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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동네의 GRDP를 아십니까

80년 신군부가 ‘호남 낙후’ 감추려 통계 중단 …지역별 경제상황 판단·정책 수립에 꼭 필요

당신 동네의 GRDP를 아십니까

당신 동네의 GRDP를 아십니까

전국에서 GRDP가 가장 높은(2만147 달러) 울산의 울산공단.

[양평의 근거 있는 주장] 경기 양평군의 1인당 GRDP는 5000달러(2000년 기준) 남짓이다. 같은 기간 경기도의 1인당 GRDP는 1만269달러. GRDP를 비교하면 양평은 경기도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며 전국에서도 경제수준이 매우 낮은 곳이다. 경기도는 양평에 ‘영어특구’를 세울 것을 검토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낙후돼 있는 경기 동부지역의 발전을 꾀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국가균형발전을 주요 국정과제로 추진하고 있는 정부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경기도가 특구 지원 대상에서 ‘잘산다’는 이유로 제외돼 있기 때문이다. 경기도는 도내 시·군의 GRDP를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 거세게 항의하고 있다. 1인당 GRDP가 5000달러밖에 되지 않는 양평이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경기도의 주장은 GRDP 통계상으로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부안의 근거 없는 설득] 핵폐기장 유치 문제로 군수가 ‘몰매를 맞은’ 전북 부안군의 1인당 GRDP는 ‘아무도 모른다.’ 전라북도가 “비용이 많이 들고, 전문인력을 따로 뽑는 게 번거롭다”며 기초적 경제지표인 도내 시·군별 GRDP를 추계하고 있지 않기 때문. 김종규 부안군수는 “부안이 전북에서 가장 낙후돼 있다. 핵폐기장을 유치하면 지금보다 잘살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대다수 군민들의 눈에 그는 ‘고향을 팔아먹은’ 매향노일 뿐이다. “부안의 1인당 GRDP는 현재 얼마고 핵폐기장을 유치하면 GRDP가 어느 정도 상승해 전국에서 몇 번째로 잘사는 도시가 된다”는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했다면 사정은 어땠을까. 부안군 백종기 기획계장은 “‘느낌’ 외엔 부안이 낙후돼 있다는 근거를 대기는 어렵다”면서 “현재 경제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경제지표가 있었더라면 주민들을 설득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4개 시·도서만 시·군·구별 GRDP 추계

당신 동네의 GRDP를 아십니까

평택항 동부두에서 수출용 자동차가 선적되고 있다.

양평엔 있고 부안엔 없는, ‘당연히’ 추계돼야 하지만 ‘철저히’ 버림받은 GRDP는 각 지역별 경제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경제지표다. GRDP는 전국 단위로 집계되는 국내총생산(GDP)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각 시·도, 시·군·구별로 한 해 동안 얼마만큼의 부가가치가 발생했는지를 생산 측면에서 집계한 것. GRDP를 그 지역의 총인구로 나누면 1인당 GDP에 대응하는 1인당 GRDP를 얻을 수도 있다. GRDP는 각 지방자치단체(이하 지자체)의 경제규모, 생산수준, 산업구조 등을 파악하고 정책을 수립하는 데 기초자료로 사용된다.

그런데 문제는 GRDP가 광역시와 도 수준에서만 추계되고 있을 뿐 4개 광역자치단체(대전 경기 강원 경북)를 제외하면 시·군·구 단위에서는 발표되고 있지 않다는 점. 카운티, 시·정·촌별로 GRDP를 추계해 경제정책을 수립하는 데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미국 일본 등 선진국과 크게 대비되는 대목이다. 지방화시대를 부르짖는 국가에서 지방경제에 대한 기본적인 통계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산업연구원 김정홍 연구위원은 “GRDP는 경제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경제지표”라며 “1인당 GRDP가 시·군·구 단위에서 정확히 측정된다면, 다른 어떤 경제지수보다 낙후도를 가장 잘 반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양대 이정식 교수도 “지자체가 경제정책을 기획하고 운용하는 데 GRDP가 필수적”이라며 “시·군·구 GRDP는 국가 차원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경제지표”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세계 12위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한국에서 어떻게 기초적인 통계조차 내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을까. GRDP는 ‘사연이 많은’ 경제지표다. 원래부터 시·군·구별 GRDP를 추계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한국에 GRDP가 도입된 것은 경제개발이 한창 진행되던 1967년. GRDP는 ‘새마을소득’ ‘주민소득’이라는 이름으로 1980년까지 추계돼(현재의 추계 방식과는 다소 다르다) 지역별 경제정책을 짜고 집행하는 데 주요한 경제지표로 사용됐다. 그런데 GRDP가 80년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는다. 죄명은 ‘지역감정 선동’. 당시 내무부에 근무했던 한 교수는 “GRDP 추계를 중단한 것은 상대적으로 낙후돼 있던 호남의 경제상황을 감추기 위한 조치였다”고 회고했다. 신군부가 ‘정치적 이유’로 GRDP를 아예 없애버린 것이다.

GRDP가 다시 추계되기 시작한 것은 노태우 정부 시절인 89년. 통계청이 내무부로부터 업무를 넘겨받아 85년분부터 GRDP를 소급해 통계를 작성했다. 80년부터 84년까지는 GRDP 통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통계청도 정치적 이유로 발표를 미뤄오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93년에 비로소 8년치 GRDP를 일괄 발표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시·군·구별 GRDP가 실종됐다는 점. 정치에 휘둘려 사라졌다 다시 부활하는 과정에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99년 경기도가 자체적으로 도내 시·군의 GRDP를 작성해 발표하기 전까지 시·군·구별 GRDP는 전국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99년 경기도를 시작으로 현재는 대전광역시 강원도 경상북도가 시·군·구별 GRDP를 발표하고 있다. 통계청의 한 관계자는 “대학교수나 연구원들이 시·군·구별 GRDP를 통계청에 요구한 뒤 ‘없다’는 얘기를 듣고 황당해한다”고 전했다.

현재 GRDP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광역자치단체는 경기도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경기 동두천시가 최근 “주한미군 관련 매출이 1400억원으로 지역내총생산 7200억원의 19.4%에 달한다”는 자료를 제시하며 미2사단의 주둔지 이전을 막아달라고 호소하는 등 경기도 내 자치단체들은 GRDP를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다. 경기도의 한 관계자는 “각 시·군별 생산수준을 정책 수립 과정에 반영해 지역 균등 발전을 꾀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면서 “예를 들면 제조업 분야에 약한 양평군 가평군 등은 관광산업을 특화하는 등의 방식을 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군·구별 GRDP를 추계해 발표하고 있는 대전광역시 강원도 경상북도는 GRDP를 내고는 있지만 신군부가 GRDP를 없앴을 때와 같은 논리로 ‘쉬쉬’하며 발표하고 있다. 지역 내 갈등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강원도의 한 관계자는 “주민들이 자신들 지역의 경제수준을 알고 소외감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 쉬쉬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상북도 GRDP 담당자도 “봉화 청송 영양 등은 수치가 형편없다. 가난한 동네라고 낙인 찍히는 걸 누가 좋아하겠느냐”면서 “발표하는 데 부담이 많이 가는 게 사실”이라고 귀띔했다.

GRDP 추계 관건은 비용 아닌 ‘의지’

GRDP를 추계하지 않고 있는 나머지 지자체들의 사정은 한심한 수준이다. 한 광역자치단체의 통계 담당자는 “GRDP를 왜 내지 않느냐”는 질문에 “GRDP가 뭐냐”고 되물어왔을 정도. “그런 거 내서 뭐 하느냐”, “전문인력을 따로 뽑아야 하는데 그러면 예산이 많이 든다”는 게 지자체들의 반응이다. 전라북도의 한 관계자는 “예산이나 인력이 없어 못 내고 있다”면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해야 하기 때문에 10년 정도는 지나야 시작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충청북도 통계 담당자는 “GRDP는 산출하기가 어렵다”면서 “충청북도는 그런 거 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노무현 정부는 “지방화시대를 열어야 한다”며 지역균형발전을 강조하고 있다. 어느 지역이 뒤떨어져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조차 되지 않는 상황에서 올바른 정책이 수립될 수 있을까. GRDP를 내는 것은 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다. 현재 시·군·구별 GRDP를 작성하고 있는 광역자치단체의 경우 1~2명의 전문인력이 GRDP를 추계하고 있다. GRDP 담당자들은 하나같이 “손이 많이 가는 일일 뿐 인건비 외엔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부와 지자체들이 귀담아들어야 할 국가전문행정연수원 모성은 교수의 충고다. “지역의 경제상황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자치단체장이 어떻게 올바른 경제정책을 수립할 수 있겠는가. 지방화시대를 외치고 있는 정부도 마찬가지다. 지역균형발전을 이루려면 먼저 얼마나 불균형한지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어느 곳이 개발이 필요한지 파악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지역균형발전 운운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쓸데없이 돈만 낭비하는 축제는 경쟁적으로 개최하면서 비용이 든다는 이유로 기본적인 통계조차 내지 않고 있는 것이 지방자치제도의 현실이다.”











주간동아 2003.10.09 404호 (p34~36)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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