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5

2004.03.11

기술 빨판 하이얼 겁나는 ‘家電 공룡’

시장 미끼 잡식성 기술 습득 가파른 성장 … 중국 내수시장 넘어 세계 제패 야심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4-03-04 14: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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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술 빨판 하이얼 겁나는 ‘家電 공룡’

    상하이에 있는 하이얼 공장 전경(작은 사진). 도심 한 건물에 걸린 하이얼의 대형 광고판 '글로벌 기업' 하이얼에 대한 중국인들의 애정과 신뢰는 대단하다.



    지난해 말 ‘뉴스위크’는 2004년을 전망하며 ‘경제에 영향력을 미치는 인사’ 8명을 선정했다. 이중 1명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으로, 국내 언론은 관련 소식을 호들갑스럽게 전했다. 그러나 이회장과 더불어 또 한 명의 아시아인 CEO(최고경영자)가 8명 중 1명으로 뽑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세계 5위 가전업체 하이얼(중국 산둥성 칭다오시)을 이끄는 장루이민 회장이 바로 그 사람이다.

    공산당 관료 출신의 장회장은 1984년 하이얼의 공장장으로 취임해 20년 만에 ‘글로벌 기업’의 키를 잡은 세계 경제의 거물로 성장했다. 구닥다리 냉장고 공장으로 출생신고를 한 하이얼이 15만여개의 라인업을 가진 가전메이커로 거듭나는 데 그가 혁혁한 공을 세웠음은 물론이다. 일본의 아성을 깨뜨린 장회장과 하이얼은 중국인들에게 ‘자부심’과 ‘자존심’이자, ‘신뢰’와 ‘믿음’ 그 자체다.

    기술 넘기고 전략적 제휴 속출

    그렇다면 ‘소네’ ‘마씨시티’ 등 브랜드까지 베낀 ‘짝퉁’ 가전제품이 범람하는 ‘짝퉁의 왕국’이요, 세계에 노동력을 파는 ‘하청기지’에서 어떻게 이런 거대기업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하이얼은 ‘기술력’이 아니라 ‘시장’을 무기로 전 지구적 ‘부가가치 먹이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서서히 올라서고 있다. 먹이 피라미드의 정상에 서는 것은 하이얼의 욕망이기도 하다. 한국기업들은 기술력이 앞서 있음에도 벌써부터 피라미드의 아래쪽에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중국으로선 저임 노동력을 바탕으로 외국기업을 유치해 돈을 버는 ‘하청 경제’의 한계가 극복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 수준에 크게 뒤떨어진 내수용 냉장고를 만들던 하이얼이 세탁기 에어컨 TV는 물론이고 휴대전화, 컴퓨터를 생산·수출하는 거대기업으로 성장하게 된 원동력은 크게 두 가지. 중국 소비자들의 ‘로열티’와 하이얼의 ‘잡식성 기술 습득’이 바로 그것이다.

    하이얼은 내수시장에서 철옹성을 쌓았다. 점유율 30% 미만의 제품은 아예 생산하지도 않는다는 풍문이 나돌 정도로 중국인들은 하이얼을 사랑한다. 이런 철옹성은 세계 각국의 첨단 기술을 손쉽게 집어삼킬 수 있는 무기가 되고 있다. 삼성전자의 한 임원은 “하이얼의 가파른 성장은 시장을 미끼로 이뤄지는 기술 습득으로 제품군을 다양화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하이얼은 지난해 한국시장에 진출하면서 공략의 교두보로 와인냉장고를 선보였다. 세계 1위의 점유율을 기록하는 냉장고를 수출하기에 앞서 와인냉장고로 리트머스 시험지를 꽂아본 것. 하이얼은 4월부터 한국 냉장고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한다. 한국에 냉장고를 수출하겠다는 시도는 하이얼의 ‘기술력’으로만 보면 무모한 도전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국은 냉장고에 관한 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갖고 있다. 소소해 보이지만 습도와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김치냉장고의 기능은 냉장고 기술의 ‘최고봉’이라는 평가다.

    그런데 재미있으면서도 씁쓸한 것은 하이얼이 한국에 수출한 와인냉장고가 실상은 ‘한국 기술’로 만들어졌다는 점. 하이얼이 한국 기술을 삼켜 ‘made by haier’로 되팔고 있는 셈이다.

    하이얼이 수출한 와인냉장고에 기술을 제공한 곳은 김치냉장고 제조업체인 A사. A사는 하이얼과 김치냉장고 공동연구소를 설립했다. 하이얼에 기술을 전수해주고 그 대가로 하이얼의 이름을 빌려 중국시장에 물건을 내다팔겠다는 뜻이었다. 결과적으로 하이얼은 한국기업과 제휴함으로써 손쉽게 냉장고 관련 첨단기술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 업체 계열사의 한 CEO는 “매국노라는 비판도 있을 수 있겠지만 하이얼과 제휴를 맺으려면 기술 이전을 해줄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중견업체인 B사도 하이얼과 제휴해 칭다오시에 연구개발센터를 설립할 계획이다. B사는 한국 벤처기업의 첨단기술을 응용한 제품을 하이얼과 함께 상품화해 중국 및 세계시장에서 판매할 것으로 알려졌다. 하이얼은 이 회사가 갖고 있는 정수기, 비데 기술 등을 노리고 있다는 후문이다. 이 회사의 한 관계자는 “기술 이전 협상이 길어져 연구개발센터 설립이 미뤄지고 있다”고 털어놨다. 협상 결과에 따라 국내 벤처기업의 최신 기술과 B사의 핵심기술 등이 하이얼에 넘어갈 수 있는 것.

    이밖에 자체 역량으로는 중국시장 공략이 쉽지 않은 중소 휴대전화 제조업체의 상당수가 하이얼과 기술 이전을 조건으로 제휴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이얼과 제휴관계를 맺고 있는 휴대전화 제조업체 C사의 한 관계자는 “기술을 팔아먹는다는 비판이 두려워 모두들 쉬쉬하고 있지만 중소업체들은 거의 모두 하이얼과 제휴를 맺고 있다고 봐도 된다”고 귀띔했다.

    하이얼은 한국의 기술을 수혈받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전 세계에서 기술을 빨아들이고 있다. 컴퓨터 기술은 주로 대만으로부터 확보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대만의 컴퓨터 업체들도 하이얼과의 관계를 숨기기는 마찬가지라고 한다. 하이얼은 또 HP, NEC, e머신스 등 첨단기업들과도 기술 이전을 전제로 제휴관계를 맺고 있으며, 삼성전자도 하이얼과 통신기술을 이용해 가전제품을 제어하는 네트워크 가전사업 부문에서 전략적 제휴를 체결한 바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히타치 도시바 등 일본의 주요 전자업체들마저도 중국업체에 ‘핵심’기술을 제공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핵심기술 이전을 우려해온 일본기업들이 돌변한 것은 자의가 아니다. 미국 및 유럽 기업이 중국기업과 먼저 제휴를 맺어 기술을 이전하고 시장을 챙기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하기 위해서다. 첨단기술을 갖고 있는 일본기업들도 내수시장의 점유율과 로열티를 앞세운 하이얼의 기술 먹이사슬에 편입되고 있는 셈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일본은 유럽기업들의 첨단기술 이전 움직임이 감지되면 먼저 선수를 쳐 기술을 제공한다. 이런 추세라면 한국가전이 품질 경쟁력에서도 뒤처질 수 있다. 대우일렉트로닉스(옛 대우전자)를 포함해 TV 에어컨 특수냉장고 생활가전 등 특정 제품에 강점을 갖고 있는 한국의 스페셜리스트 업체들은 앞으로 힘들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하이얼은 이미 이처럼 손쉽게 얻은 기술을 바탕으로 세계시장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1999년 미국 현지법인을 설립해 미 냉장고 시장의 50%를 차지했으며 미국 외에도 이탈리아, 알제리 등 해외에 13개 공장을 소유하고 있다. 일본에선 산요와 함께 산요하이얼이란 회사를 세우고 공세에 나섰다. 라인업이 부족한 산요가 하이얼에 의지해 재기에 나선 것. 하이얼의 전체 라인업은 △국내 소싱(중국기술로 중국 내 생산) 국내 판매(30%) △해외 소싱(해외기술로 중국 및 해외 생산) 국내 판매(30%) △해외 소싱 해외 판매(30%) △국내 소싱 해외 판매(10%)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전문지 ‘에퀴터블’은 최근 ‘한국의 삼성-일본의 소니-중국의 하이얼’, ‘한국의 LG-일본의 마쓰시타-중국의 TCL’이 향후 ‘연합전선’을 구성할 것으로 예측했다. 한·중·일 3개국의 1, 2위 주자가 자국 내 경쟁을 넘어서 국제적으로 양대 진영으로 나뉘어 정면승부를 벌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연합전선론은 다소 러프해 보이지만 아직도 하이얼을 한 수 아래로 깔보고 있는 한국의 중견 전자업체들이 어떤 형식으로든 마주할 수 있는 시나리오”라고 말했다. 어쨌든 수년 전부터 거론돼왔던 “유명 글로벌 브랜드(상표)의 상당수가 중국 국적을 갖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먹이 피라미드의 정상을 향해 치닫고 있는 하이얼에 의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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