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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전 실미도, 31명의 슬픈 추억

영화 흥행 성공으로 ‘북파공작부대’ 관심 고조 … 말문 연 노장들 “대원들 공산혁명가 안 불렀다”

33년 전 실미도, 31명의 슬픈 추억

33년 전 실미도, 31명의 슬픈 추억
33년 전에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 ‘실미도’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이 부대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관심은 의문을 촉발한다. 이 부대의 내력은 무엇인가. 당시 한국군은 실미도 부대 이외의 다른 북파공작부대를 운영하지 않았을까, 지금도 이 부대의 후신이 존재할까, 영화에서 이 부대는 공군 소속으로 나오는데 왜 이 부대는 육군이 아닌 공군 소속이었을까 등등.

관심이 높아지면 해답도 쉽게 찾아지는 법. ‘실미도 태풍’이 거세지자 그동안 은인자중하던 노장들이 세월의 더께를 깨고 나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들이 입을 열게 된 이유는 분노 때문. 영화에서 버스를 탈취해 노량진까지 진출한 북파공작원들은 공산 혁명가인 ‘붉은기’(인터내셔널가)를 부르고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한다. 이에 대해 노장들은 영화의 창작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장면은 명백한 이적(利敵) 행위다. 그들은 붉은기를 부르고 죽지 않았다. 어떻게 이 땅에서 붉은기 노래가 울려퍼질 수 있느냐”며 분노를 나타냈다.

한국전 땐 월남한 반공청년들이 요원 활동

실미도 부대의 연원을 찾으려면 1950년 이 땅을 피로 적신 6·25전쟁의 역사를 들춰보아야 한다. 6·25전쟁 때 북한의 지령을 받은 빨치산이 지리산과 소백산 백운산 태백산 등에서 준동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는 이태씨의 ‘남부군’, 이병주씨의 ‘지리산’, 조정래씨의 ‘태백산맥’ 등을 통해 이미 세상에 알려졌고, ‘남부군’과 ‘태백산맥’은 같은 이름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해방 이후 한국에서 군정을 펼치던 미군은 1949년 일본으로 철수했는데, 이때 KLO(Koran Liaison Office)라고 불린 한국연락단을 남겨놓았다. 당시 미국은 북한의 공산정권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따라서 KLO는 북한 출신의 반공 월남 청년을 에이전트로 고용해 북한 정보를 수집하는 외부 정보조직을 운영했는데, 이 조직이 바로 ‘켈로(KLO)부대’였다. KLO부대는 고트(염소)·불독 등 다양한 이름을 가진 여러 부대로 편성돼 있었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전선은 순식간에 낙동강, 압록강을 오르내리다 51년 여름부터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 고착됐다. 전선이 안정돼가자 도쿄에 본부를 둔 미 극동군사령부는 서해 도서에 해상 침투를 주로 하는 동키(당나귀)부대 등을 만들고, 이어 낙하산으로 뛰어내려 유격활동을 하는 토치라이트(torch light)·코크랜드·아베니·스톰의 네 개 부대를 편성했다. 그리고 이 부대를 지휘하기 위해 8240부대를 만들었는데 8240부대는 미군 대령을 사령관으로 서울 종로2가 태화관 부근에 사령부를 두었다.

토치라이트 등 네 개 부대의 요원들도 대부분 북한에서 내려온 반공청년들이었다(민간인 신분). 유격훈련을 받고 에이전트가 된 이들은 미 공군의 B-17 폭격기를 타고 수풍·삭주 같은 북한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려 유격전을 벌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레지스탕스’ 임무를 수행했던 것이다.

33년 전 실미도, 31명의 슬픈 추억

말도의 공작대원. 맨 왼쪽이 이용수씨다. 1980년대 한국을 방문해 공군 관계자와 사진을 찍은 니콜라스(앞줄 가운데 외국인).서해 말도에 등대안내소란 위장 간판을 달고 있었던 대북공작기지(위).말도에서 운영한 북한침투공작선(1954년).(왼쪽부터 시계방향)

33년 전 실미도, 31명의 슬픈 추억

지금의 이용수씨.

6·25전쟁은 제트기가 전투에 투입된 세계 최초의 전쟁이었다. 북한과 소련 공군은 미그-15로, 미국 공군은 ‘세이버’로 불렸던 F-86 제트 전투기로 공중전을 벌였는데, 미군기가 13대 1의 비율로 우세를 보였다. 그러나 운 나쁘게 격추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때 비상탈출한 미군 조종사를 적지에서 빼내오는 게 8240유격대원들에게 부여된 임무 중의 하나였다.

1953년 들어 휴전협상이 본격화하자 미군은 유격작전을 제한했다. 그러나 미 극동군 예하의 극동공군은 대북 정보활동을 계속했다. 미 공군의 전투사령부에서는 항공정보부대(Air Intelligence Service·AIS)가 정보업무를 수행하는데, 미 극동공군에서는 항공정보전대(Air Intelligence Squadron)가 이 일을 한다(AIS는 지금도 있는 조직이다. 현재 오산에 있는 미 7공군은 극동공군의 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7공군에는 607항공정보전대가 나와 있다. 공군의 전대는 육군의 대대와 동급이다).

소련 전투기 비밀 캐기 위한 치밀한 공작

전선이 고착화될 무렵 극동공군은 서울 오류동에서 6006부대를 창설했다. 수도권 전철 1호선이 지나는 오류역 뒤편의 야트막한 산 아래에는 ㅍ교회가 들어선 넓은 부지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6006부대가 있던 곳이다. 6006부대의 책임자로는 대북공작 세계에서는 전설적인 인물로 꼽히는 도널드 니콜라스가 임명되었다.

니콜라스는 미 육군 장교로 통신보안 분야의 일을 한 사람이다. 1945년 미군이 한국에 들어와 군정을 펼치자 그는 대위 계급장을 달고 수도경찰청에서 고문 역할을 하다 제대했다. 그리고 6·25전쟁이 터지자 보안 장교 활동을 한 경험을 살려 극동공군의 AIS에 문관으로 고용돼 6006부대를 이끌게 된 것이다. 당시 한국은 일본에서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인들은 영어보다 일어에 훨씬 더 익숙했다.

일어로 고양이(猫)를 ‘네코(ねこ)’라고 하는데, 당시 한국인의 귀에는 ‘니콜라스’가 ‘네코’에 가깝게 들렸다. 그리고 서양인은 고양이처럼 생겼다는 선입견이 있어 6006부대는 ‘네코 부대’로 불렸다. 이것이 전설적인 대북공작부대인 네코 부대란 이름이 생겨나게 된 배경이다. 한편 한국 공군은 6006부대와 같은 임무를 할 목적으로 20특무전대를 창설해 6006부대에 배속시켰다.

6·25전쟁 중 소련은 세계 최초로 음속을 돌파하는 미그-17 전투기를 선보였다. 미그-17은 신의주 상공까지 침투한 미국의 B-29 폭격기를 12대나 격추하는 전과를 거뒀다. B-29는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바 있는 ‘하늘의 요새’인데 미그-17한테는 맥을 추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비상탈출한 조종사를 구해내고 미그-17의 비밀을 캐내는 일은 가장 화급한 과제가 되었으므로 극동공군은 대북 정보활동을 줄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니콜라스는 이용수씨(73) 등 8240부대에서 활약한 한국인 첩보요원들을 불러들여 조직을 강화했다.

33년 전 실미도, 31명의 슬픈 추억

오류동의 ㅍ교회 터에는 공수교육을 한 타워가 십자가를 올린 채 남아 있다(오른쪽). 지금은 교회 터로 변한 서울 오류동의 6006부대 터.

1953년 7월 휴전이 체결된 후로도 6006부대는 공작을 계속해 그해 9월23일 이용수씨가 참여한 대북공작부대의 노력으로 북한 공군 노금석 대위가 미그-17을 이끌고 한국으로 귀순케 하는 데 성공했다. 노대위가 귀순하는 즉시 미국은 미그-17과 노대위를 미국으로 데려가 초음속 비행의 비밀을 벗겨냈다.

휴전 후에는 항공기를 이용한 침투가 어려워지자 6006부대는 연평도 소청도 대청도 백령도 말도 등 서해 북방한계선 상의 섬을 기지로 대북공작을 펼쳤다. 미 공군이 이 지역을 10지구로 불렀는데, 이용수씨는 10지구의 부(副)대장 겸 말도 부대장을 맡았다. 이 시기 각 섬에 있던 6006부대 예하 공작부대는 선박을 이용해 많은 공작원을 북한에 투입했다.

청와대 습격 124군부대와 인원 같게 편성

1954년 9월 극동공군이 일본으로 철수함으로서 6006부대가 사라지게 되자 한국 공군의 20특무전대가 6006부대의 임무를 떠맡았다. 이런 이유로 서해상에 있던 많은 섬들이 공군 관할로 넘어왔는데 이중 하나가 실미도였던 것이다. 20특무전대는 대북정보활동을 하던 23첩보대와 25첩보대, 그리고 국내에서 대공수사를 주로 하는 26특수수사대로 구성돼 있었다.

26수사대는 대공분야라고 하는 특수수사를 주로 했기 때문에 OSI(Office of Special Investigation)로 불렸는데, OSI의 명성이 커지다 보니 OSI를 공군의 대북정보부대로 잘못 안 사람이 많아졌다. 그러나 20특무전대가 대북공작 임무를 떠맡으면서 26수사대는 오류동에서 여의도 비행장으로 옮겨갔다. 이로써 23첩보대와 25첩보대만 남게 되자 20특무전대는 2325부대라는 위장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2325부대는 서해 5도를 비롯한 여러 곳에 대북공작부대를 유지하며 유사시 공군 작전에 필요한 대북정보를 수집하는 활동을 벌였다. 그런 와중인 1968년 북한군의 대남공작부대인 124군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하는 1·21사태가 일어났다. 그러자 가장 강력한 대북공작부대인 2325부대에 똑같은 방법으로 김일성이 거주하는 주석궁을 폭파하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북한의 124군부대가 31명으로 편성되었으므로 김일성을 죽이러 갈 북파공작대도 31명으로 구성됐다.

2325부대는 과거 실미도에 이 공작대를 배치해 훈련시켰는데 이때 실미도 부대에게 부여된 명칭은 2325부대 209파견대였다. 1971년 8월23일 209파견대에서 훈련받던 에이전트(북파공작원)들은 실미도를 탈출해 서울 노량진까지 진출했다가 폭사했다. 그후 2325부대는 6546부대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80년대 육·해·공군의 대북공작부대가 통합되면서 국군정보사령부로 출범했는데, 91년 국군정보사는 오류동에 있던 부대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땅을 매각함으로써 지금은 ㅍ교회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육·해·공군의 대북공작부대가 국군정보사로 통합되었다고 해서 해군과 공군이 대북침투부대를 전혀 갖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오산이다. 국군정보사는 육군적 성격이 강한 부대이다 보니 해군과 공군은 그들 작전에 맞는 대북침투부대를 소규모로 유지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공군의 전투기 조종사들이 북한으로 날아간다. 이때 몇몇 공군기는 북한군의 포화를 맞아 격추되고 조종사들은 비상탈출하게 된다. 이 조종사를 구출하는 일은 육군의 특전사나 해군의 UDT가 수행해내기 어렵다. 이 임무는 공군 사정에 밝은 공군만이 제대로 해낼 수 있어, 공군은 헬기를 타고 적진으로 침투해 조종사를 구출해내는 것을 주임무로 하는 전대급 특수부대를 현재도 운용하고 있다.

이용수씨 등 실미도 부대의 내력을 밝혀준 노장들은 “실미도 사건은 지금은 이해하기 힘든 남북대치라는 엄혹한 안보상황 속에서 터져나온 비극이었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알지 못하고 ‘붉은기’ 노래에 현혹되는 젊은이들이 나타난다면 우리의 미래 안보는 어둡기 그지없다. 영화와 현실을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아직도 우리는 분단국가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주간동아 2004.01.22 419호 (p54~56)

  •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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