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04

2003.10.09

이승엽 56호 그것은 ‘신화와 희망’

국민타자 라이언킹 홈런쇼 전국이 들썩 … 올 마지막 시즌 ‘유종의 미’ 거두고 메이저리그 行

  • 이용균/ 굿데이 야구부 기자 bravepig@hot.co.kr

    입력2003-10-01 16: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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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이라는 수식어는 아무에게나 붙지 않는다. 스포츠 스타 중 ‘국민’이라는 거창한 말을 이름 앞에 달 수 있는 선수는 ‘국민타자’ 이승엽(27·삼성)뿐이다.

    1997년 겨울부터 시작된 IMF 외환위기 한파는 99년에 이르러서도 온 나라를 꽁꽁 얼어붙게 했다. 그 흉흉했던 시절 이승엽은 방망이 하나로 한반도를 들끓게 했다. 이승엽은 홈런 54개를 터뜨리며 한국 프로야구 역사를 다시 썼다. 그러나 진짜 ‘국민타자’가 되기에는 단 1개의 홈런이 모자랐다. 일본의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인 55개를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시즌 129차전에서 54호 홈런을 기록한 이승엽은 남은 4경기에서 국민적 응원을 받았지만 결국 눈물을 훔쳐야만 했다.

    “승엽아 너 보면 시름을 잊는다”

    2002년 월드컵이 성공리에 치러졌지만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2003년 또한 99년 못지않게 우울한 소식들이 계속 들려왔다. 다시 어려워진 경제는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청년실업률이 7%를 돌파하며 경제회생의 젖줄마저 끊어놓았다. 이합집산으로 어지러운 정치권은 국민들에게 실망만 안겨줬다.

    세상이 어지럽자 ‘국민타자’는 다시 방망이를 세웠다. 이번에는 54개에 머물 수 없었다. 올 시즌을 마치고 메이저리그 진출을 노리는 이승엽은 한국 땅에서 뛰는 마지막 시즌에서 반드시 국민의 소원을 풀어주어야 했다. 이승엽은 결국 9월25일 기아전에서 아시아 타이기록인 55호 홈런을 터뜨리며 진정한 ‘국민타자’로 우뚝 섰다.



    ‘국민타자’ 이승엽은 개막전이던 4월5일 대구 두산전에서 프로야구 선수 중 가장 친한 두산 선발 박명환으로부터 연거푸 홈런을 뽑아내며 화려하게 홈런쇼의 시작을 알렸다. 경기가 끝난 뒤 두산 박명환이 “너무한 것 아니냐”며 이승엽에게 투정을 부렸을 정도.

    그러나 이승엽의 홈런쇼는 좀처럼 이어지지 않았다. 삼성은 개막 10연승을 달렸지만 이승엽의 타율은 1할8푼2리에 머물렀다. 마지막 시즌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는지 이승엽은 4월 내내 1할8푼6리의 빈타에 허덕였다. 99년 앙드레 김의 패션쇼에 참석했을 정도로 ‘멋쟁이’인 이승엽은 야구가 잘 안 풀리자 머리까지 스포츠형으로 짧게 깎았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헤어스타일”이라며 애써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이승엽의 홈런포는 5월15일 대구에서 벌어진 LG와의 더블헤더 1·2차전부터 불붙기 시작했다. 경기 전까지 이승엽은 현대 심정수에게 홈런이 3개나 뒤져 있었지만 초조함이 약이 됐는지 이날 더블헤더 1·2차전에서 홈런 4개를 몰아 치며 심정수와의 홈런 스코어를 단숨에 13대 12로 뒤집어버렸다.

    이승엽의 방망이가 달아오르자 드디어 2003년에도 ‘국민타자’의 홈런에 대한 관심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승엽은 5월15일 ‘대활약’을 시작으로 홈런포 생산에 더욱 가속도를 붙였다. 이승엽은 5월 셋째 주 7경기에서 홈런 6개를 몰아 치는 등 5월에만 홈런 15개를 기록해 자신이 99년 5월에 세운 월간 최다 홈런 수와 타이를 이뤘다. 이승엽은 5월31일 인천 SK와의 더블헤더 1차전에서 연타석 홈런을 터뜨리며 기록을 달성했다. SK는 전반기 동안 1·2위를 오르내리며 잘나갔지만 이승엽에게만은 맥을 못 췄다. 월간 최다 홈런 기록을 허용한 것은 그저 악몽의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이승엽의 홈런 페이스는 달아올랐고 5월31일 현재 기준으로 이승엽의 예상 홈런 수는 65개에 이르렀다. 축구에서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는 국가대표 한·일전에서 일본을 꺾어주기를 바라듯이 국민들은 이승엽 홈런 수에서도 반드시 일본을 꺾어주기를 바랐다.

    스포트라이트는 이승엽의 세계 최연소 300홈런 기록에 맞춰졌다. 6월2일까지 홈런 22개를 기록한 이승엽의 통산 홈런 수는 290개였고 이승엽은 26세9개월15일에 불과했다. 10개만 추가하면 메이저리그의 알렉스 로드리게스(텍사스)가 4월7일 세운 27세8개월8일을 뛰어넘는 것은 물론이고 일본 오 사다하루(왕정치·다이에 감독)의 27세3개월11일이라는 기록도 가뿐하게 갈아치운다.

    세계 신기록이라는 새로운 목표가 정해지자 팬들의 관심이 몰린 것은 당연했다. 삼성 라이온스로서도 99년에 이어 이승엽을 통한 홍보효과를 최고로 이끌어낼 기회를 맞았다.

    장하다! 세계 최연소 300홈런

    그런데 삼성은 뜻밖의 고민에 부딪혔다. 당시와 같은 홈런 페이스라면 아시아 신기록인 56개를 쳐낼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아 보였다. 자칫 세계 최연소 300호 홈런에 대한 이벤트를 너무 거창하게 했다가는 56호 홈런을 때렸을 때의 이벤트 및 경품의 수준을 ‘경제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삼성은 고민 끝에 결국 경품을 없앴다. 아시아 신기록 수립에 대비한 고육지책이었다.

    그러나 한번 열광하기 시작한 팬들의 관심은 좀처럼 사그라질 줄 몰랐다. 대구경기가 있을 때마다 팬들이 가득 들어찼고 이승엽의 300호 홈런을 목을 빼고 기다렸다. 다급해진 삼성은 300호 홈런볼을 회수해 역사관에 전시하기 위해 부랴부랴 29인치 완전평면 TV를 경품으로 내걸었다.

    이승엽은 6월22일 대구 SK전에서 8회 김원형으로부터 우월 1점 홈런을 얻어내 세계 최연소 300호 홈런을 기록했다. 당시 26세10개월4일. 상대는 또다시 지난 5월31일 월간 최다 홈런 기록의 희생양이 되었던 SK였다. 일부에서는 “이니셜 첫 글자도 S로 같고, 유니폼 색깔도 파란색으로 같아 자꾸 대기록을 허용하는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이승엽 홈런의 희생양 SK의 수난은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 SK는 7월25일 인천 삼성전에서 이승엽에게 39호를, 다음날인 26일 40호를 얻어맞으며 한 시즌 최소경기 40홈런(78경기)이라는 또 하나의 세계 신기록을 선물해야만 했다. SK 최종준 단장은 “삼성으로부터 공로패라도 받아야겠다”며 뼈 있는 농담을 던지기까지 했다.

    이승엽의 300호 홈런은 중국으로부터 뜻밖의 소식이 날아들며 더욱 세상의 관심을 모았다. 조선족 가수 최건의 아버지인 최웅제씨가 “전 재산인 10만 달러(약 1억1500만원)를 털어 300호 홈런볼을 사겠다”는 의사를 언론사에 전해왔기 때문. 야구공 하나에 1억원이 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겨우 29인치 TV로 300호 홈런볼을 회수하려 했던 삼성은 낭패를 당했고 공을 주운 이상은씨(24)는 단숨에 ‘대박’을 맞았다.

    팬들의 의견은 갈라졌다. 한국 프로야구사에 기념비적인 홈런볼을 중국에 보낼 수는 없다는 의견이 쏟아졌다. 이때 휴대전화 안테나 전문 생산업체인 ㈜에이스 테크놀로지 구관영 사장이 “야구팬의 한 사람으로서 공이 중국에 넘어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내가 같은 가격에 사겠다”고 나섰고 중국측에서 “아쉽지만 포기하겠다”고 밝혀 300호 홈런볼은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남게 됐다. 그러나 이 같은 결정이 있던 다음날인 7월9일 중국 베이징에서 발간되는 ‘베이징청년보’는 중국측 구매자였던 최웅제씨가 인터뷰를 통해 “평소 민족교육에 관심이 많던 본인은 주변의 간곡한 부탁으로 베이징국제영재학교의 ‘명예출자자’ 형식으로 참석했을 뿐”이라며 “이승엽의 홈런볼을 사는 데 있어 이름을 빌려주는 데는 동의했으나 ‘내 전 재산을 털어서 공을 사겠다’라는 말은 한 적이 없다”고 밝혀 1억2000만원이나 하는 이승엽의 300호 홈런볼 가격이 ‘거품’이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어쨌든 이승엽의 300호 홈런볼의 가치가 1억원을 넘기자 56호에 대한 기대와 열망은 더 높아져갔다.

    이승엽은 8월9일 대구 LG전에서 서승화와 몸싸움을 벌여 2경기 출전정지를 당하는 위기에 빠지기도 했지만 출전정지 해제 후 첫 경기(8월14일 대구 한화전)에서 보란 듯이 홈런을 쏘아올렸고 19일부터 22일까지 4경기 연속 홈런을 터뜨리며 시즌 46호째를 기록했다. 특히 22일 잠실 LG전에서는 주먹다짐 상대였던 서승화를 상대로 홈런을 터뜨리며 ‘복수포’를 날렸다.

    한국 야구 이정표 “정면승부 하라”

    이승엽이 9월5일과 6일 수원 현대전에서 50·51호를 터뜨린 뒤 추석연휴 첫날이었던 10일 대구 한화전에서 홈런 2개(52호·53호)를 추가하며 신기록에 3개만을 남겨두며 다가서자 99년의 열풍이 재현됐다. 삼성 김재하 단장은 다른 팀들의 이승엽 견제를 막기 위해 단장 회의를 통해 “한국야구 발전을 위해 제발 정면승부를 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기까지 했을 정도.

    그러나 이때부터 ‘국민타자’ 이승엽의 마지막 위기가 시작됐다. 경기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취재진이 몰리는 등 지나치게 관심이 집중되자 이승엽의 타격 밸런스가 흐트러진 것.

    이승엽이 11일부터 20일까지 10일 동안 홈런을 추가하지 못하자 모두가 초긴장 상태에 빠졌다. 17일 대구 두산전에서는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김응용 감독이 취재제한을 요청했고 이승엽을 보호하기 위해 이후부터 야구장에는 ‘취재제한선’이 설치됐다.

    10일 동안의 지독한 슬럼프를 벗어나게 한 것은 아내의 힘이었다. 이승엽의 아내 이송정씨는 대한민국 최고의 타자를 남편으로 뒀지만 야구에 대해서는 초보자. 이송정씨는 남편의 기를 살리기 위해 중계방송 해설자를 흉내내며 남편의 귀에 대고 “밀어치세요”라고 말했고 이를 들은 이승엽은 귀여운 아내의 충고에 한참이나 배꼽을 잡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기운을 차린 이승엽은 21일 대구 LG전에서 아내의 훈수대로 ‘밀어쳐’ 54호 홈런을 쏘아올리며 22일 생일을 맞은 아내에게 최고의 생일선물을 안겨줬다.

    23일부터 야구장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광주 기아-삼성전에는 연일 1만명에 가까운 팬들이 모여들었고 팬들은 이승엽의 홈런볼을 잡기 위해 잠자리채를 든 채 오른쪽 외야석부터 메웠다. 지역감정도 동서갈등도 없었다. 광주팬들 역시 이승엽의 홈런을 염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국민타자’의 방망이는 ‘국민’의 힘을 북돋웠고 25일 기아 김진우를 상대로 55호 홈런을 터뜨리며 ‘한 시즌 최다 홈런 아시아 신기록 -1’을 달성했다. 시속 155km의 공을 던지겠다며 올 시즌부터 등번호를 ‘55번’으로 바꾼 김진우는 정면승부로 이승엽의 기록 달성을 도왔다.

    27일 부산 롯데전에선 김용철 롯데 감독대행의 ‘꼼수’가 비난의 화살을 맞았다. 정규 시즌 최하위로 확정된 롯데가 이승엽에게 2대 4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고의 사구로 이승엽을 걸러 관중들의 염원에 찬물을 뿌린 것. 이승엽의 홈런볼을 잡기 위해 뜰채까지 들고 나온 롯데 팬들이 분노해 사직구장은 한때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김용철 감독대행이 관중들에게 ‘왜 고의 사구를 던졌는지’ 이유를 설명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국민타자’는 9월29일 현재 ‘한 시즌 최다 홈런 아시아 신기록 -1’을 기록 중이다. 이승엽이 올 시즌 몇 개의 홈런을 더 칠 수 있을까. 이제 ‘국민타자’ 이승엽에게 남은 일은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대한민국의 힘을 보여줘 다시 국민을 신나게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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