게 잊혀지고 증언자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한국의 기상학은 일제의 대륙침략 도구로써 이용되고 발달했다. 그렇다고 기상학자 와다유지를 일제 앞잡이로 몰아 그와 관련된 한국 기상학의 개척자들을 무시해버릴 수만은 없는 일 아닌가. 러일전쟁 100주년이라는 소식과 친일 청산의 높은 외침소리를 들으며 떠오르는 과학자의 단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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