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12

2003.12.04

또래간 상습 ‘성폭력’이 장난이라고?

아동보호시설 내 10여명 피해사건 충격 … 쉬쉬하면 할수록 몸과 마음 상처 평생 ‘고통’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3-11-27 13: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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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래간 상습 ‘성폭력’이 장난이라고?

    또래집단 내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모 아동보육시설(맨 왼쪽).아동들을 집단수용하는 보호시설에서는 성폭력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서울시의 한 아동복지시설에서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으나 교사들이 앞장서 이를 무마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지난 6월 말. 수두를 앓아 격리 수용된 한 소년의 방에 다른 소년이 침입해 강제로 항문에 성기를 삽입하는 등 2차례에 걸쳐 성폭행한 것이다. 일반적인 경우 10여명의 소년이 한 방에서 함께 잠자도록 되어 있지만 피해자는 당시 전염을 막기 위해 격리돼 혼자 잠을 자고 있었다.

    이 사건은 한동안 묻혀 있다가 10월 말 피해자가 상담교사에게 피해 사실을 털어놓음으로써 공개적으로 알려졌다. 초등학교 저학년인 이 소년은 시설 내에서 24시간 얼굴을 마주 대하는 가해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넉 달 이상 피해 사실을 숨겨온 것으로 드러났다.

    피해자와 가해자 한 공간서 생활

    문제는 이후 복지시설측의 대응. 교사들은 “남자 아이 사이의 일인 데다 ‘장난’ 수준의 사건이기 때문에 재론할 경우 오히려 긁어 부스럼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이 사건을 덮어버렸다. 상담을 통해 동일한 가해자가 10여명의 다른 소년들도 성추행한 사실이 드러났지만, 복지시설측이 그에게 내린 조치는 어린이 숙실 접근 금지와 운동장 두 바퀴 돌기의 처벌이 전부였다. 오히려 교사회의를 통해 “앞으로 이 문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내부지침까지 마련한 것으로 전해졌다.



    문제가 된 시설은 절도, 가출 등 비행을 저지른 남자 아동을 24시간 수용하는 기관. 현재 8세에서 18세까지의 소년 130여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다양한 연령대의 소년들이 집단적으로 보호받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 같은 사건은 얼마든지 재발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시설 운영자는 이에 대해 “어린아이들에게 적절하지 못한 ‘애정표현’을 하는 학생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시인하면서도 “아이들이 피해 정도를 과장하는 것일 뿐 우려할 만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설 차원에서 충분히 교육하고 방지책을 세우고 있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10여명의 성폭력 피해 사실은 묻혀버렸고, 피해자와 가해자는 지금도 한 공간에서 ‘보호’를 받고 있다.

    또래 사이 성폭력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안전지대로 여겨졌던 보호시설 내에서 성폭력 사건이 흔히 일어난다는 것은 충격적이다. 그러나 24시간 보호시설뿐 아니라 학교나 학원에서도 또래 사이 성폭력 사건이 적지 않게 보고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다만 사회적으로 공론화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통계에 따르면 2002년 말 현재 성폭력 가해자 2926명 가운데 어린이· 청소년 가해자는 413명으로 전체의 13.9%를 차지한다. 이 가운데 형사 미성년자인 만 13세 미만의 가해자도 126명으로 전체의 4.2%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폭력 피해자 100명 가운데 14명은 청소년에게, 그 가운데 4명 이상은 어린이에게 피해를 당하고 있는 셈이다.

    또래간 상습 ‘성폭력’이 장난이라고?
    가해자의 나이가 어릴 경우 피해 대상은 대부분 그보다 더 어린 유아나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이이기 때문에 이 수치의 대부분은 또래집단 사이의 성폭력이라고 볼 수 있다.

    부산성폭력상담소의 지은진씨는 “최근에는 초등학교 5학년 남학생 세 명이 학교 내 유치원에 다니는 6세 여자 어린이를 성폭행하려다 적발된 사건도 있었다”며 “또래집단 사이에서 강간뿐 아니라 윤간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부산성폭력상담소의 통계는 2002년 말 현재 유아 성폭력 피해자의 26.7%가 학내(유치원, 유아원, 학원 등)에서 피해를 당한다고 보고하고 있다. 실제로 또래 성폭력의 대부분은 이들이 집단적으로 생활하는 시설 안에서 벌어진다.

    합리적 방식으로 문제 해결해야

    이 같은 성폭력의 또 하나의 특징은 동성간의 성폭력도 적지 않게 나타난다는 점. 앞서의 시설처럼 남자 아이 혹은 여자 아이만 수용돼 있는 기관이 적지 않고, 어린이의 경우 상대방에게 가장 큰 수치심을 느끼게 함으로써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성폭력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처럼 공공연한 어린이시설 내 또래 간 성폭력이 어른들의 무관심과 보신주의로 인해 ‘없었던 일’로 묻혀버린다는 점이다. 앞의 사례에서 보듯, 대부분의 교사들은 ‘장난’이라거나 ‘사소한 실수’ 정도로 사건을 덮어버리려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가해자에게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거나, 피해자를 “별일 아니다”라며 다독거리는 것으로 사건이 끝났다고 믿는 것이다.

    가해자가 만 13세 미만일 경우 형사상 소추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이들은 어떤 법적 책임도 지지 않고 여전히 피해자의 주위에 머무르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처럼 사건이 알려진 후에도 가해자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을 경우 피해자는 상당한 좌절감과 정신적 충격을 느낀다는 보고가 있다. 특히 시설에 피해가 갈 것을 두려워하는 교사들이 “우리 안에서 해결하자”고 문을 걸어 잠그는 등 피해자의 고발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피해자는 평생 동안 심리적 고통을 겪는다고 한다.

    성신여대 심리학과 김정규 교수는 “어린 시절에 성폭력을 당할 경우 피해는 훨씬 심하고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며 “피해 사실이 알려졌을 때 주위에서 이를 믿어주지 않거나, 심지어 피해자를 꾸짖고 침묵하게 할 경우 상처는 더욱 심해진다”고 설명했다. 사건 당시 정신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경우 이들은 평생 동안 불안장애, 강박, 우울증 등 성격장애를 겪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국성폭력상담소의 권주희씨는 “지금과 같은 주먹구구식 해결방식은 가해자들에게 ‘장난이었다’는 면죄부를 줌으로써 또 다른 성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다. 또 가해자를 피하기 위해 피해자들이 이사나 전학을 선택하는 등 오히려 피해자들을 더 위축되게 만든다는 점도 문제”라면서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교사들이 성폭력에 대한 올바른 교육을 받고 상식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성폭력이 가져올 수 있는 가장 큰 피해는 임신이나 출산 같은 성인 이성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사건 피해자가 겪는 정신적 충격이다. 이 때문에 흔히 ‘성폭력’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또래 간 성폭력도 신중하게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아동 성폭력 피해자 가족모임 송영옥 대표는 “성폭력 피해자와 그 가족의 아픔을 줄이기 위해서는 어떤 성폭력이든 투명하고 정의로운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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